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을 써야 하는 까닭

- 글쓰기교육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고 쓰게 가르쳐야 하는 이유

by 박진환

한동안 책을 읽기 어려웠다. 노안은 이미 적응이 된 지 오래이니 그 탓은 아니다. 그동안 책을 쓴다고 원격연수 작업한다고 애를 쓴 해를 넘기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새 학교로 옮기면서 그동안 공부한 교육과 현실의 괴리도 한몫을 했다. 성찰보다는 그저 화가 나고 한숨만 나왔다. 교육운동과 학교운동의 벽이 느껴졌다. 지난 20년 간 나름 애써 온 실천이 고작 이 정도인가 회의감마저 느꼈다. 책이 읽기 싫어진 까닭은 아마 이것이 더 컸을 게다.


그러다 아무 책도 읽지도 글도 쓰지 않는 요즘 삶이 마뜩잖아 글쓰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책도 조금씩 만나기 시작했다.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의 질병 중 하나가 읽지도 않으면서 책은 사는 것인데 그동안 꽤나 책을 모아 놨던 탓에 책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때로 내가 이런 책도 샀었나 하며 얼마 전에 구입한 책 제목도 낯설어 어이없어도 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책을 조금씩 만나다 얼마 전부터는 권정생선생님의 동시를 읽기 시작했다.


1964년에 직접 만들고 꾸며 엮으셨다는 동시집 <삼배치마>와 1972년에 직접 꾸며 소장하시던 미출간 동시집 <산비둘기>을 만났다. 거기다 권정생을 사랑하는 이들이 선생님의 동시를 읽고 쓴 에세이를 읽었다. 시마다 담겨 있는 사랑과 고통, 아픔과 슬픔이 가득한 권정생선생님의 삶에 가슴 한 켠이 아렸다. 권정생의 동화보다 덜 알려진 동시에서 선생님의 철학과 세계관을 또렷이 읽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동화에서도 그랬지만, 권정생선생님의 동시에서도 드러나는 공통점이자 특징이 보였다. 그것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쓰는 쉬운 말이었다. 나 또한 꽤 오랫동안 경상도에 살았지만 낯선 경상북도 사투리가 어려워 쉬 읽어내기 어려운 때가 간혹 있었지만, 사투리도 결국엔 그 시절 그 곳에서는 누구나 쓰는 쉬운 지역말이었으니, 권정생선생님의 모든 작품에는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우리말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다른 나라 말과 우리 말의 구분 짓고 경계 짓어 차별을 두고 벽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말들은 태어난 까닭이 있고 존중받아야 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나아가 평화를 위해 받아들이고 싶은 말들은 나눠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민족의 개념이 담긴 우리말 쓰기를 이오덕, 김수업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은 시대의 굴곡과 권력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도 깊었던 시절 때문이었다.


오늘날은 민족의 개념의 무뎌지고 국수주의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은 시절이다. 그래서 이오덕, 김수업선생님의 우리말 쓰기에 대한 주장과 이론, 권정생선생님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쉬운 우리말은 이제 다르게 받아들이고 확산시켜야 한다고 본다. 우리말 쓰기 운동은 이제 식민지와 계급과 자본의 언어를 이겨내고 넘어서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언어 운동이어야 하는 것이다. 함부로 영어와 일본말을 쓰지 않고 좋은 우리말을 쓰자는 수준에서는 우리는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이른바 세계화의 흐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만큼 달라져 있고 빠르게 그러한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속에서는 가사에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 쓰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시절이 됐다. 학생들의 말 속에서 어른들의 말 속에서 외래어를 섞어 쓰는 일은 자연스럽고도 시대를 앞서가는 유행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내에서 사는 외국인도 공식 통계로는 약 200만이라고 하고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이라고 하는 시절에 곱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자는 말은 너무도 교과서적이고 국수적이다.


우리말 운동은 그래서 민족을 앞세우기보다 식민성을 극복하고 계급과 권력, 자본의 언어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새롭게 다가가야 한다고 본다. 오래 전부터 이오덕선생님과 김수업선생님이 우리말을 쓰자고 한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식민시절의 언어, 사람을 차별하는 언어, 어려운 글자로 배우지 못한 민중을 업신 여기는 계급과 권력의 언어와 싸우고자 했던 어른들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를 좀 더 앞세워 우리말을 쓰도록 학생을 가르쳐야 하고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기준으로 삼게 해야 한다.


나는 요 며칠 새삼 권정생선생님의 동시를 읽으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권정생 선생님의 동시 가운데 <밭 한 뙤기>는 우리가 우리말을 써야 하는 까닭과 선생이 학생에게 우리말을 강조하고 가르쳐야 하는 모든 까닭이 담겨 있다.


밭 한 뙤기 |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뙤기

논 한 뙤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되고


밭 한 뙤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지식산업사, 1988


선생님의 이 시 한 편 어느 곳에서도 어려운 말이 없다. 식민지 시절의 말이나 권력과 계급의 말도 보이지 않는다. 쉬운 우리말에는 권력으로 누구를 종속시키는 언어가 아닌 행복과 자유를 꿈꾸는 세상 모든 이들의 언어만 있다. 평화의 언어, 민주시민의 언어는 그래서 우리말과 쉬운 말, 어린이들도 알 수 있는 말로 만들어져 나눠야 한다.


2021년도 이제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30년이 되도록 선생을 하지만 난 여전히 난 어린이들에게 권력의 언어를 쓰고 있지 않았는지 다시 또 반성하고 있다. 적어도 내년에는 내가 머문 곳 어디서에서는 평화의 언어가 넘쳐나는 우리말을 쓰고 살고 싶다. 아니, 꼭 그렇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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