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가 아니라 강재혁 입니다.
꿈은 하늘인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사실 원전사고 재난영화라는 첫인상은 썩 좋지 않다. 어쨌거나 재난영화는 크게 법칙을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재난 영화의 큰 맥락은 간단하다. 문제 사실을 숨기는 단체, 방심에 의한 사고, 주인공의 정의감과 기지로 많은 위기 탈출, 누군가의 희생, 모두의 평화.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해운대나 과거의 아마겟돈처럼 그저 오락영화겠거니 별 기대하지 않았고 극장보다는 혼자 시간 날 때 봐야겠다 싶었던 영화였다. 내게 재난영화는 그저 그런 장르에 지나지 않았다.
'판도라'의 시작도 비슷했다. 노후된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는 이, 그것을 은폐하는 정부 관계자가 등장했고 역시나 사고는 터진다. 다만, 영화 초반의 상황은 우리나라 국정운영에 대한 시사를 하며 관객으로서가 아닌 영화 속 상황을 알고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시점이 생기게 된다. 이 영화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위험성과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에 대한 실태를 고발하는 오락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현재 시스템의 문제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을 주고 인물들에게 자신을 대입하게끔 도와주어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실제 인물들의 시점이 아닌 제 3자의 시점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화와 답답함은 극에 달한다. 이미 수차례의 재난을 겪었고 그에 대처하는 정부에 무능함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영화 속 '석여사'처럼 그저 자신들을 먹여 살려주는 경제적으로 이로운 괴물들에 대한 맹신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실수의 반복을 명확히 꼬집어 준다. 영화 속 정부도 현실과 같이 시스템은 붕괴했고 정의는 묵살당했으며 국민의 안전이라는 핑계와 변명 같은 수많은 이유로 인한 무능함을 보여줬다. 대피 시나리오에 대한 매뉴얼이 없다는 보고로 대통령은 망연자실하였고 하나의 선택으로 인해 사고는 재난이 되었고 재앙이 되어버린 모습을 철저히 보여줬다. 사고 현장에서도 '위'의 명령만을 지키며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중간'들이 있었고 직함뿐인 책임자들의 모든 책임은 '아래'에 있게 돼버렸다. 사명감으로 뭉쳐있는 '소방관'들은 그들의 사명감과 역할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했고 '군'과 '경'은 공권력에 의한 시민을 억압하는 쇠창살의 역할을 하기 바빴다. 시스템은 붕괴했고 정부는 무능했으며 책임자들은 변명에 급급했고 공권력은 국민을 등 돌렸으며 소방관은 희생을 강요당했고 모든 책임은 국민이 지게 됐다. 이것은 영화의 스토리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난 돈을 주고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보고 왔고 기분은 더러웠다.
가족을 위한 인물들의 사투 또한 치열하다. '재혁'의 가족들은 '석여사', 며느리인 '정혜'와 그녀의 아들 '민재' 그리고 재혁의 여자 친구인 '연주'로 사회에서 약자로 분류되는 '노인, 여자, 아이'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통 같은 대피 길 속에서 그녀들은 누구보다 앞장서 있었고 빠르게 움직였다. 특히 '연주'는 사회에서 '여자'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닌 한 그룹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을 사람들의 대피 길을 이끄는 리더로서 대피 길에서의 빠른 정보력과 강단을 보여주었다. '석여사'와 '정혜'의 대립은 현재 시스템에 안주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시스템에 문제에 대한 의심을 하는 사람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은 요소로 표현됨과 동시에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해내는 주체를 남성으로만 구성하고 대피 길의 문제를 해결해내는 주체를 여성과 아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로만 구성해놓은 아이러니는 사회적 편견을 깨려는 사람들에게도 편견이 존재한다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비쳐 조금은 실망스러움이 있었다.
사실 이 후기에는 '재혁'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재혁은' 주인공으로써 극을 끌어나감과 동시에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후기는 접고 영화관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