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여름 글 ①] 몸짓에 관하여

영화→비디오게임→VR→포스트휴먼

by 가와 누

0. 일러두기

0.1. 본 글은 2023년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주관한 포스트 휴먼과 영상예술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글을 수정한 글이다.

0.2. 출처와 각주는 브라우저의 찾기 기능(Ctrl + F)을 이용하면 된다. 출처01을 보고 싶다면 Ctrl + F 후 "출처01"이라 검색하는 식으로 말이다.

0.3. PC로 보는 걸 추천한다.





1. 영화, 작동하는 몸짓

영화의 몸짓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주목한 몸짓에서 시작해 보자. 나는 승무원의 몸짓에 주목해 한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갈 때 비행기를 애용한 적이 있다. 방송에 따라 비상구 위치와 구명조끼 사용법 등을 알려주는 몸짓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 몸짓은 방송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작동한다는 느낌을, 복도에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한되어 있다는 느낌을 풍겼다.


혹시라도 이 몸짓을 구경해보고 싶다면 가장 뒷좌석을 추천한다. 그래야만 흔히들 이야기하는 개인의 고유성이 조망되기 때문이다. 그 고유성은 예컨대 어느 일요일 밤 서울발 비행기 복도에서 발견한 앞에서 세 번째 승무원의 서툶과 첫 번째 승무원의 피곤 서린 미소였다. 전자는 신입이었던 모양이고 후자의 상태는 충혈된 눈이 보증했다.


당시 이러한 고유성까지 관찰하자 문득 암울한 생각이 들었음을 밝혀야겠다. ‘이 비행기가 착륙하면 승객들 중 대부분은 월요일 출근이 싫어도 그것을 위해 귀가할 것이고, 외에도 해야 하는 일을 찾아 움직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니 승무원의 몸짓·통제당하는 몸짓·해야 할 일을 하는 몸짓·자신 밖의 요구를 따르는 몸짓·작동하는 몸짓이 착륙 후 승객이 행할 몸짓을 공연하는 것처럼 느껴졌음도 밝히겠다. 그렇게 비행기가 가속해도 혼자 되뇌는 선문답은 계속됐다. '저 작동하는 몸짓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니 누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누구인가? 저 몸짓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저 몸짓과 함께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륙 후 생각은 쪽잠으로 바뀌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선문답은 이후에도 예기치 못한 순간 계속 찾아왔기에, 이 글에서 '영화→비디오게임→VR→포스트휴먼'이란 일종의 영상매체 역사로 답해보려 한다.




작동하는 몸짓을 만든 사람은 비교적 명확하다. 「몸짓에 관한 노트」[출처01]에서 조르주 질드 라 투레트가 한 일을 보자. 그는 영화가 등장했던 19세기말 사람의 걷는 몸짓을 분별해 보려 피험자의 발에 산화철을 발라 걷게 했다. 피험자가 남긴 발자국을 분석한 조르주는 필름 영화가 1초에 24개의 프레임으로 피사체의 몸짓을 분별하듯 걷는 몸짓을 분별해 냈다. 분별이라는 단어의 뜻을 고려한다면 걷는 몸짓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앎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해도 무방하겠다.


