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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May 03. 2021

불을 켜는 대신 수선화를 피웠다

식물과 함께 하는 두번째 봄



한국에선 벚꽃이 한창 피고 있다고 했지만 베를린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봄비도 아닌, 그렇다고 봄눈이라고 하기엔 아쉬운 2021년의 봄이 오고 있었다.


독일의 4월 날씨는 무척이나 변덕스럽다. 다이어리 윗칸에 오늘의 날씨를 체크하는 란이 있었는데 해와 구름과 흐림과 비까지 모두 체크하며 이게 실화인가 했더니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기분에 독일 날씨까지 분명히 한 몫을 한다. 일기장 날씨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물으니 독일 날씨 변덕스러움에는 역사도 있는지 남편이 예로 든다는 것이 독일에 관한 유명한 시 중에 4월 날씨에 대한 시가 있다고 했다.


남아공에서도 그렇고 필리핀에서도 그렇고 날씨는 생각보다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괜히 영국 날씨, 독일 날씨 하는 것도 아닐테고, 이미 그렇게 오래전 부터 일어나는 일이라니 별수가 있나. 나는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세상 만큼이나 날씨도 이렇게 어수선한대도 숲 속의 새싹들은 자신들의 시간에 따라 피어났다. 아직 지난해부터 남겨진 갈대와 그만큼이나 차가운 날씨가 지금이 가을인지 봄인지 헷갈리긴 했지만, 분명 나뭇가지엔 꽃봉우리가 차오르고 있었고 하얀 아지랑이들이 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만큼 화사하고 광범위하진 않았지만 나무 하나하나 꽃들 하나하나, 하나가 지면 또 하나가 피어나며 작지만 따뜻하게 봄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작나무의 하얀색과 벚꽃의 하얀색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봄과 겨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날씨. 지난해보단 한참 늦은 개화 때문에 벚꽃거리를 볼 순 없었지만 대신 올해엔 화사하게 핀 벚꽃 나무 한그루 앞에 진을 치고 나무 한그루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한그루였지만 수백 수천 수만개의 꽃송이가 있었고, 한 그루만으로도 벚꽃이 가득한 봄인 것 같았다.






독일의 집들은 왜 알록달록할까 가끔씩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두해가 지나며 떠올려본 상상은 이 흐린 구름낀 날씨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집안의 조명 색깔도 그렇고 건물색도 그렇고 이것마저 획일적이고 단조롭다면 독일의 긴긴 가을 겨울은 얼마나 더 우울해질수 있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조로운 일상에 코로나까지 겹친 특이한 인류의 시간 속에서 어쩌면 그래서 나는 집을 색칠하는 대신 집 안에 색을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지난 가을 구근만 샀다가 시기가 맞지 않아 월동을 시켰던 칼라디움 싹에서 초록 이파리 위에 무려 핑크색과 하얀색 점박이가 가득찬 잎이 자랐다. 덕분에 집 안 색이 두개가 늘어난 느낌.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괜시리 화분을 눈 앞에 가져다 놓고 한참을 봤다. 네가  때가 되면 이렇게 피어나듯이 나에게도 또 피어날 시간이 올거라고. 달달한 티라미수와 씁쓸한 커피를 직접 만들어 먹으며 카페에 못가는 일상을 잃어버린 씁쓸함이 있듯, 또 이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티라미수도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겠냐며 친구 대신 칼라디움에게 말을 건네본다.






잠깐 비췄다 사라지는 햇살이 아쉬운 사월은 대신 햇살만큼이나 환한 수선화를 안겨준 것 같았다. 수선화 한다발이 4월의 만우절 거짓말처럼 1유로. 정말 1유로의 행복이자 햇빛의 대체제인 것 같다. 괜시리 밥먹을 때 수선화 한 다발을 한참이나 조명처럼 밝혀두었다. 따뜻한 햇살에겐 특정한 색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가지 색을 골라야 한다면 분명 수선화 같은 환한 노란색일 거라고 생각했다.






매번 흐리기만 하던 날씨가 거짓말처럼 환하게 비추는 날이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할 것 없이 정말 공원으로 나서게 된다. 유럽 풍경 속엔 왜 꼭 공원이 있고 또 그렇게 넋을 놓고 사람들이 풀밭에 앉아 있는지 몰랐는데 독일의 가을겨울을 두번 겪고 나니 알 듯도 했다. 남아공이나 필리핀에선 너무나 자비로운 햇빛에 감사한지 모르고 살았는데 독일에 오니 나도 몰래 몸이 저절로 햇살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자외선이고 뭐고 그냥 햇살이 하루에 한 번이라고 나와주면 좋겠다.





