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술, 평론, 정치, 가짜뉴스, 음모론, 그리고 환상
0.1. 본 글은 25년 1월 탄핵 정국부터 5월까지 쓰인 글이며 ①이 영상매체와 몸짓으로 말했던 바를 현실 정치와 보기(seeing)로 말한다. ①을 읽어야만 쉽게 납득되는 지점이 있으니 ①을 읽지 않았다면 읽는 것을 추천한다.
0.2. 출처와 각주는 브라우저의 찾기 기능(Ctrl + F)을 이용하면 된다. 출처01을 보고 싶다면 Ctrl + F 후 "출처01"이라 검색하는 식으로 말이다.
0.3. PC로 보는 걸 추천한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과열된 생각이 마음을 질주한다. 이 모든 게 멈추길 바라지만 손쓸 수가 없다.
- <마리우폴에서의 20일>(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2023, 이하 <마리우폴>)의 열여섯 번째 밤에 있던 독백 내레이션
<사랑은 낙엽을 타고>(아키 카우리스마키, 2023, 이하 <낙엽>)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은유하는 영화가 아니다. 또한 연락이 두절된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어색하다. 남녀는 계속 스위치처럼 엇갈린다. … 죽을 뻔했던 남자는 기적적으로 깨어난다. … 이러한 기적은 이 커플이 이뤄지길 바라는, 나아가 전쟁이 멈추기를 바라는 우리 마음의 현현이다.
- 오진우,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세계: 절망에서 희망으로」, 『크리틱b vol.12』, 부산영화평론가협회, 2024, p.130-p.131, 문장을 수정함
두 인용문을 말한 두 사람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계됐다는 점 외에도 유사점이 있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주지하듯 영화감독 체르노우는 <마리우폴>의 열여섯 번째 밤에 러시아군의 위협과 러시아 측의 가짜뉴스 주장으로 좌절했다. 감독은 2022년 마리우폴 포위전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폭격당한 제3병원 산부인과에서 골반이 파괴된 산모와 마리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산모의 사진을 찍었으나, 러시아는 그 사진은 가짜뉴스이고 자신들은 국제인도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반박하며 감독을 거짓말쟁이로 몰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르노우는 산부인과 사진으로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고 그 행동이 보기(seeing)였다면 어떤 보기였는가?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려 했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제시(提示)하려 했다고 답해보자. 감독은 마리우폴이 고립되어 바깥의 누구도 도시의 사정을 알 수 없게 되자, 즉 마리우폴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런 도시를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제3병원의 경우로 한정해서 말해보자면 체르노우는 보이지 않을 뻔했던 산부인과 폭격이란 사건을 사진으로 끌어내(提) 보였(示)으나, 러시아는 사진의 근거였던 폭격은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해 제시를 부정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자. 제시에 실패한 체르노우는 그렇담 좌절감이 깃든 열여섯 번째 밤에 어떤 행동을 했는가? 위 내레이션의 일부를 언급하며 말해보자면 그는 낮의 막간인 밤에 기대, 즉 세상을 볼 수 없는 어둠에 기대 보이지 않는 생각이 마음을 질주하게 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소 억지스럽지만, 그때 그의 행동이 보기라면 체르노우는 보이는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恝) 여긴(視) 후 보이지 않는 상념에 잠겼다고, 보이는 것들을 괄시(恝視)한 후 그것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것(자신의 상념)을 봤다고 할 수 있다.