또 다른 예로 조르주와 비슷한 시기 미국에 살았던 프레데릭 테일러란 이름의 경영자를 보자. 그는 과학적 관리법이란 기법을 창안해 공장 일꾼들의 몸짓을 통제했다. 일꾼의 몸짓을 단계별로 분별한 다음 그중에서 생산 활동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금지해 생산성을 향상한 것이다. 조르주와 유사한 영화적 시선을 갖추고 있던 그의 일꾼들은 주어진 공장의 배열 속에서 정해진 위치에 자리 잡아 작동했을 것이며, 따라서 우린 약간의 과장을 보태 분별당한 피험자의 몸짓과 배열 속 일꾼의 몸짓이 승무원의 그것과 동질적이라 할 수 있다. 난 19세기말 영화적 시선을 가진 이들이 통제당하는 몸짓·해야 할 일을 하는 몸짓·자신 밖의 요구를 따르는 몸짓·분별당해버린 몸짓·작동하는 몸짓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신기하게도 몸짓이 분별당한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사람들의 시간 또한 일과 여가로 분별되었다. 기술과 산업의 발전으로 일할 때엔 작동하고 여가의 때엔 작동에서 벗어나 개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의 모델을, 분별된 시간의 모델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자유를 준 여가의 탄생은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본 글에선 일부러 부정적이게 바라보자. 여가를 자유 시간이 아닌 다가올 작동을 위한 쉬는 시간이라 여기자는 말이다. 이에 따른다면 우리의 삶을 '낮에 일 하고→밤엔 내일 낮의 일을 위해 쉬고→다음 날 낮에 또 일하고→휴일이 오면 다음 주 일을 위해 휴일을 보내고…'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여가의 탄생 후 24시간 내내 작동하거나 작동을 위해 쉬는 쳇바퀴에, 낮과 밤의 연쇄에 휩쓸리고 있는 셈이고 당연히 이렇게 매사에 부정적이면 살다가 문득 무서운 생각에 빠진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작동만 하다가 가는 걸까?’ 이런 생각 다들 한 번은 해보지 않았는가. 특히 누군가가 승무원들을 관찰했을 때인 일요일 밤은 그런 생각이 일주일 중 가장 심하게 드는 때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간을 영화 외 다른 영상매체가 적었던 때인 20세기 초중반으로 한정한다면, 자신을 잃어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작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기이하게도 사태에 일조한 영화에 의해 주어졌었다. 영화관이란 장소를 생각해 보라. 이 장소에서 스크린 속 배우들은 카메라에 의해 분별되고 있지만 영화관 안은 밖과 달리 모든 사람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관객만큼은 작동하는 몸짓에서, 테일러에게서 도망쳐 영화관의 어둠 속에 숨어 24시간 중 2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도망자·관객들이 스크린 속 작동하는 몸짓을 보며 취한 작동에서 벗어난 몸짓·정지한 몸짓에 주목해야 한다. 정지한 몸짓은 그 몸짓을 취한 자가 자신의 눈에 비친 작동하는 몸짓 사이에서 다른 것을, 평이하게 말해보자면 영감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동하는 몸짓 사이에서 본 영감? 생소하겠지만, 그런데 나는 이 영감이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쩌면 당신이 평소 작동하던 중 느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철학자 랑시에르가 애호한 의뢰인 집에 마룻장을 까는 일을 하는 일꾼 고니를 보자. 앞서 비행기의 승무원과 공장 노동자에게 적용한 도식을 고니에게도 적용해 보자면, 무릎을 꿇고 마룻장을 까는 몸짓이 그의 작동하는 몸짓이고 마룻장 배열이 그가 위치한 배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남자는 마룻장을 깔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낮에 일 하고→밤엔 내일 낮의 일을 위해 쉬고…'란 흐름 속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점심때 뭐 먹지?’이런 생각을 할까? 그렇지 않다. 랑시에르가 말하길 고니는 일하다 불현듯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닥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선 으레 그렇듯 선선한 바람과 볕이 그에게 들었을 것이다. 굳어서 창밖을 보는 몸짓·배열과 작동에서 이탈해 멈춘 몸짓·테일러가 없애보려 했던 몸짓이 그를 찾아와 상상에 날개를 달고 보이는 것을 즐기게 하자 영감이 솟는다. 나아가 프랑스 철학자가 일컫길 고니는 꽤 유별난지라 작동 마디에서 영감을 느끼는 것에 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룻장 까는 일꾼은 내일 일을 위해 잠들어야만 하는 밤을 자신과 같이 영감을 느낄 줄 아는 일꾼들과 보냈으며, 그 유별난 일꾼들은 바로 그렇게 해서 자신들을 작동시키는 낮과 밤·일과 여가의 연쇄에서 벗어나 보려 했단다.


그런데 어떻게? 밤에 무엇을 했기에 삶에서 도망칠 수 있었을까? [프롤레타리아의 밤][출처02] 내 상상을 섞어 말해보자면, 난 그들이 영감을 글로 풀며 도피했을 것이라 본다. 내가 평론가여서 이를 당연히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영감을 느꼈다면 글로 풀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낮엔 작동(operate)하는데 쓰이던 일꾼들의 손은 밤에는 글을 쓰는데 쓰였으며, 이를 달리 말한다면 유별난 사람들은 주어진 배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사용하여 글이라는 배열을 창조(create)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밤에 뜬 눈으로 꿈꾼 자들은 글 쓰는 몸짓·창조하는 몸짓으로 작동하는 몸짓에 저항했다.




