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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 Dec 12. 2022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 틀렸다는것만 증명할 뿐…에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감독이 하는 얘기가 설마 그건가?”


영화가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인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거야, 에이 설마”


영화가 끝으로 향하면서 설마는 이윽고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얘기가 맞네. 그걸 영화로 풀어내다니, 와.”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마자 저는 스마트폰을 들고 평론가들의 비평을 검색했습니다. 빨리 확인해보고 싶었거든요.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게 제가 생각한 그것이 맞다는 걸요.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읽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미친듯한 상상력으로 그 모든 세계를 종횡무진 경유한 끝에 찡한 골든벨을 울린다.”



마블 시리즈 풍의 판타지 액션,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SF, 가족애를 자극하는 찡긋한 결말. 이것들만으로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2022년 올해의 영화로 손꼽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데니엘 콴 감독이 대단한 건 복잡한 철학적 세계관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데 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대로 ‘그 모든 세계’를 139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모두 훑어냈죠.


(주의: 본 게시물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신(scene)은 천방지축 복잡하지만 스토리 라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해온 에블린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성실하게 생계를 꾸려갑니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 갇혀 사느라 의도치 않게 딸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냅니다.


“너 살쪘어”, “(아버지에게) 벡키는 그냥 조이의 친한 친구예요”


툭툭 내뱉는 엄마의 말에 조이는 남몰래 눈물을 훔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가족을 향한 분노로 돌아옵니다. 멀티버스 속에서 조부 투파키라는 분신을 만들어내죠. 조이가 흘린 눈물은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강력한 추동으로 작용합니다.


에블린은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처럼 살기를 강요합니다. 꿈 많던 여린 소녀는 어느새 강인한 척하는 꼰대가 돼있었습니다. 에블린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한 아빠를 원망하지만 자신도 그런 부모가 돼 있었던 거죠. 조이가 받은 상처는 가부장제 속에 대물림 되던 딸들의 상처였습니다.


조이는 결국 조부 투파키가 되고 가족들을 공격합니다. 멀티버스 속에서 이웃들은 모두 조부 투파키의 부하가 되어 함께 가족을 공격합니다. 최후의 전선에서 엄마와 맞닥뜨린 그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베이글로 끌어들입니다. 자신이 만든 허무주의(베이글) 속에 함께 들어가 사라져 버리려 하죠.


처음에는 에블린도 이에 혹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조이와 싸우는 과정에서 어릴 적 꿈꿨었던 다른 삶들을 경험합니다. 그 덕분에 에블린은 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딸의 허무주의를 향해 발을 내딛습니다.


이때 남편 웨이먼드가 나서 그들을 구합니다. 웨이먼드는 나약한 척했지만 실은 ‘진짜 어른’이었습니다. 그의 나약함은 ‘다정함’이었고, 그 다정함은 단단한 자아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멀티버스 속에서도 에블린의 자아는 갈기갈기 쪼개진 반면 웨이먼드는 강인한 면모를 유지하죠. 국세청 직원에게 토스트를 요리해주고 손님들과 바보 같은 춤을 추는 것은 그만의 삶의 지혜였던 겁니다.


웨이먼드는 이 다정함으로 허무주의를 물리치고 가족과 이웃 간의 사랑을 회복하게 합니다.


유치하지 않은 해피 엔딩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렇듯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꽤나 단순하지만, 곱씹어보면 꽤나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조이는 자신의 허무주의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거대해”

“세상 모든 건 진동하며 중첩하고 있는 미립자의 무작위 재배열에 불과해”

“세상 모든 걸 베이글 위에 올리면 ‘진실’(truth)이 되거든.”


조이의 허무주의는 주변 사람과 사회를 넘어 온 우주까지 뻗어 나갑니다. 그는 “가족, 사회 다 부질없어”하는 수준을 넘어 우주 허무맹랑론까지 들고 나옵니다. 엄마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걸 부정한다는 이유로요. 보통의 경우라면 “엄마는 앞뒤가 꽉 막혔어”, “우리 사회는 잘못됐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일 텐데 말이죠.


