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 교육은 교사가 어린이와 관계를 맺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한 번 더 6학년을 맡게 됐다. 어쩌면 정말 정말 마지막일 6학년. 지난해가 마지막이라고 여겼는데, 한 해 더 하게 됐으니 내년도 장담은 못하게 됐으니 또 모르겠다. 하지만 또 마음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해마다 늘 새학기를 시작하면 나는 어린이들에게 생활글 쓰기를 가르친다. 1학년이나 6학년이나 방법은 늘 같다. 특히 혁신학교를 비롯해 대부분의 학교가 글쓰기에 대한 지도 철학이나 방법이 부재한 터라 여전히 단발성 기능위주의 글쓰기 지도가 주로 이뤄진다. 그렇다 보니 문해력이 떨어지고 가정의 도움이 부족한 어린이들은 기계적인 기능만 익혀 단순하고도 지루한 글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쓰포자(쓰기를 포기한 자'로 거듭해 학년만 올라간다.
생활글쓰기가 여러 학년에 걸쳐 중요한 까닭은 글쓰기의 시작이 서사문이어야 하고 그중 가장 쉬운 갈래의 글이 바로 생활글 혹은 일기 쓰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쓰기에 대한 경험이 많은 교사들은 일기나 생활글지도로부터 시작을 한다. 국어 교육과정도 1, 2학년에 걸쳐 일기를 시작으로 겪은 일 쓰기를 배정하고 있으니 근거는 확실하다. 서사문의 한 갈래인 생활글쓰기가 잘 이루어지면 모든 글로 확장이 쉽고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2학년 교과서에서 다루는 것으로 대부분 지도는 마무리가 되고 다른 갈래의 글이 다뤄진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어떤 갈래의 글을 가져와도 제대로 익힐 수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이런 맥락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교사와 부모, 학교가 어린이들의 글쓰기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떤 학년을 맡아도 글쓰기에서 만큼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생활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이것은 나중에 따로 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를 하고는 한동안 어린이들의 글을 지켜본다. 주제는 어떤 것을 써오는지, 문맥은 맞는지, 비문은 없는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담았는지. 문해력이 뛰어난 어린이들의 글은 대게 완성도가 높은 글을 써 온다. 하지만 문해력이 경계선에 있거나 부족한 어린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읽었지만 읽기로만 끝나던 어린이들은 쓰기에서도 그저 쓰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번에도 그런 어린이들 몇몇이 보였다. 특히 남학생 한 녀석의 글은 애쓴 것 같으나 노력한 만큼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린이의 경우는 나아질 가능성이 크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남학생을 불렀다. 생활글을 앞에 두고 일일이 물었다.
"00아, 앵무새가 몇 마리나 돼?"
"다섯 마리요."
"그 중에서 세 마리가 사라지고 죽은 거구나?"
"네, 첫째는 작년 10월에 고양이한테 잡혀 먹었어요."
"00집에 고양이가 있어?"
"아뇨, 길고양인데 잠깐 앵무새는 하루에 한 번쯤은 햇볕 받으라고 마당에 잠시 내 놓거든요."
"새장 밖으로 꺼내서 마당에?"
"아뇨. 새장째로요."
"근데 어떻게 고양이가 꺼내가? 그리고 어떻게 그걸 알았고."
"나중에 우리집 cctv를 틀어 보니까 고양이가 꺼내 가는 걸 보고 알았어요."
"그랬구나. 바로 그거야. 방금 네가 말한 것처럼 글을 썼으면 첫 문장이 이렇게 두 줄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00가 생각은 많은데 그럴 맘이 급해서 빨리 적어 버리니까. 이렇게 되는 거거든?"
"아, 네."
"두 번째 앵무새 한 번 또 이야기 해 볼까?"
"두 번째 앵무새는요..."
대게 어린이들은(어른도 마찬가지지만) 글을 쓰게 되면 자기만 하는 내용으로 서술을 해 버린다. 자기는 다 알고 있으니 빠진 내용이나 허술한 서술로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나만 알도록 글을 쓰면 안 돼요.' 하는 것이다. 글은 읽는 독자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쓰는 경우가 글을 못 쓰거나 쓰기 싫은 아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양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글에 쓴 상황을 교사 앞에서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교사는 꼼꼼히 묻고 글내용을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쓸 때 담아야 할 내용을 끊임없이 확인시키고 각인시켜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교사의 글쓰기 능력도 도움이 된다. 교사가 자주 글을 쓰면 이런 안내를 하기가 편하다. 그렇지 못하면 기계적인 안내를 할 뿐이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뭔가 알겠다며 가져간 어린이는 한두 번 나에게 가져와 검사를 받았다. 맘이 급하다보니 완성도가 떨어져 재차 다시 묻고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쯤에 완성해 온 글은 썩 괜찮은 상태였다.