찍은 사진이 예상 못한 반응을 일으키자 생각이 많아진 남자. 그리고 <마리우폴>은 그 생각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정석적인 다큐멘터리처럼 전쟁 이미지를 적당한 지속시간으로 보여주던 영화는 열여섯 번째 밤이 오자 전쟁과 관련 있는 이미지와 없는 이미지를 두서없이 짧게 나열한다. 관객은 위 내레이션과 함께 밤하늘을 가르는 예광탄, 하늘을 나는 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와 빗물, 우는 사람들, 그네의 그림자 등이 삽시간에 지나가는 걸 본다.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흔히 사용되는 이러한 작법, 이미지·보이는 것을 충돌시켜 그것들 사이에 대한 감각을 극대화하는 작법은 그 사이에서 체르노우가 막간에 느꼈을 보이지 않는 상념을 관객과 공유하려 한다. [각주01]
… 그것은 근거와 적법성 부족이란 자신의 한계에 맞서 오직 단편적 경향, 파괴된 형식과 허구와 성찰의 뒤섞임 속에서 구현된다. [출처01]
요컨대 세상을 괄시한 체르노우의 보이지 않는 상념을 열여섯 번째 밤은 보이는 이미지에 의거해 관객과 공유하려 했으며 그에 따라 관객은 제시된 이미지들을 괄시해 이미지 사이를 보았다. 두 번째 인용문을 쓴 평론가와 그의 독자도 비슷하다. 평론가가 언급한 <낙엽>은 한 커플과 그 커플과는 무관한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들려주는 라디오가 등장하는 영화다. 다시 말해 여기서 보이는 건 남녀와 라디오이고 둘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無). 그리고 평론가도 이를 알아 인용문 서두에선 <낙엽>이 전쟁을 은유한 영화가 아니라고 했으나, 정작 끝에 가선 사이에 무(無)가 있는 둘을 엮어 <낙엽>이 전쟁이 멈추길 바라는 우리 마음을 현현했다는 근거 없는 단언을 했다.
평론가가 왜 이랬는지 추측해 보자. 내 생각에 그는 남녀와 라디오란 보이는 것들 사이에 무(無) 대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 그 무언가를 상상하기 시작했고, 그 상상의 끝에 근거 없는 단언을 해 무를 메꾸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평론가는, 열여섯 번째 밤이 보이지 않는 감독의 상념을 나타내기 위해 보이는 이미지에 의거한 것과 유사하게, 보이지 않는 상상을 지어내려 나름의 보이는 이유를 가져다 댔다. 해당 평론 전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영화와 각종 영화 책이 그 이유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단언이 엄밀히 따졌을 땐 근거가 없고 평론가 자신에게만 적법한 단상·단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결국은, <낙엽>에서 보이는 건 이유 없이 평행선을 이루는 남녀와 라디오 아닌가?
하지만 그의 상상이 망상이라고 깎아내릴 순 없다. 적어도 평론가는 자신의 단편이 자신에게만 적법한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나의 마음의 현현이 아닌 우리 마음의 현현이라 했다. 우리를 언급하며 열여섯 번째 밤이 관객에게 한 것과 같이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의 상상을 공유하려고, 같이 남녀와 라디오 사이를 괄시하자고 청유한 것이다.
상상의 나라로의 초대장을 뿌린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런데, 생각하기에 이 초대장을 제대로 수신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추측해 보자면 그 수신자는 평론가처럼 <낙엽>에서 무(無)를 감각한 누군가, 또는 어쩌면 굳이 <낙엽>이 아니더라도 어떤 영화를 보다 이미지·보이는 것의 사이를 느껴본 적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평론가는 그 누군가와 함께 근거와 적법성은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맞아, 그 영화에 그런 게 있지.”란 말로 서로의 상상을 나누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게 제시라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건 괄시다. 그리고 근거와 적법성이 부족한 후자는 상상과 연관됐다는 점에서 사적인 것이지만 남과 공유된다는 점에서 공적인 것이기도 하다. 한편 한 영화와 한 영화평론을 살핀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반화한다면 영화관과 영화평론 분야는 그 외 장소나 분야보단 괄시가 일어나기 좋은 환경이다. 감독과 평론가의 의도가 성공했다면 감독과 관객, 평론가와 독자 모두가 괄시를 통한 상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상이 공유되는 모습을 말하고 보니 1.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데가 마음에 걸린다. 혹시 자신들은 국제인도법에 적법하며 체르노우는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한 러시아가 그런 주장을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만약 그 행동이 보기였다면 어떤 보기였는지를 기억하는가? 맞다. <마리우폴>에 나왔듯 러시아는 산부인과 사진의 피사체 중 하나인 마리아나가 전쟁 전 뷰티 인플루언서로 활동했던 SNS 사진을 공개하며, 그녀가 메이크업 즉 가장에 능하니 산부인과 폭격은 우크라이나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암시(暗示)했다.
암시. 이 보기는 무엇인가? 우선 그건 제시가 아니다. 제3병원 일은 조작됐다는 주장과 그 근거인 마리아나의 SNS 사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마리아나가 뷰티 인플루언서였다는 사실이 조작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우린 당연히 안다. 적어도 체르노우가 제시했던 산부인과 사진·보이는 것과 그 사진의 근거였던 산부인과에서 있었던 일·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보다 러시아의 그것이 약함을 안다.
