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14)
벌써 아이들과 만난지도 197일째. 3일 뒤 일요일이면 200일이다. 담주 월요일엔 200일잔치를 조촐히 치르려 한다. 진짜 세월은 쉼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간다. 시간은 빨리 가는데, 정치하는 이들의 시간은 너무도 느리게만 가는 것 같다. 무너져 가는 시절을 빨리 되돌려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가는지.
오늘 아침도 읽고 쓰는 루틴은 이어갔다. 이제 쓰는 양은 점점 길어지고 일단 써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글감이다. 나는 본디 글감을 잘 내주지 않는다. 일상에서 찾아야 할 글감을 누군가 자꾸 보여주면 그 틀에서 크게 못 벗어나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1학년 아이들에게도 글감을 던져주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자기 삶에서 글감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이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거기서 발견하는 지점을 글로 쓸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삶을 가꾸는 글쓰기로 나아갈 수 있다. 하루 한 문장 쓰기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아이들은 자기 삶을 조금씩 읽어내고 발견해 내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자극은 주고 안내는 해주어야 한다. 그냥 쓰라고 그냥 생각해 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연습은 <맨 처음 글쓰기>에서 하고 있다. 이름씨, 움직씨, 그림씨라는 갈래에서 고빈도어 중심으로 1학년 아이들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거기에 맞게 겪은 일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런 연습이 병행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말이 필요하다. 자주 말을 해야 한다. 자기 삶에 대해 오늘도 글감이 '몸'이어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례를 들려주고 겪은 일을 떠올리게 했다.
그랬더니 '아!' 한다. 이렇게 연습을 하는 것과 아무 글감도 없는 상태에서 떠올려 자기 삶을 돌아보고 쓰게 하는 작업이 병행이 됐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점점 편하게 자기 삶을 시로, 생활글로, 일기로 써내려 가게 된다. 이 연습이 부족하니 2학년,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이 됐는데 글 기를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 책읽기 등 문해 환경이 지속적으로 제공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에 쉽게 되는 법은 없다. 하물며 글쓰기인데....쉬 터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3-4교시는 예정했던 활동을 미루고 내일 서울 문화예술체험으로 백희나 그림책 전시회랑 뮤지컬을 관람하러 가는데 필요한 활동을 했다. 먼저 미처 읽지 못한 그림책 <분홍줄> <북풍을 찾아간 소년>을 먼저 보여주었다. 이 두 책은 백희나 작가의 주요 작품과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기도 했고 결이 다른 그림책이라 이번 전시회때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래도 작가의 책이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분홍줄>은 분홍실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그림책이다. 실제 분홍줄이 이어가며 다양한 장면이 펼쳐지자 아이들이 신기해 한다. 나중에 우리는 이 책을 직접 우리도 만들어 보자 했다. 제목도 정했다. <초록줄>
<북풍을 찾아간 소년>은 노르웨이 옛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네버랜드 시리즈의 하나이다. 그 한꼭지를 백희나 작가가 오래 전에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와 이어져 있어 아이들도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듯 집중해서 보았다.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행복하게 살게 되는 이야기. 온갖 시련이 엄청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 아이들이 눈빛이 오랜만에 그림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이야기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이야기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그 책은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행동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지, 그것이 작가의 플롯전개를 넘어서 뇌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작품을 기존의 플롯 중심이 아니라 뇌과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수 많은 고전명작, 대중과 평단의 갈채를 받은 현대 소설, 영화, 티비 드라마 작품이 어떻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지를 분석해 내는 것이다. 이 책은 플롯보다 인물에 관심을 더 보인다. 변화무쌍한 예기치 못한 신비로운 인물의 등장과 퇴장이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며 사람들은 몰입할 수밖에 없는지를. 우리 아이들은 오늘 북풍을 찾아간 소년과 북풍을 만나면서 한 없이 깊도록 이야기 속에 빠져 들어갔다. 옛이야기는 이미 뇌가 이야기에 빠져드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백희나 그림책 < 연이와 버들도령 > . 이 이야기도 사실 우리나라의 신화와 옛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재를 모티브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뇌가 좋아하는 이야기 구조와 인물을 이미 담고 있기에 아이들은 또 한 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나는 이럴 때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에서 나오는 대사를 같이 읊도록 하는데, 오늘은 이랬다.
"버들도령, 버들도령, 연이 나 왔다, 문 열어라."
이 주문을 외며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연이와 버들도령, 이를 시기한 못나고 위험하고 무서운 나이든 여인. 그 여인은 결국 이 주문을 외워. 버들도령을 태워 죽이는데... 이 때 아이들에게 이렇게 바꿔 보게 해 보았다.
"박진환샘, 박진환샘, 잘 생겼다. 문 열어라."
그랬더니 아이들이 난리를 피우며 말도 안된다고 한다. 그때 00가 다른 주문을 외웠다.
"박진환샘, 박진환샘, 못 생겼다. 물러가라!"
"맞다. 맞아. 너 정말 잘 지었어. 야, 대단해."
'뭐가 대단해. 이건 말도 안돼."
"아니에요. 좋은데요. 자, 다 같이. 박진환샘, 박진환샘, 못 생겼다. 물러가라!"
하이고. 어쩌다 이렇게 마무리 하고 영상으로 뮤지컬 관람 안내와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면서 기대를 높이며 마무리를 지었다. 하여간 내일 버들도령을 찾아가 위로를 좀 받아야겠다. 괴씸한 우리 반 녀석들을 혼 좀 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