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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하 Jan 07. 2023

환대와 추앙, 해방으로 가는 길

경인일보 수요광장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났다. 분노이거나 죄책감이거나 혹은 그리움이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이 되어 아침마다 찾아오는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구씨에게 염미정은 이렇게 말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한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사람과 조직과 시간과 장소에 예속된, 그래서 사랑 아니면 미움조차도 조건부 감정이 당연한 일상에서 누군가를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 드라마의 언어로 말하면 추앙하는 것. 그럼으로써 평안에 이르는 것이 해방 아니겠냐는 말이기도 하다.


최고 권력자에 대한 직설적 정치 풍자가 이슈가 된 2011년의 팟캐스트 '나꼼수'로부터 시작해 불성실한 선배 이름을 팀과제에서 빼겠다는 당당한 후배에게 열광한 2016년의 tv광고를 거치면서 기존의 부당함에 돌직구 날리는 것은 현대인이라면 필수로 장착해야 할 센스처럼 취급됐다. 돌직구는 10여 년의 시간을 반복되고 재생되며 더 강하고 더 날카롭게, 더 독하게 벼려졌고 그 사이에서 풍자나 통쾌함은 곧잘 비하나 모멸의 언어가 되기도 했다. 풍자와 통쾌함이 비하와 모멸로 변질되는 순간 갑이나 권력자 역시 상처받은 을이나 약자가 되는 바, 을인 듯한 갑들 또한 갑인 듯한 을들을 향해 비하와 모멸을 섞은 돌직구를 부끄럼 없이 때론 뻔뻔하게 던질 수 있었다. 갑이나 을이나 권력자나 약자나 모두가 모두를 향해 비하와 모멸과 돌직구 사이에서의 위태한 언어들을 쏟아내는 난투 와중에, 그래서 어떤 것이 풍자와 통쾌함인지 누가 당하는 모멸과 비하가 진짜인지 경계가 애매해진 채 소란스러움만 극으로 치닫는 와중에, 말하는 대신 침묵하는, 맘껏 표출하는 대신 스스로를 억압하는 캐릭터들이 만들어 낸 추앙과 해방이라는 단어는 마치 휴전이란 완충지대에서 느끼는 고요함으로 우리를 열광케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규명 못한 죽음곁을 못떠나는 이들
원할때 이동하고 싶다는 장애인들
최저임금 올라도 차이없는 경비들
CCTV 검증받는 어린이집 교사들
모두가 함께 해방되길 기다리는 것


그러면서도 욕망하나 현실의 우리는 성공하기 어려운 온갖 해방들을, 현대인의 당당한 센스나 기백과는 거리가 먼 그들이 날카로운 언어가 아니라 고요한 언어로, 앙갚음의 마음이 아니라 환대의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해 나가는 장면은 놀라운 것이다. 남자친구에게 사기당하고 버려진 염미정의 해방, 사랑에 이유 없이 패싱 당하는 염기정의 해방, 돈·여자·집·차로부터 염창희의 해방, 끝나지 않는 집안일로부터 엄마의 해방, 가장이라는 무거운 권위로부터 아빠의 해방, 그러니까 갑질과 폭력이 난무하는 비루한 밥벌이와 관계로부터의 해방, 너무도 말 많은 현실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사회적 모순이든 일상적 부당함이든 오래된 관성이든 세상의 지긋지긋한 무언가로부터의 해방. 고요한 환대와 추앙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해방들 말이다.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해방으로 가는 길에 도달했고 우리는 그들의 해방에 열광했으나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의 해방, 그래서 모든 게 지치는 노동이 되는 관계도 여전하다. 아직도 규명하지 못한 죽음들 곁에서 떠날 수 없는 이들이나, 원할 때 이동하고 싶다 이제 겨우 말하기 시작하는 장애인이나, 최저임금이 올랐어도 휴게시간이 3시간30분으로 늘어나 기존과 별 차이 없는 급여를 받는 2교대 경비 노인이나, 잠정적 아동학대자란 의혹에 시달리며 CCTV를 통해 언제든 일상을 검증받아야 하는 유치원·어린이집 교사들, 어느 금에선 모두 경기도민과 다를 바 없는 주변인인 변방의 구씨들과 염미정들도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함께 해방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다 이 경기도 끝자락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 그러기 위해선 우리 서로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그러니 날 선 언어가 여전히 입안에 맴돌고 있어도 이해한다. 당신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을 뿐이다. "혹시 내가 추앙해줄까요? 그쪽도 채워진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필요하면 말해요." 우리 서로 추앙하면 무더운 여름과 혹독한 겨울 지나 새로운 봄이면 조금은 해방되어 있을지 모르니.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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