정지에서 얻은 영감에 기대어 잘 밤에 잠은 안 자고 현실 도피를 하며 주어진 배열과 작동에서 저항한 배열의 창조자, 글 쓰는 사람. 이제 영화관에 이를, 은근슬쩍 언급한 평론가 또한 본격적으로 다루며, 적용해 보자. 24시간 중 2시간을 죽이는 장소에서 정지한 몸짓을 취한 관객은 작동하는 배우를 보며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관객 중에서 유별난 평론가는 제 자신조차 분별되지 않는 영화관의 어둠·밤에 기대 그 영감을 글로 풀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영화관 밖에 나와 글을 쓰는데, 이즈음에서 일꾼과 평론가의 영감에 기반을 둔 글쓰기가 무엇인지 구체화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기본적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비슷한 경험이 있으리라 믿는데, 우린 글을 쓸 때 ‘내 안에는 이런 아이디어가 있으니 이것을 끄집어 내 글로 적어야지.’란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절대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안다. 적다 보니 펜과 키보드를 다루는 손은 분신사바처럼 내 의도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고, 내가 원래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불분명해진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 안에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다시 쓰기와 고쳐 쓰기로 안에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별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글 쓰는 일꾼과 평론가도 안·자신을 모르는 처지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겐 추가적인 문제도 있다. 그들이 글로 쓰려고 한 대상·밖에 있는 것인 영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영감이란 늘 그렇듯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기 마련, 따라서 영감을 글로 푸는 사람들은 글쓰기 대상을 엄연히 따지면 모른다. 영화를 보고 글을 적어봤거나 영화평론을 읽어 봤다면 공감할 것이라 믿는데, 난 감상문에 불과한 영화 글이든 세련된 비평문이든 그 글의 시작점엔 ‘내가 영화를 보다 문득 무언가를 느꼈는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네.’라는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일꾼과 평론가의 글쓰기는 나·안뿐만 아니라 영감·밖도 동시에 분별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영감에 기반을 둔 글쓰기의 초기 상태는 모든 것이 분별되지 않는 밤과 같고, 일꾼과 평론가는 그 밤 속에서 끈질기게 글·배열로 안과 밖을 동시에 분별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글을 써냈다면, 창조된 배열은 시적인 무언가처럼 직관에 기댄 것일 수도 또는 많은 영화 평론문이 각종 영화이론이나 철학 등을 인용한 것처럼 기존의 지식·앎·이미 분별된 것에 기댄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완성된 글의 성질이 무엇이 됐든 중요한 것은, 그 글은 작동에서 도망친 자들이 창조해 낸 안과 밖을 동시에 재분별한 배열이란 점이다. 거창하게 말해보면 주어진 배열·세계에서 도망친 자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분별해 그 모든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알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해는 뜨고 영화는 끝나기에 창조된 배열은 언제나 임시적이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해 밤은 다시 찾아오고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때마다 24시간·일과 여가·낮과 밤의 연쇄에 대한 저항은 반복된다. 손은 끝없는 재분별로 임시적인 배열을 계속해서 창조해 내 작동에서 벗어난다.






2. 비디오게임, 조작하는 몸짓

이제 시계를 돌려 보다 많은 영상매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영상매체 중 영화의 인기가 다소 죽은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으로 이동하자. 우리는 비디오게임에 주목할 것이다. 물론 이 때도 영화관은 1.처럼 바쁘게 돌아갔겠지만 이제 관심을 영화관객이 아닌 게이머에게, 다른 방식으로 영상을 대하는 사람에게 쏟을 필요가 있다. 게이머들은 자신의 방에서 평론가들이 창조(create)에 쓴 손을 모니터 속 캐릭터를 조작(操作, operate)하는 데에 쓰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조작에 따라 작동(operate)하는 캐릭터의 몸짓을 보며 작동하는 몸짓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을 보자.


