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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하 May 26. 2021

적폐의 평범성

안산뉴스 


김명하 안산대 유아교육과 교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모든 목소리를 튕겨내는 단호한 벽 앞에서 김수영의 시에 공감하며 괴로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커다란 세계에는 분노하면서 정작 일상의 비상식과 비윤리 앞에선 침묵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이더라도 조직에 해가 되는 말은 하지 마세요. 조직을 위해 당신의 희생, 혹은 당신의 침묵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 그이도, “당신의 방식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조직이 시끄러운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 하나만 참으면 됩니다.”라고 말한 이도 검찰개혁을 외치며 여의도에 섰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광화문에 섰습니다.


개인이거나 소수여서 여성이거나 나이가 어려 약자가 된 이 앞에, 조직이거나 다수여서 남성이거나 나이가 많아 권력으로 선 당신 얼굴이, 군중이 되어 거대한 적폐에 분노하는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나’는 늘 선이라 생각하는 나와 당신의 본성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적폐 앞에서 한 걸음 동떨어져 있는 우리는 저마다가 스스로 선이라 생각하고, 일상의 적폐 앞에서도 내가 적폐의 생산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서로를 악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거대한 세계의 악에 분노하는 선한 시민이 일상에선 또 다른 서로에게 미시적 권력자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그리 생각하면, 멀리 있는 세계의 일은 내겐 거대함이지만, 그 세계 안의 당신 바로 옆 이들에게 당신 일은 일상이었겠네요. 거대한 비상식과 비윤리가 가능한 건, 그 거대함 속의 일상이었던 당신 곁의 비상식과 비윤리에 동조하고 침묵하는 수많은 우리들 때문이었겠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도덕적 면허 효과’란 말을 합니다. 도덕적 면허효과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그런 경력으로 갖게 되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그 정도가 지나치면 독선과 오만을 낳고, 공감능력을 퇴화시켜 자기 객관화를 방해’하는 심리적 특성이라고 합니다. 강남좌파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 가능한 의미입니다.


거대한 세계에 집단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행위로 우리 스스로에게 도덕적 면허, 혹은 도덕적 면죄부를 줌으로써 일상의 수많은 비도덕, 비윤리의 크고 작은 적폐에 가담하는 자신의 행위에 무감각해 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하니 정치와 세계에 무감각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타인과 거대한 세계를 향해 들이미는 윤리와 도덕의 잣대들이, 거대한 세계의 적폐에 분노하는 마음들이 내 외부로만 향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미시적 적폐의 주도적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여의도와 광화문의 촛불과 태극기가 긍정적 에너지로 사용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내 주변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 그 감수성으로 일상의 비윤리와 비도덕에 저항하는 용기를 지니는 일 아니겠냐고, 일상의 누군가를 비난하고 꾸짖는 습관적 판단 앞에 스스로에게 긴장된 정신으로 필사적으로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 아니겠냐고... 오늘도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안고 질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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