그런데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음과 근거가 될 수 없음이란 말을 해놓고 보니, 암시가 괄시랑은 친해 보인다. 물론 둘이 아주 같지는 않을 테니 러시아의 보기를 이렇게 풀며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마리아나의 SNS 사진이 제시될 수 있는 게 아님을 안 러시아는, 대신 그 사진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영역(暗)에 두고 넌지시 보라(示)고 요청했다고 말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제시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보자고 한 것인데, 만약 방금 설명이 애매하게 느껴졌다면 다음과 같은 직접적인 설명도 가능하겠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민망하지만 굳이 문자로 적어보자면, “전부 우크라이나가 나쁘다.”란 말을 하고는 싶은데 대놓고·보이게 말하지는 못하겠으니 이 말을 암시하려 마리아나의 SNS 사진을 암시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보기가 현실에 일으킨 파장을 우린 안다. 암시를 들은 러시아 지지자들은, 평론가의 괄시에 따라 보이는 것들 사이를 괄시하며 상상을 행했던 어떤 독자들과 유사하게, 체르노우와 마리아나가 세트장에서 전쟁을 연출하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렇게 러시아의 주장과 마리아나의 SNS 사진 사이의 무(無)를 메꿔 체르노우와 마리아나를 비방했다. 나아가 우린 이런 음모론자들의 가짜뉴스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다고 반박해 봤자 소용이 없음도 안다. 반박이 효과적이었으면 세상에 제시하려고 했던 체르노우가 왜 세상을 괄시 후 상상에 빠졌겠는가?
이즈음에서 계속 우크라이나에만 머물러 있기도 지겨우니 세계 각국을 돌며 암시를 더욱 알아가야겠다. 그러니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사례, 본인이 음모론자이거나 음모론자를 대변하게 된 대리인과 법관의 대화를 담은 유튜브 영상[출처02]을 보라. 비상계엄을 논의하는 자리·판·보이는 영역에서 대리인은 장광설을 하다 뜬금없이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꺼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십시오.…”.
그런데, 뭘 보라는 건가? 보라는 대로 봤는데 체르노우는커녕 마리우폴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헤아려보면 어떤 극단적인 대립을 묘사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비상계엄을 논의하는 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지간하면 보이는 게 아니다. 즉 대리인은, 여기서도 민망하지만 굳이 문자로 적어보자면, “전부 야당이 나쁘다.”나 그와 유사한 말을 결론적으로 하고는 싶은데 대놓고 하지는 않고 대신 그 말을 암시하며 상상을 공유하려 했다.
그런데 암시를 통한 상상 공유는 특히나 법관 앞에서 할 행동이 아니다. 법관은 말 그대로 법관이니 적법함을, 어떤 보이는 기준에 부합함을 중시할 것이요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지금 보이는 판(비상계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보자고 청해도 들어줄 리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제시가 괄시나 암시와 달리 근거와 적법성이 충분한 보기이고 또 그런 보기를 주로 하는 사람을 제시자라 한다면, 법관은 체르노우의 사진만큼 근거가 있고 또 보이는 판에 부합하는 것만 취급하는 제시자이기에 암시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제시자는 자기들은 적법하다는 러시아의 주장만큼 부적법한 대리인의 말을 듣다가 일방적으로 끊어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린다: 영화관에선 괄시와 눌리던 제시가 영화관 밖에선 암시에게 치이고 있다는 사실.
환상은 사람이 현실을 피해 바다처럼 광대한 어딘가로 향하게 하며 현실을 사적으로 변용하게 만든다. …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 정치가 우리를 비인간적인 방식과 전문가의 방식으로 돌보니 우리가 환상으로 도망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사태다. 그렇게 환상과 정치는 서로를 죽이려 든다. 이 양극은 허무주의의 두 존재 방식이요, 간혹 그럴듯하게 '제도의 실패'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출처03]
위 인용문을 읽으며 나는 뜬금없게도 전설적인 그림 《올랭피아》(에두아르 마네, 1863)를 두고 남성 미술평론가들이 한 일을 떠올린다. 《올랭피아》는 누드화의 관습을 따르는 척했지만, 즉 기준에 적법한 누드화인 척했지만 다른 누드화와 달랐다. 평론가들은 성적으로 묘사된 그림·보이는 것 속에 있는 여성이 성적이지 않다고 보았고 이는 달리 말해 보이는 것 너머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無)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델이 알고 보니 매춘부였다느니, 그녀의 시선이 어떻다느니, 하녀가 흑인인 게 문제이니 하며 보이는 것에 의거해 무(無)를 메꿨다. 적법성을 가져 보이는 대로 보인듯한 그림을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사적으로 변용하기. 그렇게 해서 남성 평론가들의 상상은 ‘남성 관객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누드화를 통하여 은밀히 충족하던 성욕을 관습을 따르는 척하며 조롱하는 작품’이란 의미를 《올랭피아》에 부여했다.