올해 들어 처음 봄날 같은 날씨에 들뜬 나머지 코로나 테스트를 하고서라도 오랫만에 꽃시장에 들렀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화려한 칼라디움들이 무더기로 빛을 내고 있었다. 작년 이맘 즈음, 어쩌면 코로나 덕분에 처음 식물시장에 발을 들여놓곤 어느새 한 해가 지나 있었다. 한 사람을 잘 알고 싶다면 사계절을 겪어봐야 한다더니, 정말이지 그랬다. 독일에선 사람도, 그리고 식물들도 사계절, 특히 가을 겨울을 꼭 한 번쯤은 같이 겪어봐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식물들을 키우며 처음 겨울을 났던 나는 오랫만에 들어선 꽃시장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예쁜, 혹은 마음에 드는 식물이 보이면 한껏 들뜨다가도 마지막엔 항상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이 식물을 죽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을까? 과연 이 식물은 우리집 조건에서 잘 자랄수 있을까? 이제 시작된 봄이었지만 머릿속에선 어느새 이 식물과 보낼 여름과 가을 겨울까지 떠올랐고, 처음으로 꽃집까지 가서 어떤 작은 식물조차도 사오지 않았다. 한껏 들떠서 집을 나선 내가 빈손으로 오니 남편은 내가 아파서 꽃집을 가지 않은 줄 알았는데, 정말이지 한 해 전만 해도 알 수 없었던 오묘한 감정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래도 봄은 오고 세상이 온통 자기만의 힘이 있는대로 무언가를 피워내는데 이 한 번 가면 오지 않을 올해의 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다시 흙을 꺼냈다. 작년에 처음 심은 샐러드와 야채들로 두계절 밥상을 제법 채웠었다. 식물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친구가 준 야채 씨앗 달력을 뜯어 베란다 화단에 심어줬다. 종이에 씨앗이 심겨진 것도 예쁜데 그 위에 단아하게 그려진 그림까지 보니 흙 속에만 묻혀두기 아쉬웠지만 그래도 농사엔 다 때가 있다고 했으니 올해 첫 삽을 떴다.







남편과 함께 씨앗을 심고 토토로에서 나왔던 기원처럼 온몸으로 씨앗이 흙을 뚫고 태어나주기를 춤을 추고 나서 이 주 정도가 지나고 나니 정말이지 씨앗들이 뿅뿅 튀어나왔다. 작년에 남겨두었던 꽃씨들까지 모두  저마다 다르지만 한결같이 귀여운 모양으로 태어났다.







겨울 내내 움츠러 들었던 자신감이 새로 틔워낸 새싹처럼 아주 조금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고, 건조한 우리집에서 키우기 조금은 수월할 것 같은 이 감자같은 아이를 새로 키우기 시작했다. 감자 머리 위에 피어난 작은 초록잎이 자라면 아주 작은 연꽃잎처럼 진녹색의 동글동글한 이파리들을 키워내는데 과연 올해 그 잎을 보게 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과감하게 지금 심어야 하는 꽃들의 구근을 사보기로 했다. 어차피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는 식물들이라면 차라리 지더라도 한번 활짝 필 수 있는 꽃을 키워보고 싶어졌다. 게다가 그 꽃이 구근 식물이라면 꽃이 지고 나서도 구근을 잘 보관해두면 한 두해는 더 피워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인터넷으로 처음 구근 꽃들을 구매했다.


칼라디움도 막상 화려하게 다 핀 화원의 아이들은 구근이 멀쩡한 아이들을 찾는 것이 한 해를 겪어보니 알게 되었고, 구근에서부터 이파리까지 한 번 피워낸 우리집 칼라디움을 보니 한번 더 도전해보기로 했다. 식물을 키운지는 한 해가 다 되었지만 구근식물은 올해가 처음. 앞으로 나는 또 얼마나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알게 될까?





한 해동안 특별한 정리함 없이 이래 저래 화훼도구들을 분리해둔 나를 보며 내가 꾸준히 식물 키우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은 봄을 맞아 작은 정리함을 선물해주었다. 화분과 흙과 작은 도구들을 이래저래 닮고 나니 집 안에 흩어져있던 것들이 한 공간 안에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 봄맞이 대청소를 마친것처럼 기분도 상쾌해졌다.







어느새 봄의 절반이 지난 오월이지만 여전히 해보다는 구름이 잔뜩 낀 긴팔을 입어도 쌀쌀한 2021년의 봄. 올해 처음 도전해보는 우리집 화분 속 구근 식물들이 얼마나, 어떻게 자라날지. 무엇하나 쉽사리 계획하고 기대하기 어려운 지금, 나는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기대를 또 한 번 피워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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