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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Oct 08. 2019

우리만 몰랐던 한국인의 행복 이야기

<우리가 지금 휘게를 몰라서 불행한가> 한민

<우리가 지금 휘게를 몰라서 불행한가>

우리가 휘게를 알면 행복할까? 책 제목의 '불행'이라는 단어가 왠지 시대를 대변하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이 책은 한국 사람들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프로 불편러가 많은 한국사회의 행복은 소확행, 욜로라는 것으로 대변하는 행복 트렌드에 대해 문화심리학자 한민(저자)은 책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한국인은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불안한 삶을 사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또 다른 원인은 역사와 습관에 있다.’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습관의 변화가 오면 행복할까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지금, 여기'의 삶이 중요하다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저자가 생각하는 행복주의는 무엇일까. 최근 행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친구가 많은 삶이 행복할까. 돈이 많은 삶이 행복할까.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행복이 숨은 보석 같지만 지금 여기 이곳에 행복이 있다는 것은 사고하는 인간이라면 모두 안다. 가까이 있는 행복을 스스로 찾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다. 간헐적 단식을 한다는 지인은 하루 한 끼, 저녁만 먹는다고 했다. 그녀를 안 지 20년이 되었지만 음식에 집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처음 본 20년 전부터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났을 때까지도 그녀는 먹는 것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20년 만에 음식을 보며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행복을 보았다. 간헐적 단식이 그녀를 음식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한 끼의 저녁이 행복을 준 그 집에서 간헐적 단식을 잠시 접을 수 있다며 내게 점심시간에도 만나자고 말하던 그녀에게 그날의 행복이란 맛있는 저녁, 그 한 끼였을 것이다. 그녀의 밤은 행복으로 가득했을 테다.

'인간관계'에 대해, '나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요즘, 20년 지기 그녀를 만나 격 없이 머릿속 생각을 마음껏 나누고 나니 그 많던 생각이 종이 조각처럼 분쇄되어 나를 떠났다. 며칠을 고민하며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며 괴로웠던 시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혔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며 행복했다. 다음날까지 행복한 기분은 지속되어 고민 없는 휴일을 마음껏 즐겼다.

행복이란, 단순하게 보면 이런 사소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여기 우리는 사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상 속에 말이다.  

1장. 미국식 행복과 한국식 행복의 차이

우연히 찾아오는 좋은 일과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일을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늘 좋은 일만 있다면 인간은 지루해서 지구를 떠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매일 출퇴근하는 일상에서 휴일이 있기에 행복하다. 늘 만나던 이들과의 스트레스 속에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를 만나 행복하다. 우연히,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에게 일어나면 즐거운 일, 그것에서 느끼는 일련의 감정이 행복이지 않을까.


한국식 행복에는 정서적인 부분이 많이 차지한다. '우리'라는 문화 속에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가족의 안녕, 민족의 번영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느끼는 민족이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I'm happy'를 외치는 순간은 누구와도 상관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인이 행복을 외치고 느끼는 순간보다 개인적인 문화권의 행복이 잦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집단주의 민족성을 없앨 수는 없는 법, 나의 행복이 있는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누려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근현대사부터 뿌리내려온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행복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가지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2장. 열심히 사는데 왜 힘들기만 할까?