뜬금없는 소린 일단 이 정도면 됐고, 이번엔 미국으로 가보자. 여기도 대통령이 논란인데, 우린 그 대통령이 무엇을 하려고 하며 그를 지지한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 법과 관습을 뜯어고치려고 하며 그러기 위해 가짜뉴스를 입에 달고 사는 현 미국 대통령은 소설 『힐빌리의 노래』에 등장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지지를 한 축으로 삼아 당선됐다. 그리고 우린 그에 대항해 미국의 정치인과 법관이 무엇을 하는지도 안다. 그들은 소송[출처04]과 판결[출처05]로 법대로 하자고, 법전에 보이는 대로 하자고 맞불을 놓고 있다.
보이지 않는 자들을 등에 업고 법·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암시 대통령과 그가 정치를 망치고 있으니 보이는 대로 하자고 외치는 미국의 정치인과 법관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자. 정치판에서 보이지 않는 일반인들이 투표로 정치인들을 정치판에 보이게 해줬다는 점에서 정치인들 또한 제시자라면, 미국 정치인과 법관은 제시자로서 잘못된 일을 하고 있고 오히려 트럼프야말로 제시자로서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봤을 때, 정치인이 할 일 중 하나는 『힐빌리의 노래』에 등장한 사람들, 자기 생각·보이지 않는 것을 정치판의 기준에 맞게 보일 줄 모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의 목소리를 정치판에 적법하게 보이는 것이지, 그들이 근거 없는 말을 적법하지 않게 한다고 맞서 싸우는 게 아니다.
물론 방금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현 미국 대통령은 보이지 않는 자들을 근거로 삼고 있긴 하지만 관습과 과격하게 충돌한다는 점에서 적법하지는 않다. 나아가 법관은 말 그대로 법관이니 법대로 하자고 당연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이는 대로 하자는 지양해야 하는 행동이라고 말해보자. 러시아 지지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려 했던 체르노우와 반대 방향으로 가서 그를 무력화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그렇게 암시가 보이지 않는 영역을 중시해 제시를 망쳤고 망치려고 들고 있다면, 오히려 더더욱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정치가 보존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지 않고 제시를 팽개친 후 보이는 대로만 하자고 외쳐 버리면 암시에 호응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림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평이하게 말하면 사람들을 무시 말고 대화와 소통을 해야 한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싸우느라 사람들의 목소리는 무시하고 상호 간의 대화는 포기했던 정치인들의 나라에 사는 입장에서, 나아가 그중 한 측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법대로 하자며 탄핵안을 내놓으니 다른 측에선 법에 정해진 대통령의 권리랍시고 거부권을 행사했던 나라에 사는 입장에서, 더불어 거기에 호응해 보이지 않는 자들이 보이는 자를 뽑는 선거에 법관이 판결로 끼어들었던 나라에 사는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데 효과적이겠다 싶으니 러시아나 대리인이 그랬듯 무시당한 자들의 좌절감과 분노를 암시로 오도했던 파렴치한들의 나라에 사는 입장에서, 먼 나라가 이웃나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또 뜬금없이 굴어보자. 우린 남성 미술평론가들이 보이는 대로 보인《올랭피아》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담 보이는 대로 하자는 이런 현실을 두고 상상을 하는 이는 없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올랭피아》를 괄시한 남성 평론가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니 하나하나 조건을 따져보자면, 우선 《올랭피아》와 여타 누드화가 다른 점을 알아야 하니 평소에 누드화를 많이 본 남성일 것 같고, 그러면서 누드화를 보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예술적인 목적이 있어서라고 말할 것 같은 남성이요, 마지막으로 《올랭피아》의 다른 점을 글로 쓸 줄 아는 사람일 테니 식자층에 해당하는 남성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누드화를 챙겨 보는 주제에 교양은 있는 음흉한(sly) 남성이다. 그런데, 이제 와 말하지만, 다른 부류도 있다. 마치 영화평론가의 근거 없는 단언을 읽고 “맞아, 그 영화에 그런 게 있지.”라 답한 어떤 관객처럼, 음흉한 미술평론가의 의견을 듣고 “맞아, 《올랭피아》가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라 답하며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안다는 듯이 굴었을(sly) 또 다른 교양 있는 누드화 마니아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란 언젠가 이해하는 사람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몽상이나 아는 사람끼리 모여 고개를 끄덕이는 자리가 아닙니다. 또 작품의 바른 이해에 기초한 것도 아닙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알게 되는 순간은 살아있는 현재를 뒤흔드는 아주 현실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영화에는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어느 순간에 사건처럼 일어납니다. 그것을 사건으로 수용할지 아닌지는 재능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출처06]
조건을 밝히고 보니 상식적인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저런 조건이나 교양을 갖추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난 그 교양 없는 사람들, 《올랭피아》를 별 수 없이 보이는 대로 볼 사람들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올랭피아》를 그냥 누드화로 보고 <낙엽>의 평론가가 자기 상상을 지어내기 위해 갖다 붙인 말에 별 공감을 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낄 사람들 말이다.
