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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환 Apr 19. 2024

스며든다는 것

(2024.4.19.)

'스며들다'의 사전적 의미는 '밖으로부터 배어들다'라고 한다. 배어드는 주체가 우선 중요하다. 어떤 '밖'이냐는 것에 따라 배어들는 것이 긍정의 의미 혹은 부정의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밖'에 무엇이 있는 지 모를 때, 우리는 공포를 느끼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밖에서 들리는 소리와 밖에서 전해져 오는 냄새, 밖에서 전해져 오는 여러 가지 느낌은 더 이상 안에서 사는 이를 마냥 가두어 둘 수 없는 어떤 상태로 만든다. 밖을 넘나들고 싶을 수도 있고 밖의 기운을 빨아들여 안팎이 구분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스며든다'는 표현을 쓰는 지도 모른다.


지난 3-4월, 우리 반 12명은 내게는 '밖'이었다. 아이들도 학교라는 공간과 담임교사인 내가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을 게다. 안에서만 서로를 바라보다 한 발씩 내딛고 때로는 손을 맞잡으면서 서로를 알게 되고 마침내 믿음을 가질 때, 서로는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오늘 나는 아이들과 그런 지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마다 이뤄지는 차 한 잔의 시간을 준비하는 아이들 모습이 그러했고 나 또한 아이들을 위한 차를 따르며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오늘 표정을 본다. 아이들은 오늘도 들려줄 옛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재미난 이야기 가지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첫 블록 시간은 국어시간 'ㄱ'을 마무리 하는 시간. <첫배움책>에 실려 있는 내용을 하나 하나 살펴가며 아이들 모두에게 발표를 시키고 어떨 땐 질문을 던져 아이들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 아이들은 신나게 자기가 아는 걸 발표하고 즐겁게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과정을 거친다. 홀소리를 복습하는 공책에 소리 높여 획순을 말하고 거기에 따라 글을 쓴다. 이 지점에서 나와 아이들은 서로가 만든 루틴에 자연스레 합의를 보고 이 시간을 즐긴다. 엊그제부터 시작한 바깥 놀이에 아이들은 들떠 있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흙 장난에 곤충 관찰에 빠져든다. 오늘은 나방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며 소리쳐 외친다.


다음 시간에는 입학식 때 나눠 준 꽃을 저면관수 방식의 화분으로 옮겨 심기를 해 보았다. 한동안 물하고 거리가 있던 꽃들이 아이들이 채워준 흙과 물에 생기가 돋는다. 아직 텃밭에 감자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틔우지 않고 있는지 못하는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워낙 심을 때부터 싹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었긴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텃밭에서 심은 감자 상태를 본 아이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교실로 들어와 잠시 뒤, 통합교과 '사람들'에 나오는 표정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감정카드를 아이들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지금 자신의 기분과 닮은 카드를 골라 보게 했다.


그리고는 카드를 들고 발표를 시켰다. 무엇때문에 이 카드를 고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게 했다. 장난을 잘 치는 녀석의 발표는 역시나 이 부분에서 약한 면을 보인다. 이후 발표방법을 다시 설명하고 시키니 뒤 따르는 아이들은 제법 그럴 듯하게 자기 감정을 드러낸다. 꽤 많은 아이들은 점심급식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지금 자기 마음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꺼낸다. 한 녀석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공부가 재밌다며 공부하는 모습의 카드를 꺼냈다. 오늘 하루 모든 시간이 좋았다며 하트가 잔뜩 들어간 카드를 꺼내 들기도 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내 손을 잡고 가고 싶다고 달려드는 아이들. 내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다는 아이들. 언제 어디서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들. 순간 나는 이 어린 아이들과 하나가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어쩌면 나는 나의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스며들게 했다기 보다 우리 반 아이들의 순수함과 단순함에 내가 길들여지고 스며들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점심시간에 자기가 먹은 것을 내게 검사(?)를 받고는 쏜살같이 튀어나가 점심놀이 시간을 즐기는 아이들. 텃밭에 가서 모종삽에다 심지어 일반 삽까지 가지고 와서 땅을 파고 구역을 만들며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며 신나게 노는 아이들.


나는 오늘 아이들 속으로 스며든 나를 발견했다. 이 기분 오래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오늘은 아이들과 마흔 일곱 번째 만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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