현실에서는 우리는 자신을 세계에 들어맞게끔 빚어내려 노력한다. 세상이 먹고살라 시키니 직업을 즐기는 척하고 파트너를 찾으라 시키니 재치를 갖추거나 그럴싸한 온라인 데이트 프로필 작성법을 배운다. 우리는 현실에 어긋난 처지를 무마해보려 한다.
한편 <슈퍼마리오 형제>는 우리가 만나게 될 구덩이와 몬스터에 대응할 수 있는 만큼만 우리에게 달리고 점프하는 능력을 준다. 뛰어넘어야 하는 구덩이와 밟아야 하는 몬스터로 가득한 세계 속 마리오의 몸짓은 세계와 어긋나 있지 않다. [출처03]


위 인용문을 읽으면 작동하는 몸짓이 그렇게까지 나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현실에 어긋난 자신을 재위치 시킬 수 있는, 재분별할 수 있는 유별난 일꾼이나 평론가는 싫다 하겠지만 그들처럼 창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단지 주어진 세계·배열에 따라 잘 작동하는 마리오를 부러워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과감하게, 영화관에서 평론가를 뺀 나머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대부분은 평론가보단 마리오를 부러워한다고 답할 것이라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관객이 평론가는 아니지 않은가? 영화관의 관객이 빠짐없이 영감을 얻는다고 쳐도 평론가처럼 그 영감을 창조로 잇는 사람은 드물다. 영감에 기반을 둔 글쓰기는 어쨌든 분별하고 배열하는 일이라 삶만큼 지루하며, 무엇보다 평론가가 아닌 관객은 영화관을 나서면 삶으로 복귀해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평론가가 아닌 관객은 어쩌면 영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작동하는 24시간 중 2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영화관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상한 가정을 해보자. 게이머들이 위 문단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 작동에 저항하려고 영상을 보는듯한 평론가들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말이다. 이 가정을 따른다면 게이머들은 “어떻게 창조로 작동에 저항할까?”라 묻지 않고 “어떻게 잘 작동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마리오가 될 수 있을까?”라 자문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프레데릭 테일러보다 발전한 현실의 경영자나 경영자적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 입에 담는 어휘, '넛지'나 '인센티브·유인(誘因)작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요즘 많은 사람들은 사회에 문제가 생기면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인센티브로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할 때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도식을 떠올려 보자는 말이다. 어떤 배열·구조가 있고 인간은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하지만 그 자유의 결과는 결국 배열이 정한 대로, 배열이 원하는 대로 귀결되고야 마는 도식, 소위 자율이라고 일컬어지는 도식 말이다.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게이머는 두 가지 operate 몸짓, 작동하는 몸짓과 조작하는 몸짓을 일치시켜 게임 속에서 그런 자율을 체득한다.




언뜻 보기에 게이머는 조작하고 캐릭터는 작동하니 그런 일치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담 비디오게임 <스플린터 셀: 블랙리스트>(유비소프트 토론토, 2013)를 보자. 내용은 단순하다. 게이머가 조작하는 캐릭터이자 미국 특수부대원들은 미국 수호를 위해 테러리스트와 싸우며 ‘다섯 번째 자유’란 가상의 개념을 따른다. 현실에서 루즈벨트가 언급한 인간의 네 가지 자유에 한 가지를 추가한 것으로, 다음 표어를 보라.


첫째, 표현의 자유. 둘째, 신앙의 자유. 셋째,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넷째,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다섯 번째, 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유.


모든 자유를 뛰어넘는 다섯 번째 자유는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민간인들의 평온한 삶을 지키기 위해 테러리스트나 그들과 관련된 자들을 불법적으로 잡아 가둔 후 고문하는 장면을, 선 안을 지키기 위해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에서 본 적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편으로 우린 다섯 번째 자유에서 게이머와 캐릭터의 관계 내지는 게이머와 게임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런 그림을 상상해 보자: 모니터 속에는 비디오게임의 세계·배열이 있고 게이머는 모니터 밖에 즉 주어진 세계의 밖에 위치한다. 게이머는 특수부대원처럼 세계를 지킨다는 명목도 없이 주어진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조작한다. 밖에 명령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엔 복종하는 사람이 있고 둘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스플린터 셀: 블랙리스트>의 하이라이트를 보자. 테러리스트들은 마침내 미국 부통령을 사로잡았고 그를 고문해 기밀을 알아내려 한다. 부통령의 인내심은 바닥났기에 기밀 누출과 그에 따른 민간인의 희생은 시간문제다. 이때 캐릭터이자 특수부대원 브릭스는 궁여지책으로 부통령을 인질로 삼고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눠 테러리스트들과 대치하지만 상황은 녹록잖다. 테러리스트들은 곧 브릭스를 죽이고 다시 부통령을 고문할 것 같다. 그러자 브릭스가 결단을 내리고, 그 순간, 게임은 화면의 절반을 가리는 “다섯 번째 자유를 행사하라”는 자막을 띄워 게이머에게 할당된 버튼을 누르라한다. 그렇게 게이머가 버튼을 누르자 조작된 브릭스는 부통령의 목을 꺾어 죽인다.