물론 나도 믿는다. 현실적인 체험이 조건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믿는다. 영화를 많이 보았든 보지 않았든, 누구나 이미지·보이는 것 사이에서, 설령 그 영화가 <낙엽>처럼 괄시를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현실적인 체험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건으로 수용하는 것, 보이지 않는 환상을 보이는 것에 의거해서 풀어보는 행위는 재능의 문제라 아무나 못 한다.
그렇담 재능이 없어 보이는 대로 하자는 세상에 실망과 소외감을 느낄 뿐인 자들이, 그럼에도 상상을 한다면 그들은 어떤 환상으로 도망치는가? 우크라이나로 돌아오자. 마리우폴은 함락됐고 2022년 10월이 됐다. 그리고 도시를 다시 찾은 마리아나는 무너진 병원을 뒤로한 영상을 인스타그램[출처07]에 게재했다. BBC와의 인터뷰에서 “병원 앞 크레이터를 눈으로 보진 못했고 체르노우가 찍은 영상으로 봤어요. 그런데 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둘 중 누구도 탓하지 못하겠네요. 폭탄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지는 못했거든요.”[출처08]라 말한 그녀는 뒤늦게라도 자신이 본 바를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영상을 보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배경의 병원이 그녀가 있었고 우리가 <마리우폴>에서 봤던 제3병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 찾아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자신 뒤에 있는 제1병원은 제3병원과 달리 크게 파괴됐다며, 영상에선 보이지 않는 제3병원을 암시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 그녀는 러시아의 암시에 동조하고 있다.[각주02] 그러니 이번엔 러시아 지지자들과 배턴 터치한 우크라이나 지지자들이 댓글에 몰려들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이번엔 정말로 연기를 하고 있다며 비난했고, 제시되어보려 했던 제3병원의 마리아나를 부정한 암시하는 제1병원의 마리아나를 화형하려 들었다.
꼭 파괴된 제1병원을 가장 잘 보여줄 법한 위치를 선정해 영상을 촬영한 듯한 그녀. 하지만 우리까지 비난에 동조하지는 말자. 실제로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전쟁으로 인한 정보의 불확실함과 그 불확실함에서 비롯된 추측의 양산으로 러시아의 잘못이 아닌 것까지 러시아의 잘못으로 여겨지기도 한 것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평범하게 살던 그녀는 갑자기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정보 전쟁이란 명목 아래 양 국가의 선전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셈 아닌가?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치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둘 중 하나를 별 수 없이 또는 둘 중 하나에 동조해 선택했던 우리와 유사하게, 그녀는 두 국가 중 하나를 택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어쨌건, 보기를 이야기해야 하니 넘어가자. 우리는 그녀의 암시와 그것과 연관된 반응을 보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괄시를 통한 상상이 보이는 것에 의거해 풀이된다면 암시를 통한 상상은 보여야만 하는 것을 준거 삼아 풀이된다는 사실 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앞서 우리는 러시아의 암시를 들은 러시아 지지자들이 체르노우가 비참함을 연출하는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라 했다. 그 상상은 “전부 우크라이나가 나쁘다.”란 보여야만 하는 것, 그러나 보이지는 않는 것을 머릿속에 준거로서 고정시킨 암시자들이 마리아나의 SNS 사진·보이는 것을 그 준거에 끼워 맞추기 위해 필요한 접착제였던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식으로 끝없이 보이지 않는 영역을 지향하는 암시가 '보이는 대로 하자'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세상을 수렁에 빠뜨리고 있음 또한 알고 있다.