엄마를 그런 곳에 끌어들이는 부분도 이상합니다. 조이는 엄마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문턱에서 돌덩이가 돼버립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우주 공간에서요. 어지러운 장면들 속에서 잠깐 정적이 흐르고 그는 얘기합니다.


“우린 오랫동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고 그와 다르게 주장하는 이들을 죽이고 고문했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심오한 말들을 내뱉던 조이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던 인류의 오류’까지 들먹입니다.


“하나의 우주 속에 그 모든 게 존재하지만 그조차 무수한 우주 중 하나일 뿐이야. 뭔가를 발견할 때마다 반증하는 셈이지…. 다음엔 또 어떤 새로운 발견이 우리를 개허접한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만을 반증할 수 있을 뿐.”


칼 포퍼라는 철학자는 1930년대 과학 철학사에서 길이 두고 회자될 격언을 남깁니다. 조이가 말한 오류는 실제로 우리 인류가 과학을 발전시키고 지식을 확장시켜 온 과정에서 직면했던 중요한 철학적 논제입니다. 과학 철학도 우주 허무맹랑론에 빠질 뻔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100년도 채 되지 않은 꽤나 최근에요.


칼 포퍼가 살던 20세기 초 과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전 세계는 문명의 이기에 취해 있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1910년대 미국에 들어와 포드의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발전했죠, 1900년대 초 프랑스에서는 세계 최초로 공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원자라는 보이지 않은 미세 물질로 메가톤급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원자력 발전소도 생겨납니다.


그렇게 인류가 과학만능주의에 도취해 있을 무렵 칼 포퍼는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안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만든 지식은 모두 잠정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라며 찬물을 끼얹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야 합니다.




과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반복된 경험을 통한 일반화였습니다. 


예컨대 ‘어제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다’, ‘오늘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다’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는 일반화된 이론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그 덕분에 ‘내일도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질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경험에서 일반화를 도출하는 전자의 과정을 귀납추리라고 부르고, 일반화를 적용하는 후자의 과정을 연역추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추리 과정은 오류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45억 년 지구 역사 중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하루는 해가 서쪽에서 떴다면요? 45억 년 동안 해가 동쪽에서 떴는데 내일 갑자기 서쪽에서 뜬다면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일반화된 이론은 거짓이 됩니다. 귀납추리의 한계입니다. 또 그런 이론들은 애초 45억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 동안 관찰로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처음에 만들어질 수 있나요? 연역추리의 한계입니다.


칼 포퍼는 두 논리의 한계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정적으로만 알 수 있다. 그것이 곧 과학이다”


라고 말합니다. 과학의 본질 자체가 잠정적으로 이론을 세우는 것이고 그것이 반증 사례에 의해 폐기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을 잠정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론은 해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반대 사례를 통해 검증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입니다.


어떻게 보면 칼 포퍼의 반증주의는 두 추리의 한계를 말장난처럼 보완하는 데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칼 포퍼의 반증주의가 갖는 진정한 의의는 당시 시대에 큰 영향을 준 두 천재를 날카롭게 비판한 데 있습니다. 


바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입니다.


마르크스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역사가 일련의 규칙을 가지고 발전한다고 믿었습니다. 원시 수렵채집(원시 공산제) 사회에서, 농경(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 사회로,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 사회로 정해진 길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유 재산이 없던 수렵 채집 시절에 인류는 생산물을 나눠먹는 원시 공산제에 살았지만,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계급이 생겼다고 마르크스는 믿었습니다. 이러한 계급은 자본주의에 들어서 경제적 격차로 더욱 벌어지게 되는데 이때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다시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죠.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대는 결국 공산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단계일 뿐입니다.


마르크스는 인류 사회의 미래에 결과(공산주의)가 정해져 있고 또 그 결과만이 정답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도 이 정신을 계승해 원바오(난세)-샤오캉(소강)-다퉁(대동) 사회로 나아가겠다고 표방하고 있습니다. 소강 사회는 자본주의를 통해 인민을 먹여 살릴 경제력을 구축하는 단계고 대동 사회는 모두가 다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단계입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들이 중국인이라는 건 우연의 일치겠죠?