브릭스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몰랐던 게이머는 마찬가지인 테러리스트만큼 당황한다.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모든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로웠던 군인은 그런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자 질서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을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죽였다. 그러나 게이머가 당황한 이유는 충격적인 이야기에만 있지 않다. 생각해 보라. 방금 누가 명령했고 누가 복종했는가? 누가 누구에게 다섯 번째 자유를 행사하라고 명령했는가? [각주01]




정리 삼아 주장을 요약, 표명하자: 게이머들은 게임의 명령·조작으로 작동하는 동시에 그 게임을 조작하며 이것이 게이머의 자율·다섯 번째 자유이다. 이것이 자율 속에서 일치한 두 operate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한다면 비디오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이번에도 현실의 예를 들어보자면, 넛지나 인센티브를 언급하는 사람들보다도 진일보한 경영자들, 소위 자기경영자들을 떠올려보라. 왜 직장생활 열심히 하며 커리어 개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나 그와 비슷한 사람 주변에 하나는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주어진 배열이 직장생활이나 본인의 생애주기 또는 포괄적으로 봤을 때 자신의 삶이라 한다면, 그들은 그 배열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삶을 통제·조작하려 한다. 그런데 당연히 그들의 그런 노력은 배열의 인센티브를 따르는 행동이란 점에서 작동이기도 하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자기경영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 즐긴다는 점이다. 그들은 제 삶의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면, 삶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삶과 협력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동하며 조작하는 자는 자신이 속한 배열과 동등하다. 게임의 규칙을 아는 그는 배열에 일방적으로 속해있지 않기에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이들과 다르다. 그들은 잠잘 시간에 다른 배열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기성의 배열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창조하는 사람을, 그리고 그런 창조를 돕는 영화를 위협이라 인식할 것이다. 서툶과 피곤은 개선되어야 하고 모든 일꾼은 그냥 작동하는 것으론 부족하고 잘 작동해야 하기에, 비행기 승무원의 고유성이나 어떤 일꾼의 멈춘 몸짓마저 그들에겐 위협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 비디오게임이 자기경영자에 호응해 영상을 보는 사람들 중 일부를 게이머로 만들었다. 영화관에서 사람을 빼온 비디오게임은 다른 방식으로 영상을 대하는 사람·게이머에게 자율을 줘 더 이상 영상을 보며 가만히 있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모니터를 보며 손을 놀리는 자·누군가는 창조에 썼던 손을 다른 데 쓰는 자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VR에서 분명해진다.






3. VR, 신체강탈자의 침입

VR을 사용해보지 않았거나 미술관이나 그와 유사한 장소에서만 사용해 보았을 사람이 많겠다. 그러니 또 쉬운 납득을 위해 이번엔 상상을 요청하겠다.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에서 시계를 더 돌려, 스스로가 2021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당시 게이머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게임을 하다 보니 VR에 관심이 생겨 당시 출시한 VR기기 히트작 오큘러스 퀘스트2를 구매했다. 이틀 만에 배송 온 물품의 포장지를 뜯고 HMD[각주02]를 꺼내 뒤집어쓰니 맹인이 된 것만 같고, 전원이 들어오자 눈앞에 펼쳐진 맹인의 세계에 감탄한다. 맹목(盲目)적으로, 맹인(盲)의 눈(目)으로 모니터를 보며 게임을 하던 때와 격세지감이다.


