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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 Jul 12. 2021

#1. 한국의 클래식 카페

Epil. 나는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

나는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는데. 아직도 그 사이 중간에서 3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중간 애매한 지점에서 방황하면서 그간 의도치 않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다들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는데.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개중에는 한때


자기만의 사업을 차려서 억만장자가 되는 삶을 꿈꾼 이가 있었고,

모든 걸 내려놓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유랑하는 삶을 꿈꾼 이도 있었고,

현실의 문제는 덮어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좇는 삶을 꿈꾼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서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이런 것들은 그냥 덮어두고 과거의 자신이 밀어(push) 온 대로 대부분 살아지고 있다.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었던 옛 시절을 돌이켜보며


“왕년엔 내가 말이지”, “나도 한때는”, “옛날에는 내가”


하는 말들을 술자리에서 공허하게 내뱉으며 그렇게 살고 있다. 지금 나처럼 말이다.



돈과 시간. 비즈니스관계와 인간관계. 현실과 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운이 좋게도 이십 대 초반 군대에서 우연히 만난 형에게 배웠다. 돈을 좇으면 시간이 없고, 비즈니스관계를 채우면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현실에 매몰되면 꿈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생은 어쩌면 트레이드오프(trade-off) 관계에 있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한 조합들이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마치 RPG 게임에서 만들고 싶은 캐릭터에 따라 한정된 능력치를 서로 다른 영역에 배분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허겁지겁 세계여행을 떠났다. 나는 그전까지는 ‘돈, 비즈니스관계, 현실’에 모든 능력치를 올인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들에 너무 몰입하면 시간이 없어지고, 인간관계가 공허해지고, 꿈이 없어질 거라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벌 받는 것처럼 무리해서 떠났다.




30년 전, 나의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30살이 됐을 때 나를 낳으셨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30세가 되셨을 무렵 내가 그의 인생에 올라탄 것이다.


아버지는 이전까지는 유년시절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모두 30분 이상을 걸어서 등교해야 하는 깡촌에 살았고 고등학생이 돼서야 대구라는 도시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셨다. 전형적인 80년대 도시화의 부산물이셨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그의 인생에 올라탔을 무렵 아버지는 도시에서 생활을 하시면서도 생활 방식, 취향, 생활 습관 등은 모두 촌(村)스러움을 지니고 계셨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열심히 직장에 다니면서도, 주말이면 운전대를 잡고 항상 야지를 찾았다. 덕분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국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 역시 그때 ‘이렇게’와 ‘저렇게’ 사이에서 방황하고 계셨던 것 같다. 7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는 출근하기 전 3남매 중 맏이인 어머니께 자주 투덜대곤 하셨다. 그러면서 퇴근 후에는 항상 ‘저렇게’ 사는 삶은 어떤지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나무를 깎아 조각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전원주택을 짓겠다며 우레탄 보드를 사다가 주택 건축을 구상해보기도 하시다가, 지금은 밭농사에 열중이시다. 퇴근하시고도 힘든 줄도 모르고 애지중지 다양한 작물들을 키우신다. 당신의 방황을 받아준 어머니가 고마운지 어머니를 위해 당뇨에 좋다는 이국 작물들을 직접 심어다가 기르기도 하신다.


나와 동생이 당신의 삶에서 내려오자 비로소 당신만의 ‘저렇게’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모양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두 가지를 물려받았다.


‘이렇게’와 ‘저렇게’다.


나는 어릴 적 유난히 또래에 비해 ‘이렇게’ 살아서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아버지의 촌스러움은 내 약점이었다.


학창 시절 내가 자라고 난 곳은 울산의 법원 근처 아파트 단지였다. 덕분에 내 친구들은 모두 유복했고 다들 학원 4~5개씩은 기본으로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촌스러움이 몸에 밴 아버지는 심어놓기만 하면 으레 잘 자라나는 고구마처럼 자식들도 그렇게 자라나는 것으로 알고 계셨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학원을 하루 쉴까 고민하는 사이, 나는 “영어 학원 보내달라”, “수학 학원 보내달라” 졸라 대야 했다.


그러던 것이 고등학교를 타지에서 나오고 고시원에서 재수생활을 보내면서 그런 열망은 더욱 커졌다.


나는 고등학교를 갈 때도 부모님께 졸라 울산에서 부산으로 ‘유학’을 갔다. 그때 집을 나와 다 무너져 가는 빌라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취를 했다.


공과금이며, 세제며, 하다못해 샴푸 값까지…. 이런 것들은 고등학생의 용돈으로 일일이 계산하기에는 너무 많고 복잡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숨만 쉬고 살아가는 데도 자잘하게 돈이 새 나갈 구멍이 얼마나 많은지 체감했다. 이전까지는 부모님과 생활하면서 당연하게 집안에 있었던 물건들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란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체감은 2평짜리 고시원에서 재수생활을 하면서 더욱 커졌다.


그때 나는 돈이 없으면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사람 관계도 인색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는 사실도 무의식적으로 습득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 사람들이 구김살도 적다”고 한 말을 그때 들었다면 나는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이렇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리고 내 모든 능력치를 돈, 비즈니스관계, 현실에 쏟아부었다. 어린 나이에 비즈니스관계라기에는 애매하지만 성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그들을 쫓아다녔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러던 것이 이십 대 초반 군대에서 나는 우연히 내 속의 ‘저렇게’를 찾았다.


한때 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많아 본 사람을 거기서 만났다. 정말 좋은 형이었다. 나는 야간 점호가 끝나면 그를 찾아가 어두컴컴한 생활관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지금 우리네 아버지들 중 크나큰 성공을 거둔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살아오는 데 지나치게 몰입해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시간보다는 돈을, 인간관계보다는 비즈니스관계를, 꿈보다는 현실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인의 삶은 언제나 외로웠다.


그걸 알게 되고 나는 제대하자마자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아버지의 촌스러움이 강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내 삶에 ‘저렇게’ 사는 생활을 하나둘씩 채워 넣기 시작했다. 촌스러운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정은 많으셨다. 그래서 차가운 도시 공간 속에서 남몰래 상처도 많이 받으셨던 것 같다.




서른 언저리가 된 지금 나도 아버지처럼 열심히 ‘이렇게’ 일하다가도 퇴근하고 나서 ‘저렇게’ 사는 생활을 꿈꾼다.


차라리 ‘이렇게’ 살 거면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 거면 저렇게 살았을 텐데. 둘 다 하려니까 때로는 벅차기도 한다. 열심히 ‘이렇게’ 살아서 현실에 충실하고 싶고 열심히 ‘저렇게’ 살아서 꿈도 이루고, 인간관계도 잘 챙기고 싶다.


나는 욕심이 많은가 보다.




나는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는데. 아직도 그 사이 중간에서 3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과거를 돌이켜보며


“왕년엔 내가 말이지”, “나도 한때는”, “옛날에는 내가”


하는 말들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게 찌질해 보인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과거가 어땠고 현재가 어떻고는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



나아지고 있는 것.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그거면 됐다.


사실 우리는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눠져 고정된 한 계절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1년 중 가장 더운 날을 향해 달려갔다가 1년 중 가장 추운 날을 향해 달려갔다가 늘 변화하는 흐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 7월 11일은 여름이 아니라 여름 한중간에서 1년 중 가장 추운 날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날인 것이다.


나는 오늘 대학로에서 30년이 넘었다는 카페에 홀로 앉아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이제는 큰 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이십 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자. 올해의 가장 추운 날이 서둘러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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