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은 세계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있으며 일명 신들의 정원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서울 및 경기도와 강원도 영월에 있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조선 22대 군주 정조의 아버지인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융릉(장조)'과 그의 아들이 잠들어 있는 '건릉'에 방문을 하였다.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융ㆍ건릉'에 도착 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종합안내도를 보고 동선을 정해보았고 안내도 왼쪽에는 융ㆍ건릉에 대하여 소개를 해놓았다. 화산 자락에 자리한 융ㆍ건릉은 생각보다 훨씬 웅장해 보였다.
- 융ㆍ건릉 역사 문화관
정문을 지나면 '융ㆍ건릉' 역사 문화관이 우리를 반겨주는데 이곳에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장조)를 찾기 위한 행렬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현륭원 가는 길 - 한양에서 화성까지 행차도]당시 수도 한양에서 융릉에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그래서 정조 임금은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이용 하여 쉽게 건널 수 있었으며 이후에는 더 편안한 길을 선택하여 시흥 행궁으로 가게되었다.
정조 임금은 어렸을적 아버지를 그리워한 나머지 그의 효심이 화성 행렬도에 고스란히 나타나있으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한 효심도 지극하여 화성하면 효의 도시로 불릴만큼 정조의 넋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장조와 정조의 가계도를 보면 적통은 장조 > 정조 > 순조 > 헌종으로 이어지면서 단절 되지만 방계 출신 철종(장조의 후손이자 그 조상은 정조와 이복 사촌(은언군, 은신군) 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종 > 순종으로 이어지니 결국 장조의 후손들이 정조를 시작으로 헌종까지 이어지고 이후 방계 출신 왕들로 이어 나간다. 즉 영조 사후 조선이 멸망할 때 까지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후손들이 왕이 되는 형국이 된다.
- 탐방 시작 (소나무길)
'융ㆍ건릉' 역사 문화관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왕릉 탐방길에 나섰다. 겨울이라 그런지 찾는 이들이 많이 없었고 충절의 대명사인 소나무가 4계절 내내 푸른 위용을 뽐내고 있어 '융ㆍ건릉'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또한 탐방길에 있는 소나무는 사람 '人'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걷는 내내 안도감과 함께 살아 있는 공간임이 느껴졌다. 소나무와 동행을 하다 보니 나의 발길은 운명의 갈림길처럼 '융ㆍ건릉'의 이정표 앞에 도착했다. 이들'父子'는 살아 생전에 같이 할 시간은 적었지만 신들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나는 추존 임금인 장조(사도세자)의 릉인'융릉'을 먼저 보기로 하였다.
'융릉' 가는 길은 소나무 숲이 우거져 멀게 느껴졌다. 마치 조선시대의 아녀자가 외출 할 때 입었던 '장옷' 처럼 햇빛도 수줍은 듯 소나무를 뚫고 들어와 힘들게 비춰 주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영혼이 손짓하고 있는듯 했다. 우리나라 왕릉에 조성된 소나무 숲은 과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그늘이 되어 시원함이 느껴지고 겨울에는 병풍이 되어 바람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왕릉에 다다를때까지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권력이란 무게를 생각해 보게 된다. 100년도 못가는 권력을 가지려고 아둥 바둥 살아온 왕들, 그 속에서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왕들은 죽어서 왕릉에 뭍혀 100년 넘는 권세를 이루려 했을까?
- 융릉
왕의 생활을 생각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융릉' 가는 소나무 숲길은 끝이 나고 큰 뜰이 눈 앞에 펼쳐졌다. 추존 왕인 '장조'가 잠들어 있는 이 곳. '장조'와 '헌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융릉은 정말 사방이 훤하게 트여 있어 시원 시원해보였다. 궁궐이란 답답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장조'를 위해서 아들인 '정조'는 죽어서 남아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왕릉을 조성 한 듯 하다.
카메라 줌을 당겨 보았는데 다른 왕릉과는 차별화 된 융릉('장조'와 '헌경왕후')이 한눈에 들어 온다. (* 단릉 / 합장릉 : 둘 또는 혼자 잠들어 있는 무덤) 융릉 앞의 석조물이 '문석인'과 '무석인'이 '석마' 등이 정교하게 조성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융릉을 보면서 그 모진 세월을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어떻게 버텼을까? 차라리 일반 사가에서 태어났더라면 힘들게 살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그의 운명은 조선 최고의 권력자의 아들로 태었났으니 그것도 그의 복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정자각 방면 근처로 이동을 하면서 융릉의 장명등도 쵤영을 해 보았다.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때는 사각이었다가 조선으로 들어 서면서 팔각형으로 사용 되었다. 그리고 다시 숙종때 사각형으로 변천이 되었지만 이곳 융릉의 장명등은 팔각형이었다. 생각컨데 병행하여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 탓일까 '문석인', '무석인', '석마' 등도 빛 바랜 흔적들을 보여 주고 있으며 망주석에 있는 '세호'도 그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하다.