그런데 당신은 문득 당신의 맹인 세계 속 손을 본다. 연신 쥐락펴락하며, 그 손은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을 한 덩어리로 인식하는 손임을, 그렇게 작동하는 손임을 파악했다. 새삼 옛날 게임 캐릭터들 또한 이런 손을 가지고 있었음이 떠오르고, 모니터로 쳐다만 보던 캐릭터의 신체를 강탈한 셈임을 깨닫자 쓴웃음이 나온다.[각주03] 그리고 신체강탈자로서 이번엔 이런저런 몸짓을 해보며 당신은 게이머가 보다 선명히 두 operate를 일치시켰음을, 세계 속에서 세계를 조작하는 동시에 세계 덕분에 작동하는 몸짓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자각했다. 한 발 더 마리오에 다가간 것이다.


그런데 영상매체 분야에서 100년 조금 넘게 걸린 이런 선명한 일치에 대가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창조를 애호하던 평론가에게 반발해 다른 방식으로 영상을 대한 게이머는 무엇을 지불했는가? 난 세 손가락 손에 답이 있다고 본다. 단적으로 묻자. 그 손은 창조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그 손이 하는 조작(造作, create)은 조작(操作, operate)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작동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이는 두 operate를 보다 강하게 일치시키기 위해 두 조작까지 일치시켰다. 더 이상 멈출 필요가 없는 이들은 창조의 가능성을 지불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확실히 평론가와 다르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먼이라 부르겠다.




그럼 포스트휴먼은 VR 세계에서 무엇을 보는가? VR 작품 <The Night Cafe>(Borrowed Light Studios, 2016, 이하 <밤의 카페>)를 보자. 소프트웨어를 틀자 맹인은 어떤 카페에서 눈을 뜨고 곧 자신이 고흐의 신체를 빼앗았음을 깨닫는다. 눈에 비치는 세계가 고흐의 그림체로 이루어져있고 볼 수 있는 사물이 고흐 작품에 등장한 것이라 그렇다. 물론 VR 세계 속을 걸어 다니다 보면 앉아있는 고흐를 볼 수 있긴 하지만, 무시하자. 어쨌든 맹인은 고흐의 눈으로 천천히 카페를 구경하다 창밖을 내다본다. 그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의 밤하늘이 펼쳐지고 포스트휴먼은 감동받는다.


그런데, 감동은 차치하고, 우리는 <밤의 카페>가 어떤 이상한 고정관념을 실현시켰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고정관념은 모든 예술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진다는 관념, 그러니까,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별이 빛나는 밤>처럼 봐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렇게 그렸다는 생각이다. 우린 그 편견을 ““몬드리안도 자신의 눈에 비치는 세계”를 그린 것인가?”[출처04]라는 다소 극단적인 질문으로 우습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습든 말든, 그것이 바로 포스트휴먼들이 바라는 세계다. 이 고정관념은 모두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게 각자에게 있어 전부라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든 손을 쓰는 사람은 창조하는 사람, 안과 밖을 재분별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보이는 것·자신 밖에 있는 세계를 종이에 옮겨 그리거나 적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관념 속에서 인간은 안·자신과 밖·세계를 분별해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애당초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이미 분별되어 있는 세계는 손 쓸 수 없으며, 그 세계는 맹인들은 맹인이 아닌 사람들보다 각자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 것이란 편견에 상응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밤의 카페>엔 밤이 없다. 이에 포스트휴먼은 카페 창밖에서 밤과 별을 볼 수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맹인의 눈엔 고니가 창 밖에서 본 바가 보이지 않는다.