동시에 암시는 한계가 없는 도피다. “전부 우크라이나가 나쁘다.”를 암시하기 위해 마리아나의 SNS 사진을 써먹었다가 효력이 다하자 제1병원 마리아나의 영상을 써먹은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말(“전부 우크라이나가 나쁘다.”)은 정해져 있으니 끼워 맞추기만 하면 되는 암시는 바로 그 점에서 한계가 없다. 그리고 그 한계는 어쩌면 영화평론가가 보이는 것에 의거해서 제 상상을 지어낼 수밖에 없기에 넘어서지 못하고 돌아오고야 마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또는 말을 지어내기 전까진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기에 평론이 가지고야 마는 연극적이고 임의적이며 임시적인 특성, 그 한계일지도 모른다. 주로 미(美)라는 개념 아래 평론가들에 의해 상찬 되던 환상으로 도피한 자가 현실로 복귀하는 도식, 세계로부터 소외된 자가 세계에 제 스스로의 자리를 임시방편으로 마련해 돌아오는 도식을, 그러나 암시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美) 대신 뷰티 인플루언서를 위시한 할 말이 정해진 자들은 계속 환상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도망치고 있다. 세상에 실망한 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소외를 완성한다.
이미지의 특이한 미(美)의 양태는 형태적 광휘를 환기시킨다. … 플라톤은 주어진 존재와 이데아의 관계를 분유(分有, 몫을 나누어 가짐, participation)라 규정한다. … 스크린에 투사되는 사물은 본질적으로 반성적이고, 그것은 자기언급으로 일어나며, 스스로의 물리적 기원을 비춘다. 그것들의 현전은 그것들의 부재를 언급하고 그것들의 위치는 다른 장소를 가리킨다. 그런 탓에 만약 자기현현이 가능한 사물에 비추어 인류가 무의미로 환원된다고 한다면, 혹은 인류가 허무로서의 미(美)라는 사실에 짓눌린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세계의 지배권을 손에 넣으려 해서, 혹은 세계를 미학화하려고 해서(이는 영화 외 예술에도 내재하는 유혹이다.) 그들이 세계에 참여(participation)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출처09]
여담으로 근거와 적법성을 언급한 책 『영화의 고고학』은, 환상이란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우리가 한 이야기를 환상과 관련된 역사로 설명한다. 1800년대 중반에 사진 등의 발명으로 역사는 사실적이고 설명적인 현재가 되었고 그렇게 삶의 마디를 이루던 환상은 그 마디와 함께 변형됐으며 영화가 그 사태와 연관되어 있다는 둥. 그리고 저명한 철학자 랑시에르는, 제시와 괄시란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그 1800년대 중반 제시가 만연한 세상에 도전했으나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괄시자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공상을 우리가 배워야 하며[출처10] 다른 책에선 영화가 여기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영화평론가들은 언급한 책과 그 책과 유사한 의견에 따라, 조어를 만들자면, '영화 부흥회 서사'를 따르게 됐다. 그들은 약 200년 전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한 환상과 괄시가 다시 영화관 밖에서 기를 펴 제시를 극복한 세상이 올 것이라 자기들끼리 믿었으며 자신들의 일이 그것을 위한 과정이라 보았다.
정리하자면 약 200년 전에 제시한테 져서 영화관으로 도망친 괄시는 ‘예술을 통한 만인의 해방’이나 유사한 구호를 떠들며 언젠가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언젠간 제시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괄시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패배 후 영화관에 틀어박힌 괄시가 안타까웠는지 친구 암시가 최근 영화관 밖에 나타나 제시를 죽이려 들고 있지 않은가. sly한 평론가들이 무턱대고 입에 올린 그 만인은, 만인을 언급해 놓곤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떠드는 교양인들에게 질려서인지, 제 나름의 교양 없는 상상을 무기로 삼아 마침내 휘두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정치를 죽이는 건 영화에서 비롯된 환상이 아니게 되겠다.
