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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 Sep 29. 2022

왜 앙가주망은 되고 폴리페서는 안 될까..데이비드 게일


한 나라에 1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중 70명은 ‘난청’을 앓고 있고 나머지 30명은 ‘야맹증’을 앓고 있다고요. 어느 날 평화롭던 이 나라에 야맹증을 앓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를 하는 거예요. 밤길이 어두우니 지금보다 더 밝은 가로등을 설치해달라면서요.


그때 야맹증을 앓는 사람들이 밤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고가 늘면서 야맹증에 걸린 사람들의 반발은 점점 거세집니다. 난청에 걸린 70명의 사람들은 가로등 설치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 나라의 복지 예산은 대부분 70명의 사람들을 위해 쓰이고 있는데 이들은 그 예산이 줄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다수결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한 쪽을 선택을 하자고 맞섭니다. 갈등은 점점 첨예해지고 사회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럴 땐 이 나라의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을까요?



교과서에서는 소수 30명의 안전을 위해 나머지 70명의 편의는 양보를 하는 게 “정의롭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교과서와는 정 반대로 흘러가는 법이죠. 요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갈라치기’가 유행입니다. 대다수의 많은 정치인들은 여론에 따라 가로등 설치에 반대할 겁니다. 예산 이유를 들거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요. 70명의 편을 들고 나머지 30명의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거죠. 반대 편 쪽 정치인은 30명의 편을 들고 70명 중 21명을 설득해서 51표를 얻으려고 할 겁니다.



결국 정치인의 생명은 선거에서 얼마나 표를 많이 받느냐에 좌우됩니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메이휴는 “모든 정치인은 재선을 목표로 하며, 그 외의 목표는 없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51명의 표를 얻기도 빠듯한데 누가 아득바득 나서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할까요? 정치인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는 힘듭니다.





영화 <데이비드 게일>에서도 이 같은 딜레마적인 상황이 펼쳐집니다. 주인공인 데이비드 게일 교수가 살고 있는 미국 텍사스 주는 마초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입니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 속에 주민들 대부분은 사형제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70명의 사람과 같은 입장인 거죠. 이들이 사형제에 찬성하는 근거는 간단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악행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은 일면 타당해 보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대목이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범죄학자들은 사형제가 범죄를 예방하는 데 별로 효과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든 사법 시스템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범죄도 못 막는데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킨다면? 정말 위험한 제도가 아닐 수 없죠.


(사형제와 범죄학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영화 <밀양>편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일 교수도 영화에서 이와 같이 주장합니다. “사형제는 범죄를 예방할 수 없다”, “사형제는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영화는 교수가 어떻게 일평생을 바쳐 이 주장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앨런 파커 감독은 고리타분한 사형제 폐지 논리를 어떻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로 그려냈을까요? 실화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스토리는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주의: 본 게시물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데이비드 게일>


영화 초반부에도 사형제 찬반 논리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게일 교수와 주지사가 TV토론 대결을 펼치는 순간입니다. 게일 교수는 27살에 대학 교수가 되고 철학과 학과장이 될 정도로 정말 똑똑합니다. 뿐만 아니라 위트 있기까지 하죠. 대중을 사로잡는 위트로 게일 교수는 주지사를 토론에서 망실살을 줍니다.


하지만 주지사는 꿈쩍도 않습니다. 논리에서 이기든 지든 계속 “눈에는 눈, 이에는 이”만 되풀이합니다. 게일 교수가 아무리 박학다식하다고 해도 대중들에게 ‘먹히는 법’을 더 잘 아는 건 정치인입니다. 애초 철학과 교수와 토론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주지사는 교수를 논리로 이길 생각보다는 직관적인 메시지만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로 마음먹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통합니다.





