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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Aug 03. 2022

노화

며칠 째 비가 오고 있다. 

예전엔 비가 오면 쓸쓸한 기분의 낭만을 즐기려 통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쌉싸름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커피 한 모금을 입에 가득 담고 맥심 커피 광고를 찍듯 분위기를 냈다. 그리고 괜히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전화를 걸어 보기도 했고, 음악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분위기에 한껏 몰입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큰거리는 발목과 무릎, 허리로 이어지는 통증을 견디며 툴툴거리기 일쑤다. 요 며칠 우중충한 날씨 덕에 다리가 아파서 잠을 설쳤다. 출산 후 나는 ‘뼈에 바람 들어간다’는 어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서서 일하는 직업의 특성이 더해지며 비가 오는 날에는 맥을 못 춘다. 

    

마음과 다르게 노화가 진행 중인 내 몸.      

 최근 육아를 같이했던 동네 엄마를 만났다.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많이 달랐다. 마른 몸에 거친 피부결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누구보다도 탁구를 사랑하여 열정을 쏟았고, 교회 부녀회장을 맡아 행사 진행에 앞장섰고 인근 부동산 실장들과도 친하여 티타임에 늘 귀하고 알찬 정보를 주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코로나 시대에 유방암으로 고생했다고 털어놓는다. 나는 충격을 감추지 못해 그녀를 위로해주기는 커녕 눈물만 글썽인 채로 돌아왔다. 최근 내 주변엔 유방암, 갑상선, 당뇨, 고혈압 등으로 고생하고 있는 또래들이 부쩍 많아졌다. 방학과 같이 여유 있을 때 연락하거나 만날 때 투병 중인 사람들 소식을 듣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몇년 전, 50대 초반의 교무부장님은 교무실에 들어오면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악~!”하는 짧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열에 달아오른 얼굴을 차가운 바람에 노출하고선 어쩌지 못했다. 찬바람에 모두가 추워 웅크리는 모습을 보며 “ 미안! 내가 갱년기라 그래! 금방 문 닫을게요!”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느 날은 빨간 얼굴이 더욱 상기되어 교무실로 들어왔는데 씩씩거리는 소리가 뭔가 분한 듯 보였다. 슬쩍 다가가 이유를 물으니 

“아이들이 나를 할머니 같다고 하잖아! 내가 어디를 봐서 그래?”라며 정색을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웃펐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되리라.     


 노화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시대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책에서 인류가 죽음과 노화는 극복해야 할 질병으로 치부하고 통제하는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했다. 죽음까지는 모르겠고 확실히 노화에 대해서는 ‘관리’라는 가치가 반영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날씬하고 탄력적인 몸매와 동안의 얼굴을 추앙하고 부러워한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동안인들의 비결과 방법은 돈이 되고, 상품이 되는 시대다. (나도 보톡스, 필러, 레이저 시술 등에 관심을 가지고 시대에 편승하고 있다.)    


 내가 노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뭘까?


 할 수 있다는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 괴리가 생긴다. 운동이 그렇다. 무리를 하면 그다음 날은 맥을 못 춘다. 내가 아무리 오랜 세월 운동을 했더라도 20-30대와 똑같은 강도로 해서는 안 된다. (주량도 마찬 가지다.) 오히려 체력을 지킬 수 있도록 몸을 사려야 한다. 체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데 더 주의를 기울인다.   

   

  체력의 상실, 체형의 변화, 기억력 저하 등을 겪으며 자신감도 떨어져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호르몬의 변화로 적게 먹고 운동을 해도 배가 나오고, 팔뚝살이 덜렁거린다. 뿌리 염색을 해도 흰머리는 계속해서 영역을 넓혀 기세 등등하다. 기억력은 말도 못 한다. 메모를 하지만 메모지를 잃어버리기 일쑤고 협의회 시간을 까먹어 지각도 잦고 실수도 많아졌다. 나의 일상에서 만나는 노화는 자신감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또, 뭔가 해놓은 것이 없고 나이만 먹은 듯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시간의 속도는 충분히 알겠고, 재산이 있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공부를 좀 더 잘하고, 자식들 양육을 잘하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 만들기 등등, 더 늙기 전에 내세울 뭔가를 만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이십 년 전이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현타’가 온다. 동년배가 강남 아파트에 살며, 외제차를 타고, 과학고를 보낸 자녀 이야기에 인맥 자랑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한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나는 체력이 떨어지고 있고 발목과 무릎이 약해 학교 5층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기에 최소한으로 움직여야 한다. 필라테스를 할 때도 강사가 요구하는 것만큼 유연하게 혹은 단단하게 동작을 따라가기 어려우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회식으로 술을 마셔야 할 때 가볍게 마시며 건강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만 즐긴다. 이렇듯 내가 노화에 적응하는 방법은 몸 상태를 살펴 적정하게 맞추는 것이다. ‘젊음’의 생동감과 활력이 어떤 것인지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내가 경험했던 ‘젊음’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 몸에 남아 있다. 다만 나이들이 ‘젊음’을 켜켜이 감싸 안아 현명한 적정선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내세울 성공도, 명예도 없지만, 인문학 공부와 글쓰기를 하며 좁은 우물 안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자부심을 가져본다. 나는 불안도 많고, 소심하고,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편협하게 쏠려 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조금이라도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화와 나이 듦을 신세 한탄의 노래가 아니라 성숙의 인간미로 만들고 싶은 욕심. 그게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인 것 같다.    

  

 방학을 맞이하고 보톡스를 맞았다. 0.000001% 젊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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