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테이션에서 있었던 일
모르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상당히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다. MBTI가 극 E인 나에게도 사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한두 명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자리는 '나를 홍보'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넘어갈 때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고정된 곳이 없으니 항상 어딜 가서 내가 직접 홍보를 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도 나름 적응력은 상당히 뛰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적응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즐겼는데, 이제 다시 그 시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다녔던 K대 MBA 과정은 대략적으로 20대 후반부터 40대 중후반까지 다닌다.
매 학번마다 바뀌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이제 과~차장으로 소위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오기 때문에 일단 회사에서는 '인정받은' 사람들이 오는 것이며 나처럼 그저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 위해 오는 사람도 종종 있고,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CEO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종 업계로의 이직을 꿈꾸는 사람, 사업을 새로 준비하려는 사람도 존재한다. 아마도 이해관계가 가장 복잡한 과정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CEO도 될 수 있고, 새로 사업도 할 수 있으며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꿈꾸는 사람들 천지니 말이다.
입학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오리엔테이션이다.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렸던 코로나 시절에는 제대로 된 오리엔테이션을 하지 못해서 같은 학번 하고도 서먹서먹하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다녔던 시기는 코로나 시기 이전이라서 오리엔테이션을 정상적으로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대학교 때 오리엔테이션을 기억하는가?
그때의 기억은 학교에서 조교나? 교수들이 간단하게 학과 소개와 앞으로 뭐하는지 설명을 하고 바로 선배들이랑 과에서 있는 술집(저렴 of 저렴한)에 가서 진탕 마시고 쓰러졌던 기억이 난다. 많은 신입생들이 그때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보는데, 서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아무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처음에 참 적응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술자리가 존재하는 것 같고 잘 마시든 못 마시든 술의 힘을 빌어서 다들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최근은 이러한 술자리도 많이 지양하는 편이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자리 자체가 없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그건 학교도! 선배도!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아, 학교마다 좀 다르긴 한데, 아예 다른 곳에 가서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나이 30대 중후반이었는데...
여전히 학교라는 곳은 나이를 먹지 않고 그대로 인 것 같다. 물론 학교 앞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진 않았고, 1박 2일로 오크밸리를 다녀왔다. '당연하게도' 술을 먹는 시간은 존재했다. 또 학교가 학교인 만큼 '사발식'이 상당히 유명한 학교인지라, 막걸리도 충분하게 보충이 되었다(심지어 선배 중에 지평 막걸리 회장 자녀 분도 계셨... 그래서 지평 막걸리가 박스채로 막 들어오는 것을 보았...) 그런데 사실 이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위와 같이 테이블이 있고 둘러앉아서 하나의 조를 만들었는데...
사회자(선배)를 기준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나의 위치가 제일 마지막 순서이니 눈치 좀 보다가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서 자기소개를 하려고 하니까(그리고 뭔가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 무리 안에 있는 상태니까) 신선한 것을 하려고 생각을 했는데 일단 서서하게 되니 키가 가장 돋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키가 190cm인데....
보이는가...
첫 번째 계시던 분이 키가 196cm이라고 한다. 심지어 키 덕택(?)에 군면제도 받았다고 한다. 난 군대 다녀왔는데... 190cm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그럼 그다음은 내가 다니던 회사를 어필해 볼까 했다. 나름 국내 시가총액 1위 회사인데 얼마나 자부심이 넘치는데!!!!............. 보면 알겠지만 다음 사람은 MicroSoft, 그다음은 Google이다. 이거 뭐... 국내 시가총액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 시가총액 최상위 클래스 회사들이다. 회사 자랑은 할게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알겠지만 아나운서는...
그냥 서서 말만 해도 존재감 뿜뿜이다. YTN이라는데 나랑 다른 세상의 존재같이 생겼다(여성 아나운서였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제길, 뭐 하지 뭐 하지... 일하는 거라도 생각해 볼 찰나, 다음 G-Market에서 오신 분은 본인이 매출을 몇 백억을 달성했다고 한다. 사내에서도 알아주는 인재라고 '스스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순간적으로 '나는 대체 회사에서 어떤 성과를 냈고, 남한테 어떻게 설명하지?'라는 질문으로 패닉상태가 되었다. 무려 10년을 넘게 다녔는데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옆에 있던 스타벅스 친구는...
솔직히 스타벅스가 좋은 회사라고는 생각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매출액이나 인지도 같은 것은 다소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랬다... 그랬는데....
"안녕하세요. 제 이름 검색하세요."
하고 그냥 앉았다. 다들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을 했는데...
'?!!!!!???'
아... 나 같은 애가 깐죽거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구나. 난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그날 오리엔테이션에서 신나게 술을 마셨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나이대인 데다가 심지어 어린 친구들도 꽤나 많았는데 자기소개의 내용이 정말 잊히지 않을 정도로 임팩트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소개했던 저 친구는 동갑인데, 그 분야에서는 어딜 가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숨이 나왔다. 같은 학교에 같은 학번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다 같은 조건이 아니구나. 그 10년 이상을 나는 그저 회사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것만 했구나... 자신감이 살짝 사라지고 속이 불편해졌다.
가끔 후배들이나 외부에 강의가 있을 때 난 이 일화를 설명하곤 한다.
그리고 항상 이야기를 한다. 지금 앞으로 10년 뒤에 네가 다른 사람에게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없다면 진짜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왕 회사에 투신을 했다면 자신의 성과를 만드는데 10년을 투자하는 것을 추천한다고. 다른 사람이 하라는 것만 해도 회사 다니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결국 그건 기계의 삶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지 어언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여러분도 MBA에 오시면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