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전에 함께 지낸 두 아이의 어제와 오늘의 삶과 글 이야기
페북에서 6년 전 소식을 전했다. 오늘 페북은 두 권의 생활글 모음집 <내 꿈이 어때서>와 <지구를 지켰다>를 펴낼 즈음, 꼭 연락하고 싶었던 아이 셋을 대전으로 초대했던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재*랑, 명*는 잊지 못할 아이들이었다. 2002년이었다. 큰 학교에서 다시 작은 학교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이었다. 그때 만난 5학년 12명의 아이들. 밀양의 작은 학교, 이제는 폐교가 된 단산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하나 같이 가난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다섯. 갓 10년을 넘어선 나는 이 아이들 곁에서 어떻게 살아주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책도 읽어주고 글쓰기도 가르쳐 주고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이 아이들에게 학교가 전부였다. 그만큼 난 수업을 마친 뒤에도 아이들을 오랫동안 지켜 볼 수 있었고 곁에서 살아 줄 수 있었다. 아마 이때부터 나는 더 이상 생활통지표에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지 않고 아이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술해줄 수 있었다.
2002년 당시 내가 맡은 5학년 12명. 모든 아이들이 눈에 띄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가운데 재*랑 명*는 조금 다른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명*는 밀양의 시골 아이가 아니었다. 한 해 전, 아빠 손에 이끌려 오빠랑 친가로 이사를 온 상태였다. 친가에는 조부모만 있었고 아빠는 엄마와 이혼한 상태였다. 사연인즉, IMF사태 이후 실직을 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이혼한 상태에서 아빠는 밀양의 친가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것. 그렇게 나와 명*는 인연이 되었다. 착하디 착한 명*는 내가 제안하는 모든 활동에 열심이었다. 살짝 건드려만 주었는데도 글을 너무도 잘 써주어서 커서 작가가 되면 어떻겠냐 했는데, 정작 본인은 시쿤둥 했다. 그 시절 나는 날마다 생활글을 써 오게 했는데, 9월 어느 날 써 온 글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이 글을 나는 그 해 경남도민일보에서 여는 이오덕선생님의 글쓰기 교육 철학에 어울리는 공모전에 보냈고 버금상이라는 큰상을 받았더랬다.
미운 가족 | 밀양 단산초 5년 *명*
아침에 학교마치고 예*이랑 놀다가 집으로 갔다. 피곤해서 집에 가자마자 가방을 벗어놓고 누웠다. 잠을 잘려는 참에 아빠가 왔다. 아빠가 말했다.
"니는 왜 공부 안 하노. 맨 날 누워서 텔레비 보고 점심 때 너그 선생님이 전화해서 니 공부 못한다고 했다이가. 좀 공부 좀 해라!"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전화해서 내가 공부 못한다고 말한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좀 화가 났다.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야, 큰 아야. 밤 파는데 1500원 밖에 안 준다. 다른 데는 1800원 주는데."
아빠는,
"그냥 파소!"
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성질내는 걸 보고 화가 나서 욕하면서 마루에 있는 재떨이를 신발장에 던졌다. 나는 정말 놀랬다. 할아버지가 물건 던지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무 말 않고 마루에 떨어진 담배들을 쓸고 버렸다. 나도 다시 일어나서 머리를 다시 묶고 화장실에 갈려고 밖에 나가려고 하니깐 신발장에 재떨이가 깨져 있었다. 정말 위험했다. 그때 정말 할아버지가 무서웠다. 그런 면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화장실을 갔다 와서 과자를 먹었다. 아빠가 피곤해 하면서 말했다.
"○○야! 우리 부산으로 이사 갈래? 오빠하고 셋이서. 할아버지 때문에 못살겠다."
나는 가기 싫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빠는 알겠다면서 주무셨다. 부산은 정말 가기 싫다. 그곳은 아이들도 많고 밀양에 친구들과 정도 들었고. 부산은 정말 가기 싫었다. 아빠는 다시 일어나서 나보고 술과 빵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빠는 말했다.
