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선인장 May 24. 2021

꽃을 보면 왜 기분이 좋을까

나만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드디어 발코니 문을 열어두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즐길 수 있을만한 계절이 돌아왔다. 사람 기분처럼 수시로 바뀌는 날씨를 예측한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독일 날씨를 경험하고 나서부터는 아마 독일 기상청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급변한다는 독일 날씨지만 지난달까지만 해도 추운 건 여전해서 발코니 문을 열어 놓는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간이 지났고 정말로 그런 시간이 왔다.







발코니의 문을 열어둘 수 있다는 것은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겐 드디어 우리 집 식물들에게도 바람을 마음껏 쐬게 할 수 있다는 봄소식이었다. 식물들과 첫 한 해를 보낼때만해도 나는 따사로운 햇살과 꾸준한 물줄기만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지만 한 해가 지나고 나서 가장 그리운 것이 생겼다면 바로 바람이었다. 시원하고 물을 듬뿍 주고 나서도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물을 준 것만 못하게 죽어버리는 식물들을 보며 빨리 겨울이 끝나고 원없이 식물들에게 바람을 쐬여주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정말이지 이제는 온도도 제법 따뜻해졌고 바람도 산들산들 불어왔다. 올해 들어 처음 우리집 식물들은 바람 마사지를 받았다.







봄이 되면서 창문을 열면, 거리를 걸으면 꽃향기가 코끝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한 걸은 떼면 꽃 한 무더기가 있었고, 다음 발걸음을 떼면 또 다른 꽃이 시선을 끄느라 산책하는 시간이 겨울에 비해 두세 배는 길어져 버렸다.







길을 걷다 보면 땅바닥에 붙은 아주 작은 들꽃들에 시선이 가기도 했는데, 자세히 보니 꼭 토끼풀 같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그란 풀잎 모양의 클로버가 아니라 끝이 삼각형처럼 뾰족한 클로버는 꽃이 자주색이었다. 토끼풀은 하얀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은 넓고 꽃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눈과 비와 바람과 햇살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봄날의 계절에도 정말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리와 공원엔 꽃이 한가득 피었다. 민들레가 수없이 핀 것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씨앗들이 바람에 흩날려 사방에서 피어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튤립이나 수선화는 달랐다.


식물을 한 해 키우고 나니 이젠 씨앗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는가 하면 감자처럼 조그마한 구근을 심어야만 피어나는 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에 날려 스스로 퍼지는 민들레같이 꽃이 아니라 튤립이나 수선화는 누군가 감자 같은 구근을 심어야 꽃이 필텐데 저 많은 꽃들은 누가 언제 어떻게 심은 걸까. 공원이나 정원이 아니라 도로가나 길가에 들꽃처럼 피어난 수선화나 튤립을 보면 이젠 그 꽃보다 그 꽃을 심은 사람들이 더 궁금해졌다.







올해는 유난히 추웠던 봄 날씨 때문에 벚꽃이 오월이 되어서야 만개했지만 덕분에 거의 모든 종류의 벚꽃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영어로는 Cherry Blossom, 독일어로는 Kirschblumen이라는 이름 하나로 퉁치는 벚꽃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벚꽃의 종류도 벚꽃, 살구꽃, 매화, 복숭아꽃, 자두꽃으로 하나하나 구별해주는데 한 해가 지나고 나니 정말 그 차이가 보였다. 다른 차이를 안다기보다는 작년에 내가 따먹었던 과일이 이 나무에선 체리였고, 저 나무에선 자두였고, 요 나무에선 복숭아였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꽃이 피는 시간은 짧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신기한 식물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코로나 시간에도 마법의 힘처럼 벚꽃에 홀렸던 사람들이 우리와는 반대로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는 꽃밭도 있었는데 바로 유채꽃이었다. 벚꽃길로 가는 도중, 우리는 광활한 유채꽃밭을 마주했고 나는 마땅한 바다도 없는 베를린에서 잠시나마 한국의 제주를 떠올렸다. 신혼부부나 가족, 친구 할 것 없이 커플사진을 찍는 유채꽃밭을 떠올리며 남편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는데 벚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왜 여기서 사진을 찍어? 이건 바이오 연료, 기름용 꽃인데.”


제주도와 봄과 유채꽃과 커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독일에선 처음 들어본다는 것 마냥 신기하게 바라보던 남편. 나는 제주를 떠올리면서 유채꽃밭으로 들어서는데 남편은 유기농 연료를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독일에서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올려놓았다.


“들판에 꽃들이 이렇게 많은데 혹시 집으로 가져가시는 분은 없나요?”


꽃과 식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인데도 사람들은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자연에서 빼앗아 온 것도 모자라서 이런 꽃들까지 꼭 집으로 가져가야 하겠냐고, 자연에 있는 꽃과 나무는 자연에 있는 대로 두고, 또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면 더 좋은 것이 아니냐고. 구근 식물들까지 길거리에 많이 피어나고, 또 피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두었기 때문에 그 행복을 길가는 행인 1중 한 명인 나에게까지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올해는 우리집 화단이 아닌 사람들이 지나치는 길가에, 나 혼자만이 아닌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행복해할지도 모를 꽃 한 송이를 심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불을 켜는 대신 수선화를 피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