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모호함을 고민하는 시간
언제부터였을까.
친구가 많아 부럽다는 소리를 듣던 내게서 조금씩 '친구'가 사라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새벽녘까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두 달 전 나이에 맞는 친구 사귀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몇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중 만나면 즐거운 사람을 친구로 두고 나 역시 그런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어디까지가 친구이며 어디까지가 아는 사람일까 경계를 알 수 없어 고민하던 차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 영상이었다.
물론 인간관계의 경계란 흐릿해지기도 하고 진해지기도 하지만 그중 언제나 진하게 그어진 경계선은 분명 존재한다. 다가가는 것도 다가오는 것도 부담스러운 그저 아는 사람 그룹. 경계선이 없어 자유롭게 드나들다가도 어느 순간 경계선이 보이는 친구 그룹. 주의해야 할 것은 친구 그룹의 경계선이 나타날 때는 뒤로 물러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상처는 늘 친구 그룹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내 맘 같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 맘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생각하면 명쾌해지겠지만 관계가 무너지면 상대의 맘이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크게 상처를 받고 만다. 이 관계는 친구가 아닌 아는 사람이었나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뱉은 말이 선을 넘지 않았는지, 내가 들은 말이 선을 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되돌아보며 원망한다.
상사가 바뀌면서 팀 분위기가 살벌해진 지인과 점심을 하면서 곧 나아질 거라는 위로의 말은 할 수 없었다. 인생 반전을 일으킬만한 충격이 오지 않으면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인 역시 같은 상황이니 살벌한 팀 분위기의 반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기에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고 헤어졌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예상치 못한 말이 비수가 되어 등으로 내리 꽂힐 때의 상처에 비하면 상사와의 불편함으로 인한 상처는 장난감 화살이 등을 치고 가는 수준일 뿐이다. 아는 사람과의 관계는 조금 불편해도 상처가 크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관계 속에서 나 역시 경계를 지키려 애를 쓸 것이고 그 상처는 매일 반복되어 시간이 지나면 상처인지 일상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무뎌지기 때문이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과의 관계는 쉬이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다. 비수가 된 상처를 안고 다시 친구가 되어야 할지 아는 사람으로 남겨둬야 할지 혼돈의 시간을 보내다 결국 끝이 없는 돌림노래가 되고만다. 그 돌림노래가 내게서 친구를 사라지게 했거나 때론 친구의 돌림노래 속에 내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오늘도 모호한 경계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알지 못한채 또다시 관계에 대한 고민만 깊어지는 시간이 되고 만다. 생이 끝날 때까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어느 새벽 나는 여전히 똑같은 고민을 하며 사라진 친구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그저, 같은 고민이 가까운 미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