- 융릉의 비각과 비문
융릉을 뒤로 하고 우측에 있는 비각으로 가보았는데 자세히 보면 비각이 2개이다. 다른 왕릉들은 한개의 비각이 조성 되어 있는데 이곳은 왜 2개일까? '비각'이 2개인 이유는 사도세자 사후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 뭍혔다가 이곳으로 이장을 하면서 세자시절의 비각도 옮겨왔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 한뒤 비각이 추가 되었다. 즉 세자시절의 비각과 왕으로 추존 되면서 비각이 조성 되어 2개가 된것이다. 정자각 앞에는 비각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적어 놓았으니 이곳에 방문을 하면 한번쯤 읽어 보면 좋을 것 같. (현륭원 비문 및 표석 / 융릉 비문 및 표석)
비각을 뒤로 하고 참도에서 정자각을 바라 보았는데 겨울이라 관광객들이 많이 없어 쓸쓸한 여움만이 감돌고 있었다. 정자각 앞에는 융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진설도와 기신제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 건릉 가는 길
융릉에 작별을 고하고 아들이 잠들어 있는 건릉으로 향하였다. 건릉으로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의 푸른잎은 온데간데없고 앙상한 나무들만 남아 환영을 해주었다. 떨어지지 않고 메달려 있는 낙엽들도 쓸쓸해 보였지만 따뜻한 햇빛이 그남아 필자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왕릉의 소나무 숲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나 등산할 때 나무들 사이로 들어 오는 햇빛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빛이다. 특히 겨울철의 따사로운 햇빛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추위를 잊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신책길로 가면 융릉의 비경을 볼 수 있었지만 출입문 오른쪽을 경유하여 건릉에 도착 하였다.
건릉 앞에 도착하니 홍실문이 위용을 뽐내었다. 하지만 그 위용은 온데 간데 없이 건릉은 조선왕릉중 제일 초라해 보였다. 안동김씨 정권때 조성해서 그런 것일까? 정말 생각했던 것 보다 아버지인 융릉의 면적보다 작았던 건릉.
홍살문의 그림자를 지나 정자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정말 가벼운 듯 하면서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당대에 개혁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던 임금이자 백성들을 생각했던 군주, 하지만 그는 늘 혼자였던 임금. 어느덧 나는 정자각에 올라와 있었다. 이곳 정자각안의 후문을 통하여 건릉을 바라 볼 수 있지만 가늘날이 장날인지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융릉은 정자각에서 홍살문까지의 거리가 꽤 멀었는데 이곳 건릉에서 정자각까지 거리는 매우 짧았다. 정조는 살아 생전에 융릉 조성에 심형을 기울였지만 그의 사후 건릉은 초라하게 조성이 되어 비교가 되었다.
- 건릉의 비각
정조의 효심을 생각하면서 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릉 비각안에는 비문이 있는데 정조와 효의왕후에 대한 생애를 기록해 놓았다. 건릉의 비각은 고종때 정조를 황제로 추존 하면서 비각이 건립되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는데 추존 되기전 비각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면 비각이 있었는데 황제로 추존 되면서 이전 비각은 없어진 것일까?
비각의 의문을 뒤로 하고 정자각에서 바라본 건릉의 모습 융릉과는 다르게 능침 윗부분만 보여 전체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개혁 군주였던 건릉을 보고 있노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정치적 배경과 입지가 약하여 재위 기간 내내 암살 시도에 시달렸던 임금. 그리고 그의 사후에 개혁은 물거품 가고 안동 김씨 세력이 세도 정치를 시작하여 조선의 시계는 거꾸로 향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알고 있었을까? (순조 21년에 조성된 건릉은 효의왕후가 승하 하면서 융릉의 서쪽으로 천장되어 조성, 이때는 왕권이 약하여 융릉 보다 초라함을 보여 주고 있다.)
융릉의 능침은 멀리서도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는데 건릉은 멀리서 봐도 장명등과 주변에 있는 석물들이 전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일부분만 들어왔다. 이를 볼 때 왕릉 조성시 시대상을 반영해주는 듯 하여 씁쓸하였다. 그리고 사도세자와 정조는 생전에 같이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죽어서 한 능침에 같이 있을 수 있었으니 이제는 두 부자('父子')의 소원이 풀렸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면서 이번 '융ㆍ건릉' 탐방을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