"오늘만 아빠 술 먹자. 딱 오늘만."
나는 아빠가 정말 불쌍했다. 그렇게 오빠 올 시간동안 기다렸다. 오빠가 왔을 때, 아빠가 말했다.
"○○아, 부산에 이사갈래?"
오빠는 성질을 내면서 "싫다!"고 말했다. 나는 모두 싫다. 엄마까지 다른 남자랑 시집가고 아빠는 억지로 밀양으로 데리고 와서 또 이사 가자 하고, 할아버지는 매일 아빠랑 싸우고, 모두 정말 싫다. 계속 울고 싶었다. 아빠도 슬픈지 울면서 마루로 나가서 주무셨다. 아무데나 들어가서 실컷 울고 싶다. 나는 커서 결혼을 안 할 거다. 엄마, 아빠처럼 이혼할까봐.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아빠랑 행복하게 살고 싶다. (2002)
이 글을 쓰면서 명*는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을 게다. 밝히기 어려운 처지를 글로 담임에게 전할 정도로 나에 대한 믿음도 어느 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후로 나는 명*에 대해 더 애틋한 마음으로 대했다. 당시 명*가 쓴 글이 신문사에서 큰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명*의 아버지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시상식에 자신이 직접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명*의 생활글을 보면, 차도 없었던 명*의 아버지는 시골버스를 타고 밀양시 터미널에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마산에 내려 택시를 타고 신문사로 갔다고 한다. 사실 명* 아버지는 어떤 글로 상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그랬던 명* 아버지는 생활글에 나타난 대로 잦은 음주로 안타깝게도 결국 6년 뒤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받기도 했다. 명*는 다행히도 어머니의 품으로 갔다. 재혼을 한 줄 알았던 어머니는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울산에서 직장인으로 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명* 못지 않게 재*도 항상 기억하는 아이이다. 글쓰기 강의를 곧잘 나가면서 삶이 담긴 좋은 글을 소개할 때, 이 두 아이의 글을 빼놓지 않기 때문에 나는 늘 2002년 12살, 이 두 아이와 함께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6년 전, 이후로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이들 소식이 늘 궁금했다. 그러던 오늘. 재*랑 연락이 닿았다. 어찌나 반가워 하던지. 그동안 연락을 전하지 못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톡으로 열심히 하길래, 바로 전화를 했다. 한동안 통화를 하다보니 목소리에 32살의 나이가 살짝 묻어났다. 2002년 밀양의 작은 학교 시절에 만난 재*는 어릴 때 잘못된 치료로 머리카락이 없어 일년 내내 모자를 쓰고 살았던 아이였다. 어렵게 농사 지어도 인건비와 다른 비용으로 다 써버려 버는 것도 없어 힘들어 하시는 부모님 모습에 아파하던 아이이기도 했다. 힘든 농사 같은 게 없어지면 좋겠다던 재*. 커서 시집 안 가고 엄마 옆에서 농사 일 돕겠다던 이 아이는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지금 재*는 어려운 가정형편(모든 식구를 챙겨야 하는 맏딸)때문에 창원 대기업 공장에서 일을 하다 10년 전부터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숙련노동자로 일 하고 있다. 혼자 벌어 전셋집 구하고 밀양 집식구들 챙겨가며 사는 효녀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가 가르쳤던 나이로 자란 이 두 아이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한데서 놀랐다. 책 하나 돈 주고 살 형편이 되지 않았던 아이들. 학원도 가지 못하고 오롯이 학교 공부만으로 살아야 했던 2002년 그 시절의 밀양의 한 시골 아이들. 그 시절의 그 아이는 날 이렇게 기억해 주었다.
