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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May 09. 2022

나의 종교생활

매년 5월 첫 주 토요일은 시댁 모임이다. 시부모님 기일이기도 하고 어버이날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가족들이 모인다. 경기도에서 시댁까지 꽤 먼 거리인지라 신혼 초, 어린아이를 키울 때는 힘들었다. 징징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6~7시간을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댁에 가면 일찍 가든, 늦게 가든 맘이 편치 않았다. 일찍 가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음식을 장만해야 하고, 늦으면 눈치와 미안함 때문이다. 너무 늦으면 눈치 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눈치 보며 얄밉게 시간 맞춰 등장하는 얌체처럼 보일까 말이다.


 올해 모처럼 시댁 방문을 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서로 조심하며 안부만 전하고 살았는데 시부모님 기일을 맞이하여 드디어 만나기로 한 것이다. 훌쩍 커버린 두 아이는 핸드폰과 이어폰이 있으면 어디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니 징징거리던 모습은 온 데 간데없다. 한적하게 나들이 가듯이 시댁을 향해 가는 이 여유가 낯설다.


 어머님이 계실 때는 아버님 기일에 추모 기도를 했다. 믿음이 깊은 권사님이었던 어머님은 자식들과 함께 기도를 하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고인의 뜻을 전하였다.

시어머님은 늦은 나이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자녀들에게 같이 교회를 다닐 것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늘 성경책을 필사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외우며 생활하셨는데, 그럼에도 자녀의 종교 생활에 대해 존중해 주셨다. 물론, 때때로 믿음 없는 자녀가 예수님의 어린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도 말씀으로 속내를 비추기도 했지만 억지로 강요하거나 핍박(?)을 준 적은 없었다.      


 친정 부모님은 독실한 불교신자.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해서 나를 낳았다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다. 선원인 아버지를 위해 방생하고 좋은 절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리는 친정엄마는 항상 부처님의 말씀을 곳곳에 써서 붙여두고 외웠다. 독송과 향으로 가득 찬 우리 집은 늘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달았고, 대문 앞에 불자의 집을 표시하는 표식이 있었다. 한 때 대학생 불교 동아리 가입을 고민하기도 했을 만큼 나도 영향을 받았지만 신자라고 자부할 만큼 성실한 종교생활은 하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은 종교적인 삶을 살며 주변에서 칭찬받는 모범을 보이셨다. 그런데 그 점이 남편과 내가 결혼하는데 문제가 되었다. 종교가 달라 어렵사리 결혼 승낙을 받았지만 이후 가장 큰 걸림돌은 결혼 날짜였다. 결혼 날짜를 잡는데 주일은 절대 안 된다는 시댁 측과 일요일이어야 지인들이 올 수 있다는 친정 측의 신경전이 대단했다. (그 당시는 주 5일 근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굳이 기독교 신자랑 결혼해야겠느냐의 친정엄마의 말에 드라마 대사처럼

“엄마가 져 주면 안 돼? 나 결혼식 안 해도 돼!”

란 말을 해서 딸년은 키워봐도 소용없다는 푸념을 들으며 속상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결혼 후 친정부모님은 ‘너는 교회에 가면 절대 안 돼!’ 란 말 대신 ‘항상 시부모님 말씀 잘 새겨듣고 따르거라’란 말로 더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다.  종교가 다른 집안끼리 사돈을 맺는 것은 이해하고 배려해야 할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족 행사를 진행하는 날짜에서부터 방식까지 자칫하면 의도하지 않게 상대 집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장의 줄타기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로 종교를 갖는 것은 축복이다. 교리를 가슴에 품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양가의 어른들을 통해 생존 본능을 견디고 삶의 의미를 실천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전쟁을 겪고, 지독한 가난을 버텨내고, 자식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을 넘어서 위안과 안식을 느끼며 잠시 쉬어가기도 하고 무엇을 더 귀중하게 보아야 할지 성찰을 종교에서 얻기 때문이다. 기도와 불공을 통해 신에게 묻고, 자신에게 되묻는 과정에서 스스로 거룩한 존재가 되어가는 부모님을 보며 나도 종교를 가져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삶의 장면에 마주칠 때마다 절절하게 기도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약하지만 나 스스로를 믿어 보기로 했다. 니체의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는 말에 공감하며, 자신이 바로 서지 않은 종교 생활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기심만 남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무교가 아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오가는 양다리 신도이다. 시댁의 추모예배에 성심을 다해 고인을 기리며 기도하고 찬송을 한다.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달며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그리고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인지하며 계속 되묻는 작업을 글쓰기를 통해 진행하면서 영성을 채워가고 있는 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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