프로 불편러가 많은 민족. 그들이 사회 합의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면 사회 변혁을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느낌, 감으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반추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행복과 거리가 먼 추측으로 불행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공감했다. 책을 읽으며 나도 그랬었지 하는 생각에 뜨끔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미래에 대한 밝은 기사보다 금리인하, 부동산 하락, 미취업자 등 자신은 열심히 사는데 왜 미래가 아름답지 못할까 하는 기분이 드는 사회, 나와 마음이 같을 것 같던 지인의 변심이 자신을 우울하게 만든다. 너무 아름다워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진 한 장의 출처가 국내일 경우 '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어?'라는 탄식이 흘러나오는 민족, 삶 자체에서 억울한 일이 많아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족,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아반성, 쿨하게 인정하는 방식들이 삶을 힘들게 하는 행복과 멀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일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3장. ‘소확행’과 ‘욜로’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큰 행복을 원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소소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정말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반문하며 돈과 행복은 관계가 없다는 것은 거짓이라 정의하고 보니 인정이 됐다. 욜로 라이프를 꿈꾸는 이들은 또 다른 좌절을 맛본다. 소확행이라며 피규어를 사 모으는 이들의 SNS를 보며 자신의 소확행이 초라해 보인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소확행, 욜로를 즐기는 이들은 없다. 그들의 소확행과 욜로는 SNS로 공유되고 결국 그들의 삶은 돈과 연계되어이 있으니 말이다. 몽테뉴가 말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인간은 목적을 갖고 사는 자라고 했듯 작은 일상의 소확행이나 욜로가 인생 전체에서 행복을 만들어 준다고 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작은 목표를 가지고 삶을 즐기는 이들을 나는 응원한다. 포기를 알게 해 준 소확행이어도 그것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그들의 삶이 아닐까. 욜로 라이프라고 스스로 인정한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삶이라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장.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몽테뉴의 말처럼 목적을 가진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나는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 절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다. 개인만의 자아성찰과 반성으로 과연 행복해질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떠나기 전에 바꿔보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국수주의나 쇼비니즘(chauvinism)이 아니라면 집단의 정체감을 갖고 자존감으로 긍정적인 정서를 찾아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결정하고 나의 행복이 건강한 사회의 영향을 받기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삶이 중요하다. 삶의 주인공은 자신이 되라는 고전적인 멘트가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선택해야 할 필수 불가한 항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답게 사는 법을 터득하고 지금 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나만의 이유를 선택하고 의미를 찾는 삶, 그곳에서 일어나는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지금 실패한다고 미래가 실패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니 지금의 실패 또한 자신의 삶에 중요한 의미라고 정의하면 그것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5장. 우리는 이미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다

풍자와 해학이 많은 민족인 우리는 순응과는 먼 민족이다. 부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삐딱하고 날카로운 정신을 가졌다.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가 우리의 억울함이나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해지며 정을 느끼지만 스스로의 불편한 감정을 풀며 살아가야 한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을 듣고 시원해질 수 있지만 내 마음속의 불편함을 스스로 풀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결국 행복은 먼 곳에 있는 타인의 것일 뿐이다.


정서적인 감정이 중요한 민족인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비대면이 트렌드라고 하지만 우리는 면대면의 민족이다. '밥 한번 먹자'라는 안부 인사는 정말 얼굴을 맞대고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기원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말로만 하는 인사가 아니라 정말 만나 밥 한 끼 먹으며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지면 된다. 자신의 응어리도 풀고 상대의 불편함도 함께 풀어주면서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서는 폭넓은 관심을 가질 것을 이야기한다. 주위에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동으로 지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관심분야를 가지고 취미활동을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 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은 지나가는 가랑비와 같다. 늘 비가 내리면 마음이 한껏 우울하고, 마냥 햇빛만 비추면 더워서 그늘을 찾아 헤매게 된다.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 안전하지 않은 사회망, 부와 권력을 따르는 집착, 유독 타인과 비교를 잘하는 민족성 자체는 행복한 삶과는 먼 삶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역사가 그렇다.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가 유독 많다고 말하지만 어느 민족에게나 아픈 역사는 많다. 독일의 경우 남을 아프게 한 역사로 손가락질당할 민족임에도 그들은 역사를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다른 평가를 하고, 나와 함께 남의 행복까지도 애쓰고 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는 말은 대한민국 엄마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참 이기적이다. 자식을 키우며 행복했던 시간은 오롯이 자신을 위한 행위였을 터인데 이제와 너를 위해 나의 행복을 뒤로 미루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나의 행복보다는 ‘우리 가족’의 행복이 우선시 되는 우리의 문화에서 비롯된 말일 터이다.


우리의 민족성이 행복과의 거리를 말게 만들었다는 저자의 글에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반대한다. 살만해졌다고 하지만 아직 슬픈 아픔의 역사와 민족성이 집단주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처럼 남아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해야 한다는 가슴 깊이 박혀 있는 마음 이리라. 시대는 바뀌고 있고 문화 역시 변화한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민족에서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민족이다. 소확행이나 욜로 또한 과도기적인 시대의 트렌드일 뿐 우리도 언젠가 (가족, 민족, 사회와 무관하게) “나 지금 행복하다” 외칠 날이 오지 않을까. 민족성이 행복을 찾는 이유가 나만이 아니라 우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어쩌면 각박한 삶에 마음 따끗해지는 일이기도 하니 애써 불행한 민족이라 단정 지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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