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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May 26. 2021

서른다섯의 공부하는 알바생

삶은 배움의 연속이라지만 나는 유독 끊임없이 배워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 같다. 그래도 독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부를 좋아하긴 했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 배워서 무엇에 쓸 것인지에 대한 답 없이는 공부를 시작하진 않았었다.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서는 시민사회단체에서 국제연대 사업을 선배들 어깨 너머로 배웠고, 그러다 국제개발협력 엔지오로 넘어가 필리핀에 살게 되었다. 필리핀 현장에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일하다 보니 아무래도 더 격하게 다양한 차이에 대해 부딪치게 되었고, 그래서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인류학이란 학문을 뜬금없이 필리핀에서 공부하기도 했었다.  


내가 하던 일을 더 잘해보고 싶어서 배운 공부였지만 학교에서의 공부는 그동안 현장에서 부딪치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내 식대로 이해하던 오해들을 공부를 통해 되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배워서 앞으로 어떻게 써먹을지를 생각하기 보다 과거 현장에서의 경험과 그 곳에서의 미래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선택한 공부였기에 어찌 보면 더 화려한 미래를 떠올리기 보다는 올바른 회상과 이해를 위한 공부를 했던 것 같았다.


다만 그 덕분에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현지 사람들의 시각에서 배운다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막상 공부가 끝나고 나니 그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데 그들도 틀리거나 맞을 수도 있는, 우리는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모두 가진 불완전한 사람들이다는, 어찌보면 불완전성에 대한 진정한 평등을 알게 되고 나니 더 이상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분야에 예전처럼 내 이상과 목표만으로 애정이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 그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해서 배운 공부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는 아쉬움이 제대로 풀리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뜬금없이 독일로 넘어오게 되었고, 또다시 독일어라는 언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독일어도 안되고, 그래서 내가 배운 학문도 제대로 써먹지 못할 것 같던 차에 생각과 고민의 끝이 데이터에 닿았고, 어쩌다 보니 산 넘어 산이라고 인류학을 겨우 끝내고 나니 이번엔 데이터 분석이라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이후로 펼쳐본 적이 없던 수학책을 꺼냈고 EBS 방송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서른다섯이 넘어 다시 고등학교 수학책을 살펴보는데 나는 왜 이 내용을 잘 몰랐어도 지금까지 제법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싶었고, 반대로 또 EBS 선생님들과 수업의 질이 무척 높아진 것에 한번 더 놀랐다.


내가 일찌감치 수포자의 길에 들어선 까닭은 중학교 1학년, 내 첫 번째 수학선생님때문이라고 기억한다. 그 분은 지금와서 말씀드리기엔 죄송하지만 자신의 수학을 가르치기 부족한 능력을 회초리와 글씨체로 가리려고 노력하신 분 같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수학을 특별히 싫어하기는 커녕 오히려 수학의 새로운 개념들이 나올 때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즐거움도 느낄 줄 알았었다. 그런데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 그 즐거움을 첫 시간부터 무서움으로 바꿔 놓으셨다. 첫 시간부터 그 선생님은 회초리를 들고 나타나셨는데, 보여주기로만 쓰실 줄 알았던 그 회초리를 정말로 문제를 틀리거나 혹은 노트 정리의 글씨가 예쁘지 않은 학생들에게 사용하셨다. 글씨도 예쁘고 노트 정리도 제법 잘했던 나는 노트 정리로는 맞을 일은 없었는데 나의 노트가 교과서 못지않게 질서 정연하게 기록되는 것과는 반대로 수학 성적과 수학에 대한 나의 애정은 급격히 무너졌고, 거의 사라진 듯했다.


