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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환 Jul 16. 2024

여름날 산책의 추억

(2024.7.16.)

아침 시간 칠판에 붙은 주간시간표에 몰려드는 아이들.


"왜 그래?"

"오늘 산책하죠. 선생님."

"그렇지, 오늘 하지."

"와~~ 산책이다~~"

"자, 바로 나가는 건 아니고 차 한 잔 마시면서 고양이 학교 오늘 읽고 나가자~"

"오늘은 예언의 고양이."

"야, 그걸 기억하네."

"어제 안 읽었으니까 두 개 읽어주세요."

"그럴까? 그런데 예언의 고양이가 길어서 오늘은 한 편만 해야 할 걸?"

"에이~"

"너희들 산책 안 나갈 거야?"

"맞다!"


그래 맞다. 오늘은 산책 하는 날. 사실 오늘 비가 아침에 오면 우산 쓰고 맨 발로 운동장을 거닐 생각도 했다. 한 때 우산을 쓰면서 비가 닿는 소리도 들어보고 발로는 흙의 촉감도 느껴보면서 소리와 발에 닿는 느낌, 눈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감성이 섞인 시나 산문을 쓰게도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말로 표현하게 하면 그만이고...들은 소리를 글로 쓰게 하는 것도 괜찮을 듯했는데, 아침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하여 다음으로 미뤘다. 오늘은 그냥 산책.


텃밭을 둘러보고 풀이 무성해진 모습이며 딸기밭과 블루베리 나무를 지나 고추가 자라고 있는 모습, 그리고 자그마한 수박이 자라는 모습, 이어서 우리 학교 대표적인 터줏대감이자 큰 할아버지, 600년쯤 되는 느티나무 품 안에서 사진도 한 장 찍으며 1학년 여름, 산책의 추억을 쌓아 보고 싶어 사진도 한 장 찍어 보았다. 다음으로는 놀이터에 잠시 풀어 놓고는 마음껏 뛰어 놀게 했다. 어떤 녀석은 제비집에 돌을 던져 내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어떤 녀석들은 새끼개구리를 잡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정말 이곳은 아이들이 자라기에는 정말 제격이다.


하나 밖에 없는 녀석도 1학년 시절에는 남쪽 밀양 작은 학교에서 보내긴 했다. 제 엄마랑 같이 출근을 하고 같이 퇴근을 했던 오랜 시절. 그 시절 해지는 뒤편으로 걸어가는 녀석의 사진을 아쉽게도 잊어버렸지만, 내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언제쯤 물어보니 그 시절을 아들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6년을 사는 것과 1년 한 해만 사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나 보다. 부디 우리 아이들은 6년을 이곳에서 건강하게 살아 정말 아름다웠던 어릴 적 추억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나는 오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했다.


산책 이후에 돌아온 교실. 곧바로 연극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오늘은 1학기 마지막 연극 수업. 2학기 공연을 준비하는 극본 읽기 시간. 아직 읽기가 서툰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생각 밖으로 아이들은 꽤나 집중하고 꽤나 진지했다. 자기 차례를 기다려 읽어야 하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이따금 담겨 있는 노래도 함께 부르는데, 극본 읽는 소리나 노래가 참으로 정겹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도 잠시 바로 이어지는 중간놀이 시간, 고함을 지르고 뛰어나가는 아이들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모습 때문에 순간 감정이 팍 깨지고 말았다.


오늘의 마지막 블록시간은 수학. 사실은 오늘 국어시간이고 어린이시 따라쓰기 시간이었는데, 어제 아이들 수 읽기 상태가 불안해 보여 다시 연습을 시켜야 할 것 같아 바꾸었다. 오늘은 50까지의 수로 이어지는 놀이판을 만들어 친구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게 했다. 오래 전 뱀주사위 놀이판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보게 했는데, 꽤나 재미있어 한다. 직접 만들어 놀게 했는데, 나하고 아이들이 한 편이 되어 하는 걸 해보고 싶다 하여 먼저 해보았다.  그리고 나서 하는 주사위놀이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수세기 칩으로 50까지의 수의 배열의 특징을 알아보게 하고 다시 한 번 자릿수를 파악하게 했다.


그런데 두 아이가 일의 자리와 십의 자리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헷갈려 해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우리 학교도 각 학년마다 자리가 있다고 예를 들어보기도 하고 수의 색깔을 달리하여 설명도 하고 친구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십의 자리와 일이자리 위치를 확인하고 읽어보게 했는데도 헷갈려 해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해보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점심을 먹고 돌아와 확인을 하니 그제야 이해를 한듯 제법 답을 또 한다. 수업에서 집중을 하기 어려운 두 아이가 자꾸 핵심을 놓치고 헤매는 것 같아 살짝 걱정도 되는데, 결국에는 이해를 한 것 같아 오늘은 일단 넘어갔다. 내일 다시 아는지 확인해 보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 같았다. 요 녀석들 하고 사는 건 하나도 쉬운 게 없다.


이 일기를 마무리 할 무렵, 교실 밖으로 소나기가 퍼 붓는다. 갑자기 20년 전 경남 김해 00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내 교직 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나를 교사로 성장 시켜주었던 곳. 교사 모임을 이끌기도 하고 전국모임에 참여도 하고 학교에서도 6학년, 4학년, 2학년을 맡으며 처음으로 5년을 꽉 채웠던 곳. 교장선생님의 응원과 지지로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곳. 당시 학부모들도 열렬히 응원하고 지지했던 그곳은 자그마치 75급의 학급당 인원이 40명이 되던 경남 최대의 학교였다. 지금은 분교가 되어 절반으로 줄었지만, 그런 학교에서도 나는 참으로 열심히 살았고 교사라는 직업에 보람을 느끼고 살았다. 아들 교육 문제로 충남으로 도간 이동을 한 지도 어언 16년이 돼 간다.


그 시절에도 비가 내리던 어느 날 4학년 아이들에게 우산을 쓰게 하고 맨 발로 학교 운동장을 돌아보게 하고 시를 쓰게 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는 컸지만, 학교 뒤편에 산이 있었고 거산보다 훨씬 큰 산책로와 약수터가 있어 이따금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 밖을 나가 둘러보며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게 했었다. 6학년 하고는 주말에 인근 산행길에서 만나 산도 타기로 약속도 했는데, 무려 20명이나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교사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 나선 산책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고 나에게는 오래전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은 아이들과 만난지 135번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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