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茶, tea, thé
Epil. 애써 어른스러워지지 말자.
“시간 허투루 보내지 말고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 둬. 시간 금방 간다.”
학창 시절 부모님께서는 종종 이런 잔소리를 하곤 하셨다. 자기 계발의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또래들은 대부분 비슷한 잔소리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그때는 잔소리가 마냥 스트레스로만 다가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곤 했다.
하지만 기나긴 학창 시절을 끝내고 직장인이 된 지금, 부모님의 그 잔소리를 다른 의미에서 이해해보려 한다.
‘한계 시간 체감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20대는 40km/h의 속도로 시간이 지나가고 30대는 60km/h, 40대는 80km/h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이다. 전문적인 학술 용어도 아니고 학문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많은 사람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회자되곤 한다.
100km/h의 속도로 인생을 보내고 있는 부모로서는 하루하루를 느긋하게 보내고 있는 자식이 오죽 답답했으랴. 부모 자식 간의 세대 갈등은 급변하는 시대가 낳은 착오뿐만 아니라 시간관념의 차이에서도 비롯된 듯하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그것은 아마 ‘익숙함’ 때문이리라.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던 시절은 학창 시절보다 하루가 길었던 것 같다. 책상에 앉아 매일 14시간씩 기출 문제만 반복해서 풀던 하루보다는 분명 길었다. 대학에 처음 입학해 상경했을 때도 지금보다 하루가 길었던 것 같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같은 시간에 퇴근하기를 반복하는 하루보다는 분명 길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새로웠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것을 경험하는 하루였고 ‘내일’은 ‘오늘’과는 다른 특별한 하루를 기대할 수 있었다. 80km/h의 세월을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산타클로스나 첫눈 따위를 기다리지 않는다. 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되어 때가 되면 어차피 다음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그들은 이미 수많은 첫눈과 산타클로스를 겪었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정말 슬퍼해야 할 것은 얼굴의 주름살보다는 경험의 주름살인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인공 뫼르소가 감옥에 갇힌 뒤 생각에 잠기는 부분이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나도 분명 읽은 일이 있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면서도 동시에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가 다른 하루들로 넘쳐 나서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이름을 잃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간수로부터 내가 (감옥에) 들어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믿기는 했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하루를 꾸릴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다. 학교를 졸업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면 우리는 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쳇바퀴에 올라타게 된다. 요즘은 취업이 하도 어려워서 그 쳇바퀴에 올라타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막상 취업하고 나면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기쁜 마음은 합격증을 받아든 그 날부터 채 3개월을 가지 못한다.
슬프지만 성공적인 직장인이 되려면 우리는 돈이라는 성배 안에 든 구속이라는 독을 마셔야 한다. 성공적인 직장인 될수록 우리는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데 최적화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기억에서 무뎌진다는 걸 의미한다.
같은 하루를 매일 반복할수록 하루하루는 의미를 잃고 만다. 우리는 어렸을 적 첫눈은 기억하지만 정작 올해의 ‘첫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렸을 적에는 첫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은 사치가 되어버린다.
‘어차피 작년에도 내렸고 내년에도 내릴 첫눈인데 굳이 기억에 남겨야 해? 다른 걱정거리들이 얼마나 많은데’ 시간에 익숙해진 무의식은 우리에게 이런 주문을 건다.
가끔은 의식적으로라도 올해 첫눈은 언제 내릴지 궁금해 해보자.
익숙함에 속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해보자. 애써 어른스러워지지 말자.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터득하며 익숙함에 감사해하지만 이내 쇠 밥그릇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슬픔을 발견한다.
“시간 허투루 보내지 말고 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해. 시간 금방 간다.”
직장인이 된 지금 나는 문득 퇴근길에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나.
내일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카페에 가보려 한다. 맛있는 차를 마시며 올해 첫눈은 언제 내릴지 곱씹어보는 사치를 부리려 한다. 그 누구보다도 기나긴 하루를 보내야 되돌아 볼 추억 거리도 많지 않을까. 오늘 하루가 10년 후에도 기억에 남을 ‘그날’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