칼 포퍼는 이러한 태도 자체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만이 정답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재밌는 건 포퍼 또한 한때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교조적인 태도에 신물을 느끼고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죠.


그는 이후 1945년 고전 필독서가 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는 책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와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되는 공론장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열린 사회’인데 ‘그 적들’이 반증 가능성을 배제한 채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날카롭게 꼬집습니다.



너무 멀리 나간 얘기가 같다고요? 다시 잠깐 영화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웨이먼드는 아내에게 딸이 조부 투파키가 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멀티버스에서 딸이 한계를 넘도록 몰아세웠더니)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도덕관념을 잃고 말았지.”


여기서 객관적 진리는 과학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조이는 과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평범한 학생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정당해 과학과 진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니요? 이 대사는 감독이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집어넣은 영화적 장치에 가깝습니다.


칼 포퍼



칼 포퍼는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소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사실과 의견을 반증하기 위한 시도가 자유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죠. 영화에서도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계속해서 “우리 얘기하자”고 말합니다. 그가 이혼 청구서를 준비했던 것도 “이렇게 하면 너와 얘기를 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에블린은 계속 귀를 닫은 채 자기 할 말만 하죠.


에블린은 조이의 허무주의를 목전에 경험한 후에야 남편의 다정함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공격하던 사람들의 말을 다정하게 들어줍니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중년에게는 아내가 쓰던 향수를 뿌려줍니다. 마조히스트를 위해서는 기꺼이 채찍을 휘둘러줍니다. 라따구리 대신 직접 요리사 위에 올라가 목말을 탑니다. 가족을 공격하던 이웃들은 거친 반항보다 에블린의 다정한 귀 기울임에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그의 다정함은 마침내 조이도 녹아내립니다. 허무한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던 딸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영화는 찡한 골든벨을 울리고 끝이 납니다.




번외로, 칼 포퍼는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도 비판합니다. 당시 심리학은 학문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걸음마 단계였습니다. 그러니 이를 불신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았죠.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검증하나요? ‘학대와 폭력은 대를 대물림 한다’는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아이에게 학대를 가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포퍼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두 지식인의 오류를 날카롭게 비판한 포퍼의 이론은 훗날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으로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토마스 쿤은 칼 포퍼의 논리가 “우리는 엄밀하게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과학 허무주의로 빠질 뻔한 위기에서 인류를 구합니다. 그는 포퍼의 말대로 우리는 엄격하게는 아무것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잠정적으로 아는 것’들도 시대에 따라서는 진리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과학 이론에도 유행처럼 대세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대세, 주류 이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반증 사례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수많은 반증들을 다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새로 떠오르고 대세 이론으로서 자리 잡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패러다임의 변화, 즉 과학의 발전이라고 설명하죠.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대니엘 콴 감독이 칼 포퍼의 철학에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문자를 쓰기 시작한 이래 고대-중세-근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원전 460년경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며 일침을 가하면서 서양 학문은 시작됐습니다. 인간이 무지하다는 걸 알았으니 모르는 걸 공부해야지요.


하지만 이후 학문의 발전은 오래가지 못했고 오랜 기간 암흑기에 휩싸였습니다. 중세 시대 들어서 모든 자연 현상을 신(God, 神)의 뜻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죠. 번개가 치는 건 신이 노한 것이지 인간이 감히 탐구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뜨는 것은 반문을 가질 수 없는 신의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신 중심적 세계관은 14~15세기까지 오래도록 계속됩니다.


그런 와중에 갈릴레이가 1600년대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천동설에 반기를 듭니다. 이것은 중세 시대 신 중심의 세계관의 종말을 고하게 된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뉴턴의 과학 법칙으로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 본격 열립니다. 근대가 시작된 것이죠. 이후 학문과 이성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합니다.


이성주의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성을 사용하는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이니 자연스러운 결과겠죠.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중세 때 잃어버렸던 고대 그리스의 인본주의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격언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생각하는 인간)에서 나온 말입니다.