"20년이나 지났는데 저희 말고도 제자들이 수없이 많을텐데 기억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생각해보면 어려운 환경에서 그냥 그저 그렇게 자랐을수도있는데 선생님 덕분에 명*나 저나 잠깐이나마 특별했던 순간이 추억으로 남아서 늘 감사했어요~~!! 진짜에요! 명*랑 자주 얘기해요ㅎㅎㅎㅎ"
담임을 맡아서 내가 주로 한 일은 아이들 곁에서 살아주는 일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요즘에는 처음에 자주 오해도 받는다. 다른 교사들과 다르기 때문이란다. 부모처럼 혼도 내고 부모처럼 꾸중도 해가며 마치 자기 아들 딸처럼 대하니 불친절하고 꼰대 같은 선생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 선생이 어떤 선생인지,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좀 다르게 보이더란다. 나도 참 이런 방식이 잘 바뀌지 않는다.
2002년, 밀양의 작은 학교 열 두 명의 아이들에게는 나는 선생이었지만, 삼촌이기도 하고 부모이기도 했다. 그 아이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나름 애를 쓰고 살았다. 어려운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 학원도 가지 못하던 아이들을 도우려 애를 쓰며 살았다. 오늘 나와 소식을 나눴던 그 아이가 건강하고도 밝게 살고 있다는 것에 안심을 하고 그나마 작은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에 한 없이 고마워 했다. 아이들 삶을 돕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직도 내게는 큰 명제이다.
"선생님, 저 요즘 사이버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와, 잘 했어. 계속 공부해야지."
"근데 글쓰기 교과나 과제로 글 쓸 때마다 선생님이 생각이 나곤 했어요. 그래서 가끔 힘들 때 선생님에게 연락할까 싶었어요. ㅎㅎㅎㅎㅎ"
"그래, 에고...연락하지. 다음에는 꼭 연락해."
"네, 네, 연락할 게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목소리는 그대로예요. 나이 안 드시나 봐요."
"그래 목소리만 안 늙었지, 다른 데는 다 늙었어.
"그럼, 흰머리도 많으세요?"
"ㅎㅎㅎ. 그럼, 너랑 지낼 때가 샘 나이 35이었는데, 지금은 50중반이다, 야."
"아... 벌써..."
"진짜 다음 번에 식사해요! 저랑 명*랑. 명* 안되면 저라도 천안 한번 찾아뵐 게요!"
"그래, 꼭 내려와~"
오늘 나와 연락을 주고 받는 이 아이가 20년 전에 썼던 글은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프다.
돈 벌기 위해 | 밀양 단산초 *재*
엄마, 아빠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벌기 위해서 밤낮을 쉬지 않고 일 하신다.
학교 갔다 엄마한테 인사하러 가면 온 몸이 땀 투성이고 옷에 꼭 우리가 강에 갔다 젖은 것처럼 젖어 있다.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아빠의 옷이란 옷은 거의 다 찢어져 있다. 긴 바지 입고 뭐 하다 보면 바지가 찢어져 살이 다 긁히고 다치고 심하게 아파도 아빠는 병원은 가지 않는다. 또 우리 집에는 일 하는 아줌마가 오신다. 아줌마가 오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지만, 돈 번 중에서 반은 아줌마가 가지고 가신다. 그래서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다.
이건 정말 창피하지만, 사실 내 꿈은 커서 결혼 안 하고 엄마 옆에서 같이 농사일 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벌려고 고생하는데, 나는 투정부리고 애태우고... 그래서 커서라도 농사일을 돕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아이들 꿈이 다 경찰, 의사, 선생님 등인데 혼자 '농사 일 하는 것'이라 말하면, 아이들이 비웃을까 봐 선생님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좋긴 좋지만...
농사 안 짓는 사람은 모를 거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를... 나는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미래엔 농사 일 같은 게 없어졌으면 좋겠다.(2002)
요즘 어린이 글쓰기 지도 관련 책들이 마구 쏟아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글쓰기가 모두 인지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있다. 공부와 입시에 초점을 둔 글쓰기교육은 절반만 가르치는 것이고 온전한 글쓰기교육도 아니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글쓰기가 자기 삶과 어떤 관련이 있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 없으면, 글쓰기가 자기 삶이 도구로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 반쪽짜리 글쓰기 교육일 수밖에 없다. 오늘 나는 글쓰기는 진정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아이의 삶과 글에서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