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인간이 가진 삶의 목적은 선이며 선은 행복이고, 행복은 덕이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는 늘 삶에 대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가진 것이 많아 풍요로운 자도, 가진 것이 없어 하루하루가 빡빡한 일일 노동자도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행위에 대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목적을 향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렇듯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두고 답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니코마코스)을 위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그가 직접 책으로 엮은 것은 아닐지라도) 남긴 것이리라.
질문을 던져보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지, 그것이 행복을 위한 행위가 맞다면 행위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짚어 보았다. 행복한 삶을 위해 선은 지켜지고 있는지, 덕과 중용은 제대로 된 위치를 잡고 있는지, 지나친 쾌락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왜’라는 질문의 힘은 생각보다 긴 꼬리와 무게를 가진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나의 윤리는 사회의 기준과 누군가의 마음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윤리적인 덕은 행위를 통해 습관으로 완전해지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어떻게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그것이 덕으로 완성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함을 알기 때문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 마땅한 이유와 태도를 지키는 중용을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중용은 지나침과 부족함이 서로 대립하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위치에 있으나 아주 쉽게 무모함이나 방탕함으로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덕은 중용이고 품성이며 능력 범위 안에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이치를 따르는 행위이다. 덕을 갖췄다면 이치를 따르는 행위는 올바른 길일 것이며 곧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꼬리의 꼬리를 물며 드는 의문, 올바른 이치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만이 지성의 관조적 활동을 통해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성의 관조적 활동을 행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과연 불행한 것일까.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며 그것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쾌락적 삶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범주에 속할 뿐, 정의와 절제를 벗어난다고 해서 행복을 위한 행위로써의 덕이 아니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행복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덕을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회 통념에서 조금은 벗어난 덕을 가졌다 하더라도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라면 그것으로 목적 달성을 위한 자신만의 올바른 이치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 행복을 위한 덕과 현재의 기준은 어쩌면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치에 맞는 삶만을 추구하기에는 너무 바쁘고, 빠르고 숨 가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행복의 기준이 반드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어도, 덕의 범주에 속한 삶을 살지 않더라도(악의 범주에만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삶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