“공은 죽었고 관과 민만 남았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한자어라 말이 어렵죠. 공, 관, 민... 영화에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영화 <데이비드 게일>


관(官)은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는 정부 기관입니다. 영화로 치면 주지사, 주 정부, 경찰이 되겠죠. 시민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사형까지 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관은 넓게 보면 행정 기관 뿐만 아니라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까지 통칭하는 말입니다. 민(民)은 사형제와 같이 제도에 영향을 받는 일반 시민들을 칭하는 말입니다. 오스틴 대학의 학생일 수도 있고, 게일 교수와 콘스탄스 교수도 될 수 있습니다.



민주(民主)주의 국가에서는 백성이 주인이니까 관의 권한을 시민들이 정하도록 돼 있습니다. 선거와 투표, 그리고 여론을 통해서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민주주의가 굉장히 복잡하게 작동합니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가로등을 설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반대하는 쪽이 있죠. 영화에서도 사형제를 찬성하는 쪽이 다수지만 반대쪽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관과 민 사이에 공(公)이라는 게 존재합니다. 영화로 치면 데스워치입니다. 게일 교수와 콘스탄스 교수나 개인으로 보면 일개 시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뭉쳐서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 존재감이 달라지죠. 공의 영역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또 다른 주인공 빗시 기자는 관-공-민의 상호작용을 윤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각자의 입장과 의견을 전달하고, 시민의 의견을 모아 여론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게일 교수도 기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죠.





“공은 죽었고 관과 민만 남았다.” 이 말은 한국의 시민사회의 토양이 굉장히 허약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데스워치와 같은 단체를 얼마나 보셨나요? 시민단체야 많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빨갱이다” 혹은 “후원금 노리고 하는 거다”고 비난 받기 일쑤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이후에 정글과도 같은, 무정부, 무법천지 세상이 됩니다. 임시 정부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으로 망명 갔었죠, 전쟁으로 온 나라는 잿더미가 됐죠. 사람들은 하루 한 끼도 먹을 게 없어서 하루에도 수백 명이 아사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승만이 갑자기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미국에서 들고 와 이식합니다.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자신의 지위가 조선시대에는 하늘과도 같은 왕의 뜻을 받드는 ‘백성’이었다가 전쟁을 겪고 나니 갑자기 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정하는 ‘시민’이 됐으니까요. 그러니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될 일인가요. 미국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100년이 넘는 시행착오를 겪었는 걸요. 이승만도 스스로 민주주의를 하자고 해놓고 부정 선거를 하다가 들통이 납니다. 3.15 부정선거, 4.19 혁명. 각종 사건이 터지고 민주주의는 도입 초기부터 삐걱댑니다.


그렇게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갑자기 들어선 강력한 군부는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획합니다. 경부 고속도로, 서울 강남, 재벌 대기업 등등 지금도 한국에서 ‘크고, 중요하고, 영향력 있다’ 싶은 건 다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일례로 지금의 강남 지역은 원래는 허허벌판에다 매년 한강이 범람하는 늪지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남 개발을 위해 영등포구와 강서구 등지를 그린벨트로 지정해버리죠. 경제학자들은 이것들이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없었으면 만들어지기 힘들었을 거라 평합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형성’된 것이 아니라 ‘건설’됐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 잔재는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진 뒤에도 남아있습니다. 군부 정부는 앞에서 말한 '관'의 형태로 남아 여전히 시민들의 삶과 의식에 많은 영향력을 미칩니다.


2021년 코로나19로 한창 전세계가 시끄러울 때 선진국들이 ‘K-방역’에 주목했죠. 프랑스의 한 저명한 시사 잡지는 K-방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이 군부 문화의 잔재를 꼽습니다. “마스크 꼭 써라”, “바깥에 나가지 마라”, “4명 이상 모이지 마라” 이런 방역 조치들이 잘 지켜지려면 시민들이 정부의 통제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겠죠.



