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수요광장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미국에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 3위에 올랐다. 장르드라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스타배우 한 명 없이, 10분의1도 안 되는 적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유는 뭘까. 동기간의 '아름다운 우정'뿐 아니라 '좋은 직업 윤리'란 판타지가 국경을 넘어서도 공감을 끌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교수와 레지던트, 레지던트와 인턴, 선배 간호사와 후배 간호사, 의료진과 환자 등 갑과 을로 정형화된 관계들이 손쉽게 그 프레임을 벗는다. 선배의 권위는 실력과 환자를 대하는 공감적 태도 위에 세워지고 레지던트와 인턴, 후배 간호사 역시 소속된 공간과 관계에 책임있는 태도를 지니며 서로에게 나쁠 이유 없는 착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물론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각자의 포지션과 그 포지션으로부터 유발되는 심리적·물리적 차이뿐 아니라, 이미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현상을 해석하는 도구가 된 '갑', '을'이란 구분짓기도 원인이 된다. 교수와 레지던트, 레지던트와 인턴, 선배 간호사와 후배 간호사,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갑질'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순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석의 방향은 결정된다. '갑질'이란 단어의 위력은 그만큼 강력하다. 갑과 을로 선 그어지고 이분화된 프레임 안에서는 그럴 것이라는 전제하에 관계나 행위의 대부분이 해석된다.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까 긴장한 채 이루어지는 관계에서는 직업에 대한 윤리나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손해보지 않을 것, 책임지지 않을 것이란 양쪽의 불안이 만들어 내는 금지와 거절이 주요한 직장생활의 지침이 된다.
'라떼는 말이야'… 프레임에 포위돼
자기 역할 제대로 못하는 우리처럼
상사 안된 사람들도 방어 나선 걸까
며칠 전 몇몇 친구를 만났다. 직장에서 팀장, 과장, 학과장이 된 사십대 중반은 분노도 많고 고민도 많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나이 어린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 그래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뉜 세상에서 비정규직으로, 나이 어린 사람으로, 부하직원으로 전전긍긍하다 이제 막 정규직이, 비교적 나이를 먹은, 관리직이 된 사십대 중반들. 그동안의 약자적 삶에 대한 경험으로 권력의 갑질에는 분노하고, 내가 겪은 당신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위풍당당 다짐으로 충만한 이들 말이다. 나도 모르게 갖게 된 나이권력과 직장에서 갖게 된 위계적 권력이 할 수 있는 행위들에 자연스레 민감해진 이들은 업무야 어찌됐든 퇴근 시간 이후가 되면 연락두절 되는 부하직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처리 앞에서 한소리 하는 것조차 꼰대의 갑질인가 상사의 직업적 지적인가, 사사건건 치열한 자기검열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활이 걸린 보고서 제출을 하루 앞두고 맡은 업무도 처리하지 않고 하는 칼퇴, 자료 넘겨 달라는 문자와 전화도 무시한 채 타는 잠수, 록이 걸려 있는 컴퓨터 비번만이라도 알려달라는 연락도 무시, 그러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 업무 시간 이외 연락을 받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부하직원. 이런 태도를 지적할라치면 '부당', '갑질'이란 단어로 역공하는 이들을 보며 오히려 우리의 민감한 자기검열이 조직을 이끌어야 할 최소한의 권위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거다.
'꼰대'·'갑질' 상대 조롱했던 단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닌가
'라떼는 말이야'를 충실히 시전하고, 제 얼굴에 침 뱉기라 그동안 못했던 직원 욕을 실컷 하다가도 문득 또 다른 변명이 생각나는 거다. 특정 의미를 이미 선언한 단어와 프레임에 포위돼 자기 역할 제대로 못하는 우리처럼, 아직은 상사가 되지 못한 이들도 더 날 선 방패로 자신을 방어하는 건 아닐까. '꼰대', '갑질' 이란 상대를 조롱했던 통쾌했던 단어가 어느 순간 젊거나 늙은 우리에게, 월급의 작은 노예거나 큰 노예가 된 우리에게 스스로를 가둬 놓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닌가 말이다.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고 소속된 공간을 애정하며 만들어지는 각 구성원들의 '좋은 직업 윤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율제병원'은 그러니 실상 판타지다'라고 단정해도 이 구부정한 마흔 중반의 위아래를 모두 향한 분노와 그 뒤의 찝찝함은 여전히 어찌하나 싶다.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