4. 현실

난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나가면서 한 말, “영화는 노쇠한 인류에게 어울리는 표현수단”, “영화는 우리 문명의 황혼의 표현”[출처05]을 싫어했다. 사실이라면 약 100년 전에 황혼이 시작되었으니 곧 망한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영화와 함께 나타난 작동에 저항하는 인간이 영상매체의 역사를 통과하며 잘 작동하는 인간에 쪽수로 밀리는 모습을 보니 망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에서 유를 조작(造作)함”이 아닌 “주어진 것들을 독특하게 배치함”을 사람들이 창조라 여길 때부터 사태가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해야 했을까? 물론 그렇다고 글 끝에 와서 “다 끝났다!”라 비관은 안 할 것이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평론가 된 입장에서 영화관, 정지한 몸짓, 창조, 손을 긍정하며 그것들을 되살릴 필요를 역설하기? 내나 하는 말이라 재미없지만 필요한 말이긴 할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비유컨대 좌뇌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뇌는 다른 것에 진심이다. 우뇌가 속삭인다. 이 사달은 관객 중 평론가와 일꾼 중 고니만을 신경 쓰다 발생했다고 말이다. 말을 지어내자면, 영화 관객 중 유별난 평론가가 항상 영상 이야기의 주축이었고 그래서 다들 작동 마디의 영감만 주야장천 떠들다 포스트휴먼이 영화관 밖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를 알지 못해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다. 우뇌가 계속 떠벌리길 따라서 우린 작동 사이 영감이란 틀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새로운 영상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이유를 말해보자면, 우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뜬 눈으로 꿈꾸는 자들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달리 말해 창조할 줄 아는 사람이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란 말을 정말로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평론가가 아닌 관객과 고니가 아닌 일꾼은 못난 사람이라고, 그들에겐 세상이 없다고 믿고 있는가? 한 번이라도 왜 세상이 꿈꾸는 사람만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없는가? [각주04]




2021년 세 손가락 맹인이 되어 본 날 위 질문이 우뇌에 박혔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좌뇌와 우뇌의 분열 또는 영화관 안과 영화관 밖의 분열로 귀결된다. 이 분열은 사람들이 점점 영화관에 오지 않는 요즘, 다른 방식으로 영상을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에 알 맞는 분열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말한 몸짓 중 어떤 몸짓도 멈추거나 어떤 몸짓에서도 눈 돌릴 때가 아니다. 우리가 포스트휴먼까지 포함한 영상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카페 창밖의 별은 우릴 기다릴 것이다.






[출처01]: 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양창렬 번역, 2009, 난장, p.59-p.72

[출처02]: 자크 랑시에르, 『프롤레타리아의 밤』, 문학동네, 2021

[출처03]: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번역, 2022, 워크롬프레스, p.38-p.39, 문장을 수정/추가/재배치함.


[각주01]: 이 이야기를 <더 스탠리 패러블>(데이비 리든, 2011)이란 비디오게임으로도 해보자.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더 스탠리 패러블>은 게임의 게이머에 대한 명령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시작했을 때 게이머는 처음 몇 번은 내레이션의 말에 따라 행동한다. 화면에 A와 B라는 문이 있고 내레이션이 “스탠리는 A 문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 따라 행동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런 명령이 노골적이게 느껴지자, 또는 <더 스탠리 패러블>이 어떤 비디오게임인지에 대한 감을 잡자, 게이머는 청개구리 행동을 한다. “그는 복도를 따라 나아갔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면 일부러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보는 것이다. 이 지점부터 게이머는 명령을 어겼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더 스탠리 패러블>을 한다. 물론, 난 이 말이 모든 비디오게임에 통용된다고 믿는데, 게이머가 비디오게임 세계 속에서 멋대로 행동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더 스탠리 패러블>의 경우 게이머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도 그 행동에 해당하는 다음 내레이션이 진행된다. 그렇기에 이 게임은 비디오게임에 대한 비디오게임이라 할 만하다.


[각주02]: 헤드(H) 마운트(M) 디스플레이(D). VR을 할 때 머리에 쓰는 그것.

[각주03]: 옛날 캐릭터가 이런 형상을 한 이유는 구동 기기의 성능이 열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캐릭터들이 주로 취하는 몸짓인 버튼 누르기, 물건 잡기, 그리고 무엇보다 총 쏘기 등에는 개별 중지, 약지, 소지가 불필요했다는 이유도 있다. 즉 옛날 캐릭터의 형상은 작동에 적합하게 설계된 것이었다.


[출처04]: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번역, 2022, 갈무리, p.275, 문장을 수정함

[출처05]: 『영화의 맨살』, 박창학 번역, 2015, 이모션북스, p.440, 문장을 수정함


[각주04]: 내가 철학적으로 세련된 사람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고니를 언급한 랑시에르 식으로도 말해보자. 랑시에르는 자신의 몫을 요구하지 않던 자가 몫 요구하는 순간 재분배가 일어난다고 했고 그 사태와 사태 이후를 중시했다. 반문은 이렇다. 재분배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 중에서도 작동 사이 영감과 그것에서 비롯된 창조가 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알아도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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