그렇게 잊고 있던 수학 문제들을 거의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고 강의를 듣는데 선생님이 어찌나 재밌으신지 복잡한 수학 문제는 여전히 썩 내키진 않지만 선생님의 수업이 듣고 싶어 강의를 꾸준히 찾게 된다. 선생님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서른이 한참 넘어서 다시 한번 느끼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매일 같이 한다고 느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어떻게 하루 12시간을 넘게 학교에 있고 책상에 앉아 있었나 싶은데 서른다섯이 되어 혼자 집에 죽치고 앉아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정말 공부만 하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산책하러 더 나가고 싶어 지고, 괜히 더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는데, 서른다섯이 된 지금은 그렇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도, 학교도, 제약과 규제도 없기 때문에 공부를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인 것도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바람 쐬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덕분에 대학생 시절 이후로 처음 다시 알바들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작은 음식점 알바를 하게 되어 방문한 첫날, 음식점의 모든 아르바이트생들이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고, 또 모두가 대학생들이기도 했다. 독일까지 나와서 공부를 하기 위해 또 틈틈이 알바를 하는 삶의 열심인 청년들.


어렴풋이 내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스무살, 무작정 나의 첫 해외생활은 내가 살고 있는 정반대의, 가장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남아공으로 떠났고 이를 위해 처음 1년동안 휴학을 하고 다양한 알바를 했었다. 그 생생한 기억이 어느새 10년, 15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같이 일하는 청년들을 보며 내 스무 살, 스물두 살 때가 떠올랐고, 생각보다 마음 한편이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막상 알바를 시작하기 전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그렇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석사를 끝낸 것이 고작 대학생 때 했던 그런 알바를 다시 하려고였나. 죽어라 노력해서 돌아온 곳이 다시 알바란 말인가. 무언가 허탈하기도 하고 무언가 내 나이에 맞는가 싶기도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막상 직접 가게에 가서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이 일을 지금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졌다. 한국에선 이런 단순 알바들도 사람들의 나이를 본다던데 나는 누구 하나 나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쓸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서 함께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알바를 한다는 것은 예전의 나처럼, 그리고 지금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처럼 나 역시 또다시 무언가를 배우고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더불어 나는 그동안 해보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해봤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사정상, 상황상, 경제적, 시기적 이유 때문에 우선 다른 것을 하는 아쉬움이 이제는 없어진 것 같았다.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고, 공부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해봤기 때문에 이젠 무엇을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 내 삶에 플러스알파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무 살 때 했던 알바와는 달리 지금 서른다섯의 알바하는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오랫동안 알고 온 동생들이나 친구들이 나의 근황을 들을 때면 항상 해주는 말들이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언니는, 누나는, 너는 정말 꾸준히 무언가를 배우는구나. 대단해요. 존경해요.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바라던 것이 이어지지 않아서 실패이거나 혹은 차선이 최선이 되어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뿐이었는데, 그래도 내 주변엔 나의 시도를 실패로 보지 않고 끊임없는 배움과 에너지로 이해해주는 마음 예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지금 하는 일이 꼭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더라도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겠지만, 함께 일하는 스무 살, 이십 대의 대학생 친구들도 지금 하는 알바를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공부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발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시간이 지나 직접 하게 되었을 , 그리고  모든 것을 해보고  뒤에 자신이 생각했던 행복과 같았는지 혹은  다른지 알게되는 괴리가 찾아 오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봤으면 싶어졌다. 우리네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이 죽을 때가 되어서도 가장 아쉽고 서럽다고 하시는 말씀이 바로 원없이 공부해보고 원없이 배우고 싶었다는 것을 떠올랐고,  말을 이렇게 열심히 알바를 뛰는 친구들은 하지 않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예전 나의 대학시절 때처럼 특별히 내세울만한 것도, 부나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공부는 원없이 했고, 하고 싶던 일도 원없이 해봤다는 말은   있을  같았다. 물론 그렇게 된 과정에 있어서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기까지엔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그 분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던 것들을 원없이 해보지 못한 고생이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 못한 누군가의 후회가 다른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오랫만에 다시 공부를 하며 알바를 뛰며 하고 싶은 것을 해봤기에 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들도 한번쯤은 꼭 해볼 수 있는 시간이 그 분들의 삶에도 존재하길 바라본다. 확실하진 않아도, 당장에 일어나진 않더라도, 전혀 쓸모가 없을  같던, 돈이 전혀   같지 않던, 하고 싶은 공부나 일을 해본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있어  나름대로의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는 특별한 선물을 더 많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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