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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Oct 04. 2021

인기남은 그녀에게 왜 연락을 했는가

의왕에 근무하시군요.”     

의왕에 있는 어느 중학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지역이 낯설지 않음이 신기하다. 자주 들어보지 않아도, 멀지 않은 곳의 지명이니 운전하다 고속도로 표지판을 봤겠지 싶은데, 뭔가 가슴에 묵직하게 들어차는 게 느껴진다.     


‘따르릉’     

전화를 받으니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또렷하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번호를 누구에게 알려줬던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라며 장난으로 받아치는 남자. 그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아주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남자는 자신을 밝혔다. 남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대학 사범대 최고의 미남이며, 풍물패 실력파 상모 재주꾼이고, 교수님들과 논쟁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역사학도에, 축제 사회를 볼 만큼 입담과 유머를 갖춘 엄청난 인기 남이었다. 평소 근접하기 힘든 그 남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다니...          


23년 전의 일이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치고 갔다. 맞다! 인기남 선배의 첫 발령지가 의왕이었다.     

대부분은 2월에 신입교사 연수를 받고 발령지를 명 받아 3월 2일부터 해당 지역 학교에 근무를 하게 된다. 3월에 발령이 나지 않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그런 경우는 9월 하반기 인사발령이라 보면 된다. 그러나 선배의 경우는 5월에 예기치 않은 결원이 발생하여 갑작스럽게 발령이 난 것이다. 그는 수일 내로 경기도에 자취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내가 멍해진 이유는 그와 매우, 많이, 아주, 친하지 않은 후배였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에 그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고, 어쩌면 멀리서 ‘저 선배야’라며 드라마 한 장면처럼 연예인을 바라보는 행인과 같은 처지라고나 할까.     

과 동기가 저녁 먹자고 하길래 슬쩍 나간 자리가 얼굴을 제대로 정면으로 대면한 첫 만남이었다. 친구는 동아리 후배였기에 그의 발령을 축하하는 자리에 둘이서 저녁 먹기가 부담되었던지 나를 불렀다. 자리에 앉는 순간, 나는 이 모임이 동문회 성격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인기남은 그의 명성에 맞는 유명한 미술교육과 여자 친구가 있음을 알기에, 첫 만남 자리였지만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인기하고는 거리가 한 참 먼 나였고, 임자 있는 남자를 꼬실 깜냥도, 미모도 아니었기에 직장 초년생들의 각오와 다짐을 나누는 결의로 동지애를 불사르며 술을 마시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런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대애~박!     

분명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는데 연락을 하다니 이런 전개는 무슨 의미?     

그가 전화한 용건은 자취방을 구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고 부동산과 발품 파는데 동행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연애 세포들은 반응하여 좋다고 했다.     

그때부터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즐겁고 엄청난 상상의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두 달 동안 주말마다 집을 보러 함께 다녔다. 집을 구할 때까지 고시촌에 머물고 있었던 인기남은 얼른 맘에 드는 집을 알아보고 싶어 했다. 부천, 시흥, 광명, 의왕, 안산 등 그 인근 지역을 돌며 적당한 집을 찾으러 다닌 것 같다.

 젊은 남녀가 집을 보러 다니니 신혼부부냐, 남매냐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나름 이 잘생기고 인기 있는 선배와의 미래도 가끔 상상하며 혼자 붉어진 얼굴이 되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봉사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집을 볼 때마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집 구조며 위치 등등을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나와 연애하는 건 분명 아니지만 여자 친구에게 매번 전화를 하는 건 왠지 나에게 ‘너! 선 넘지 마!’라고 경고하는것  같았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이번 주는 쉬자고 했던 토요일. 한참 신나게 직장 동료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9시 가까이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 만나자는 것이다. 매주 그의 도우미 역할을 하느라 지쳤던 터라 단호하게 나는 더 놀고 갈 것이라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깜짝 놀라는 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토요일 밤의 열기를 놓치지 않으며 늦은 밤 귀가했다. 그는 나의 자취집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만화 속 주인공처럼 멋진 실루엣을 자랑하며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기남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포즈와 위치 등등을 파악한 선수인 것 같다.) 뭔가 잔뜩 할 말이 있는 듯한 그의 우수 어린 표정에 이끌려 다시 집 근처 포장마차로 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만 했다.

 포장마차 대화 다음 날 그는 전화통화로 지금 있는 고시원에서 계속 살겠노라 했다. 마땅한 집도 없거니와 여기서 정착할 것이 아니고 몇 년 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불편함을 참고 살겠노라 했다.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고 힘이 빠졌다. 나는 왜 주말을 반납해가며 고행을 함께 했던가. 이용당하고 끌려다닌 불쾌함이 올라왔다. 포장마차 나에게 보여줬던 애절함은 뭐였던가.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 달라’고 말하며 연락을 일체 끊어버렸다.        


존경하던 교수님이 별세하셔서 모처럼 선후배가 모일 기회가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희한하게 안 변한 것 같다. 20살 때 만났던 그들을 보니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라 행복함마저 들었다.

자리를 잡고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누군가 인기남 이야기를 꺼냈다. 잘 사는지, 어디에 사는지, 누구랑 사는지 등등 말이다. 그의 이야기에 내 눈이 빛이 났나 보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야! 너도 좋아했냐?’라는 말로 농을 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가 나를 좋아했는지 이용했는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인기에 잠시 현혹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불쾌함보다 아련함이 남는다. 갑자기 ‘의왕’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나의 순진함과 어리석음이 떠올라 웃기까지 한다.

그가 나를 좋아해 여자 친구와 삼각관계를 만들었다면 아침드라마처럼 재밌고 흥미진진했겠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애매모호하고 아련해서 상상을 할 수 있어 오히려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딱 거기까지가 의왕 인기남과 나와의 스침이다.     


의왕은 왕송 호수가 좋다고 하던데.     

하얗고 눈이 커서 장동건 같았던 인기남과는 전혀 딴판의 매력을 가진,

까매서 광까지 나는 조그마한 눈을 가진 황영조 같은 남편과 중년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한 번 들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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