근대(모더니즘)에서 본격 열린 이성주의는 이성 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인류가 인간 지성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는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이때쯤 인류는 과학과 지식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과실로 유래 없는 풍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유시민 작가가 “인간이 질병이나 배고픔에 대해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이때입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몇몇 유럽 국가들을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경제적인 팽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 펼쳐집니다. 결국 욕심은 충돌하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었지만 좀 더 근본적인 배경에는 이 같은 경제적인 팽창에 따른 다툼이 숨어있습니다.


전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겨우 일단락됐지만 1929년 미국에서 발생난 대공황은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낳습니다. 경제가 갑자기 한순간에 폭락해버리자 공장엔 재고자산이 셀 수 없이 쌓이죠.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싸웠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제 이 재고들을 팔고 처리하기 위해 또다시 식민지로 눈을 돌립니다.


그런데 특히 독일과 일본과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공황이 가져다준 경제 위기가 더 심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쌀 수탈’에서 ‘시장 개척, 상품 수출’로 시각을 바꾼 것도 이때입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위기를 침략 전쟁으로 극복하려 했고 결국 또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과학만능주의와 과도한 욕심으로 촉발된 세계전쟁은 현대 과학 기술의 최정점인 핵폭탄에 의해 마무리됩니다. 미국은 ‘리틀보이’라는 작은 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나지만 남는 것은 상처뿐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작은 무기가 몇 분 안에 도시 전체를 불덩이로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두 전쟁을 겪고 난 인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은 정말 만능인가? 이성은 진정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20세기는 이처럼 인류가 유래 없는 문명의 발전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이성에 대한 회의도 크게 느끼는 시기입니다. 이성주의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과도한 이성주의가 전체주의와 국가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얼마 전까지 있었던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아제한 정책은 인구학적으로 국가 발전의 차원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행복은 철저히 무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960~70년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낙태를 암묵적으로 장려한 것도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이성주의에 대해 반성하는 시기를 후기 근대(포스트-모더니즘)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정상’이라는 기준을 잣대로 ‘비정상’을 함부로 평가하는 데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조이의 허무주의도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철학에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이성은 의미가 없어”하고 외치는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이 주목을 받습니다. “국가는 필요 없다, 오히려 해악이다”는 무정부주의도 고개를 듭니다. 예술에서는 파괴 예술, 실험 예술이 유행합니다.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 포스트를 복제해 짜깁기한 뒤 수십 억 원에 팔아버리죠. 범죄학에서는 정신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감옥 같은 수용소에서 감금하는 치료 방식에 대한 반성도 일어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공허함을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뒤따랐습니다. 철학자들이 찾은 정답은 ‘인간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입니다. 이성을 신봉하되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기준을 잃지 말자는 거죠. 산아 제한 정책이 아무리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더라도 개개인의 행복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 역시 ‘이성애=정상’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함부로 비정상을 규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웨이먼드는 휴머니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성주의의 한계에 봉착했을 때(에블린) 허무주의(조이)로 빠지지 말고 휴머니즘(웨이먼드)을 회복하자.” 저는 감독이 하려고 했던 얘기를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가 말한 ‘그 모든 세계’는 인류 철학사를 통칭하는 의미로 읽었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 어떻게 보면 칼 포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한때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천재의 사상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철학을 구축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런 명언을 또 남깁니다.


“삶이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삶이란 문제 해결의 연속이고, 영화는 문제 해결의 한 과정을 극적으로 과장해낸 이야기라고요. 덕분에 영화를 보다가 종종, 머릿속에 쌓였던 고민들에 대한 현답을 의도치 않게 발견하곤 합니다.


에블린의 삶 역시 문제 해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정상의 삶’을 살기 위해 집착했습니다. 하지만 그 집착이 지나쳐 딸에게 상처를 주고 가족을 위기로 몰아넣죠. 다행히도 그는 웨이먼드의 다정함에서 교훈을 얻고 위기를 극복합니다.


에블린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재미뿐만 아니라 큰 교훈도 남겼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다 사연이 있는 고민들을 머릿속 한 쪽에 짊어지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영화가 말해주듯 정답은 은근히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고민을 느끼고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의미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나는 한층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거야. 좀 더 배려하고 다정하게 베풀고 살자.”


찡한 감동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잔잔한 여운도 함께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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