한국 근현대사에서 군부 역사의 반대편에는 “독재 타도”를 외치던 민주화의 역사도 있습니다. 정부가 길거리에서 30년 가까이 시민들을 억압하는 동안 이들도 음지에서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독재 군부가 군대를 투입해 억압하니 이들도 종대로 헤쳐모여 힘을 결집해야겠죠. 군부가 강하게 찍어 누르려고 할수록 이들은 더 힘을 모아서 강하게 항의합니다. 결국 독재는 물러나고 승리는 민주화의 역사로 돌아갑니다. 강력한 ‘민’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 시민사회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22년 지금 한국은 민주화를 이룬지 30년하고도 반이 지났습니다. 정치학자들은 여전히 한국의 시민사회(공)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영화에서처럼 사형제 폐지에 대한 사회적인 갑론을박도 없습니다. 환경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민단체도 힘이 약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시위”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저 노동자들이 여는 파업 집회밖에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영화 <데이비드 게일>


미국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영화에서도 시민들은 경제적인 이득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신념 하나만으로 데스워치에 활동합니다. 그리고 집회의 중심에는 데이비드 게일 교수와 콘스탄스 교수가 있습니다. 둘 교수는 시위의 중심을 잡아주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죠. 데스워치의 철학적 신념 기반이 됩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학 교수들이 지역 시민단체에 참여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민단체가 맹목적이고 편협한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막아주고, 사회 문제에 대한 가치 있는 신념을 공급합니다. 이러한 튼튼한 시민사회의 지지 기반은 정당정치가 건강하게 작동하도록 도와줍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지식인이라고 하는 교수들은 장관이 되기에 바쁩니다. 공직에 나아가 관에서 한자리 하는 게 그들이 생각하는 ‘입신양면’인가 봅니다. 이런 현상은 진보, 보수를 막론합니다. 근래 교수들의 사회 문제 참여가 칭찬받지 않고 “폴리페서”라고 비판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철학적 가치를 잃은 시민사회는 공허합니다. 지식인의 빈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전광훈 목사와 허경영 교주입니다. 이상하죠. 종교 단체인데 정치적인 목소리를 열심히 내고 있어요. 제정일치 사회는 고조선 시대처럼 고대 국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정치 형태라고 하던데도요. 이들은 신자들에게 가치 있는 철학적·종교적 신념을 전하는 대신 정치적 맹목을 주입하고 무한한 헌금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시민사회의 기반이 약하면 시민단체가 정당한 주장을 해도 사람들은 이들을 하대하거나 무시하게 됩니다. 야맹증을 앓는 사람들이 위험하니까 전봇대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해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시민단체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떼만 쓰는’ 시위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 사람들의 반감과 무시를 사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얼마 전 장애인 단체가 지하철에서 시위를 열었던 것 기억 하시나요?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처지인데 왜 그러냐” 맞는 말입니다. 당장 빨리 출근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출근길을 방해하면 사람들의 눈에 안 좋게 비춰질 것을 분명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가 걸렸으니까요.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면 그 방법 말고는 없었던 겁니다. 그들도 그렇게 하소연하더군요. 사람들이 무시하고 외면하니 그렇게까지 해야 목소리를 들어준다고요. 이 사람들이 여는 시위는 교회 땅을 팔고 500억 원을 받으려는 시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영화 <데이비드 게일>


그런데 우리의 훌륭한 정치인들께서는 여기서 또 쉬지 않고 갈라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먹히는 법을 아는 데는 정말 도가 텄습니다. 장애인 대 비장애인은 30대 70이 아니라, 1대 99라는 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99명의 사람들은 복지 예산이 지하철 엘리베이터에 쓰이든 말든 관심 없다는 사실도요. 기꺼이 양보를 할 수 있는 여지도 그들은 씨를 말라버렸습니다. 정치인은 정의로운 세상 만들기 힘듭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5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중에는 난청을 앓는 사람들도 있고 야맹증을 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뚱뚱한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완벽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요. 우리는 다 조금씩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것은 신체적인 게 될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완벽하게 태어난다고 해도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를 일입니다. 세금 낭비로만 보였던 지하철의 엘리베이터가 언제 내 발을 대신해줄 소중한 장치가 될 지 모를 일입니다.



거창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논하기 전에, 서로의 불완전함을 품어주고 양보할 수 있는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닐까요? 우리나라에도 데이비드 게일 같은 교수님이 많아지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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