그리고 아래에는 한 사진이 있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살해당한 마리우폴 극장을 감싼 저 막은 러시아의 부적법을 가린다. 그렇게 이 사진은 러시아와 마리아나가 부정한 <마리우폴>이 제시한 바를, 그럼에도 봤다고 믿는 우리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제시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저 막 너머에 있었을 일을 영화로 목격했다고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자들을 등에 업고 귀환한 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막을 내리려 하고 있고, 법관 앞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입에 올린 대리인이 변호하고자 했던 사람은 물러난 모양이다.
물론 이렇게 끝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막간일지도 모른다. 잠시 소강상태일 뿐이지 다음엔 더 큰 파도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라리 사진이 건넨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렇게 답하자. 맞다. 우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말인즉슨 우리는 우리의 보기들이 하나씩 하자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러니 막간을 이용해 보기들을 되짚어볼 시간을 가지겠다고, 그렇게 말하자. 베일에 싸인 도시는 환상이 돌아온 지금 앞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 묻고 있다.
[각주01]: 지속시간이 짧은 영상들을 충돌시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작법이 무엇인지 짧은 예시로 알고 싶다면 조회수 약 8400만 회를 기록한 다음 인스타그램 영상을 보라: https://www.instagram.com/reel/C6v7A6FSLQ-/?utm_source=ig_web_button_share_sheet.
인스타그램 유저들은 이 영상을 두고 " 왜 이렇게 친숙하지?"나 "나의 삶과 같아."라는, 냉정하게 따지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인터넷에 올라왔던 각종 영상을 짧게 친 후 엮은 영상이 그걸 보는 유저의 삶일 리가 없다. 적어도 난 자전거 바퀴를 이용해 공을 쏘아 올려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보이는 이미지에 주목하기가 이 영상을 보는 적절한 방식이 아님을 안다. 이 영상은 보이는 것·이미지를 충돌시켜 그것들 사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삶을 보게 만든다. 이 영상은 그런 점에서 삶은 형식 속에 담길 수 없다는 생각이나 진정한 삶은 순간에만 있다는 생각을 구현해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중요한 건 이 영상에서 우리가 각자를, 개인을 넘어선 삶을 본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보일 수는 없지만 공감할 수는 있는, 우리가 "진장한 삶"이라는 코멘트에 하트 버튼을 누르게 하는 상상적인 삶이자 공통적인 삶이다.
[출처01]: 장-뤽 고다르 , 유세프 이샤그푸르, 『영화의 고고학』, 이모션북스, 2021, p.148, 문장을 수정함
[출처02]: MBC, 「'여기서 크림반도가 왜 나와요' 듣다 못한 헌법재판관 '벌컥' [뉴스.zip/MBC뉴스]」, youtube, 25.01.17., https://www.youtube.com/watch?v=nNitxQ0d4ZY
[출처03]: 스탠리 카벨, 『눈에 비치는 세계: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성찰』, 이모션북스, 2014, p.141-p.143, 문장을 수정함
[출처04]: 가령 김유진, 「트럼프 행정명령 벌써 ‘역풍’부나…출생시민권 금지 위헌 소송」, 경향신문, 25.01.22.,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221451001
[출처05]: 가령 유투권, 「미국 법원, 트럼프 상호관세 발효에 제동...무역협상 전면 중단?」, YTN, 25.05.29., https://www.ytn.co.kr/_ln/0104_202505290901246598
[출처06]: 하스미 시게히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영화장화』, 책읽는저녘, 2018, p.280, 문장을 수정함
[출처07]: https://www.instagram.com/reel/CkOOr2ejpSj/?utm_source=ig_web_button_share_sheet, instagram, 22.10.28.
[출처08]: 「Marianna Vyshemirsky: 'My picture was used to spread lies about the war'」, BBC, 22.05.17., https://www.bbc.com/news/blogs-trending-61412773, 문장을 의역함
[각주02]: 러시아는 체르노우가 거짓말쟁이란 주장 이후 “경미하게 파괴된 제3병원과 달리 군용으로 쓰인 제1병원은 크게 파괴됐다.”는 주장을 이었다. 마리아나는 이를 되풀이한 셈이다.
[출처09]: 스탠리 카벨, 『눈에 비치는 세계: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성찰』, 이모션북스, 2014, p.16-p.17, 문장을 수정함
[출처10]: 자크 랑시에르, 『프롤레타리아의 밤』, 문학동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