교사가 일일이 문장지도를 하지 않고 대화만을 통해 어린이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경험을 자주 쌓을 때라야 비로소 글쓰기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이런 경험이 꾸준히 이어지고 본인의 의지만 결합하면 이런 어린이의 경우는 일 년 뒤 엄청나게 달라진 글을 써 온다. 문제는 이렇게 꾸준히 지도해주는 교사의 관심과 노력이 뒷받침 되냐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방법은 나만의 독특한 지도방법은 아니다. 이미 앞서 실천한 선배님들의 사례였고 외국의 사례에서도 종종 발견되곤 하는 실천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오덕선생님의 글쓰기 철학을 실천하여 발전시킨 이호철(갈래별 글쓰기 교육의 저자)선생님의 사례에서 이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오래전에 펴내셨던 <살아있는 글쓰기>(2000)의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독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이제는 대학교수가 됐다는 페에 치쉬의 저서 <교실 혁명>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들은 말을 통해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언제든 정확하게 표사할 줄 안다." 그렇다 글보다 입말이 먼저 터진 어린이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교사라면 글쓰기 방법을 지도하기에 앞서 아이들과 관게를 맺고 그들의 입말이 글로 바뀌게 하는 과정을 연습하게 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표적인 독일의 혁신학교로 '헬레네 랑에'의 사례로 빼 놓을 수 없다. 프로젝트 중심의 종합학교(초등5학년~중학교 3학년)인 이 학교에서 읽기 쓰기를 빼 놓지 않고 지도를 하고 있는데, 출발지점에서 어려워 하는 어린이들에게 교사들은 위의 사례와 같이 입말로 말하게 하여 글쓰기를 돕는 사례를 되풀이 하고 있다. 글쓰기에서 특히 생활글 같은 에세이류에서 입말로 시작하는 것은 초등학생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도방법인 것이다.
그러니까 12년 전으로 거슬로 올라가 논산의 시골학교에서 글쓰기를 지도한 사례도 이 사실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에서 다시 꺼내어 본다. 이 어린이도 6학년이었다. 그 시절 한창 과학수업에서 생태계 먹이사슬 공부를 하고 있어떤 것 같다. 때마침 자기 집 마당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딱 그 상황이라 지켜 보던 이 어린이가 생활글을 써 왔던 적이 있었다. 글은 단 세줄이었다. 그 상황만 간단히 묘사한 글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00아, 너희집 마당에 무슨 나무가 있어?"
"배나무 있어요."
"그랬구나. 그럼 이 상황이 배나무 아래에서 벌어진 상황이네. 그래서 너가 배를 먹었다고 했구나."
"네, 근데 배가 떨어져서 상해가지고 파리가 꼬였어요."
"근데 네 생활글에는 그게 없는데?"
"아, 그것까지 써야 해요?"
"그래야, 자세히 그 상황을 알 수 있지. 너만 아는 글로 쓰면 안 되지. 선생님도 보고 우리 친구들한테도 읽어줄 건데."
"아..."
"그래서 또 이야기 해봐."
"그때 개구리가 나타나서 그 파리를 잡아 먹는 거에요. 혀를 낼름 거리면서 하하하."
"그래서?"
"그때 뭔가 소리가 나더니 개구리 뒤로 뱀이 나타난 거예요."
"그때 뱀이 어떻게 생겼는데?"
"음, 좀 거문(검정색의 충청도 사투리)했는데요."
"큰 거였어? 굵기는?"
"자전거 바퀴 굵기만 했어요."
"하하, 표현 재밌네. 너가 자전거 타고 다니니 그렇게 말하니 실감난다야."
이렇게 대화를 나눈 어린이의 글은 단 세 줄에서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이런 사례를을 보면,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글쓰기를 지도한 것은 어린이들과 삶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에게 책만 읽히고 기능 일부를 가르쳐 준다고 해서 글이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난 30년 동안 나는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다. 글쓰기 강의를 나가다보면 어린이들이 글을 쓰기 싫어한다면 어떻게 지도하면 좋겠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렇다. 글을 읽기도 싫어하는 어린이가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이것은 특별한 글쓰기 기법으로 될 일이 아니다. 문해력이 어느 정도 된 어린이들이야 몇몇 방법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어린이들은 교사와 삶을 나누는 관계맺기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득 좋은 글을 써 주었던, 글쓰기 능력이 떨어졌던 지난 날의 어린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말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특별한 지도법으로 글쓰기를 가르쳤다기 보다는 글로 자신과 관계를 맺던 교사에게 적선하듯 '엣다'하며 내게 좋은 글을 던져 준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을 교사가 글쓰기를 매개로 말을 걸어주고 늘 소외받던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교사에게 보답할 일로 좋은 글쓰기을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내가 좋은 글이라 모아 본 글의 상당수는 흔히 말하는 학력이 뛰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글이었다. 이런 지점에서도 글쓰기교육은 단순한 언어교육이 아니라 삶을 가꾸고 돕는 교육으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