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올림픽 첫 금메달, 하이딜린 디아즈
시작하기도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도쿄 올림픽이었지만, 올림픽 경기들이 진행될 수록 운동선수들에게만큼은 오랜시간 단련해온 자신들의 노력을 겨루어 볼 수 있는 특별한 행사라는 것을 알게되는 시간이다. 코로나 때문에 올림픽이 한 해 미뤄지는 동안, 그 일년의 시간을 선수 한 명 한 명의 시간들로 곱한다면 수십, 수백년의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올림픽을 참가하는 국가로써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나라들이 있다.
아직 올림픽 경기들을 치룬 날들보다 남은 날들이 더 많지만, 선수 개개인의 첫 금메달뿐만 아니라 한 국가로써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의 영광을 가져간 나라들이 생겼다. 바로 필리핀과 버뮤다이다. 우리에겐 어린 시절 잘 지나가던 비행기나 배가 갑작스레 사라지는 미스테리로만 알고 있던 버뮤다 삼각지대의 버뮤다였는데, 북대서양에 위치한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여전히 영국령의 국가라 버뮤다의 국가도 영국 국가를 사용하지만 사실 1936년부터 올림픽에서 버뮤다라는 이름으로 참가해왔고, 올해 처음 여성 철인 3종 경기에서 첫 금메달을 얻게 되어 버뮤다가 한 나라임을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지금 나의 페이스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또 하나의 첫 금메달은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첫 올림픽을 참가한 해가 1924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번 2021년, 첫 금메달을 따게 됨으로써 정말 거의 백년만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얻게 되었다. 백년만의 금메달이라는 타이틀답게 필리핀의 모든 매체들 뿐만 아니라 외신의 의미있는 금메달로도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필리핀 내에서 더 많이 뉴스가 오르는 내용은 그녀의 스토리와 필리핀 정부의 부족했던 지원이었다.
내가 처음 그녀에 관한 피드를 읽게 된 것은 바로 올림픽 출전 전에 올렸던 그녀의 개인 피드였다. 필리핀 현지 매체가 인용한 그녀의 글 중 제목에서 언급된 'hirap na hirap na ako'라는 따갈로그의 뜻은 '제가 정말 정말 어렵습니다.'라는 의미인데 본문의 내용과 함께 덧붙이자면 그녀는 도쿄 올림픽에 꼭 나가고 싶은데 기업이든 개인이든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꼭 얻을 수 있다면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꼭 가져오겠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었다.
이미 2번의 올림픽에 참여했고 지난 리우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거머줬기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는 당연히 정부나 기업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서 금메달을 얻었겠구나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도쿄 올림픽 직전까지도 제대로 된 정부의 후원을 받지 못했고, 그녀 스스로 그녀를 후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결국 정말로 금메달을 거머쥐게 되어 그렇게 많이 웃고 또 감사해하고 또 기쁨의 눈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백년동안 기다려온 올림픽의 무게를 결국에 들어올리던 그 날, 필리핀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국정연설인 SONA가 진행되는 날이었다. SONA는 일년에 딱 한 번, 필리핀의 대통령이 국회에서 국정연설을 하는 날로 한 해의 필리핀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꼽힌다.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sns매체 중 하나인 페이스북에는 그녀의 도움을 호소하는 메세지와 더불어 두테르테 대통령의 SONA 연설, 그리고 정부의 무관심했던 지원을 비판하는 언론의 뉴스들이 도배되었다. 결국 오늘 이례적으로 필리핀의 청와대 격인 말라까냥궁에서는 그동안 필리핀의 체육인들에 대한 지원이 소홀했음을 인정하는 기사를 냈다.
필리핀에서의 인기 종목인 복싱이나 농구는 비교적 나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스포츠는 비인기종목이고 게다가 농구와 복싱만 해도 남성들의 지지가 많은 편이라 여성 스포츠인이 사과를 받아냈다는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그 상대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고집에 못지 않은 두테르테 대통령. 왠만해서는 자신의 기준을 밀고 나가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해당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는 기사는 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선한데, 백년동안 기다려온 금메달 만큼이나 그동안 기본적인 지원도 받지 못했던 스포츠인들의 상황을 알리고 이를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 또한 그녀의 업적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열악했던 스포츠인으로써의 상황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린시절도 많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필리핀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 혹은 예전엔 우리보다 잘살았지만 퇴보의 길을 걷는 나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필리핀 뿐만 아니라 많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은 지금 눈부신 경제성장의 길을 걷고 있다. 부자들의 삶은 우리나라 못지 않게 화려하고 풍족하며, 미래의 인구 수를 걱정하는 동북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필리핀만 해도 어느새 1억명의 인구를 가지고, 또 그 대부분이 40대 미만의 젊은 인력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경제불균형과 심각한 빈부격차가 있고, 부를 가진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역경, 그리고 성공신화에 더 공감하고 감동하는 경우가 많다.
디아스는 7천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에서도 특히나 소외된 섬들 중 하나로 알려진 잠보앙가 지역 사람이다. 잠보앙가는 필리핀의 가장 남쪽 섬인 민다나오섬에서도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하는데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보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브루나이가 더 가까운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 중 하나다. 외국인들에게는 특히 불미스러운 사건이 종종 일어나서 많은 나라들이 방문 금지 지역으로 지정한 곳인데 잠보앙가 시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Sulu(술루) 지역 전체가 무슬림 반군의 주요 기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곳은 필리핀과 필리핀 사람들이 경제적 수익을 그나마 크게 얻을 수 있는 관광업조차 굉장히 제한된 곳이다.
이렇게 민다나오와 술루해 지역이 국제적으로는 국제분쟁 지역 중 하나로 꼽힐 수도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처럼 사람들이 아주 살지 못하거나 모든 자원이 파괴된 그런 곳은 아니다. 섬 앞에 펼쳐진 술루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팔라완 섬과 맞닿아있는 천혜의 아름다운 산호와 열대어 서식지이며, 카톨릭과 무슬림 문화가 독특하게 섞여 필리핀 같으면서도 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에 와있는 듯한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으며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작은 비즈니스라도 사람들의 생계가 이어지고 있는 작은 섬마을, 섬도시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녀가 자란 잠보앙가라는 도시 이름은 필리핀어가 아닌 말레이어 'jambangan (꽃그릇, 꽃바구니)'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처럼 술루해를 비롯한 민다나오 지역의 지리적, 역사적 특징 때문에 필리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스페인이 300여년 전 필리핀을 카톨릭화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무슬림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지역이 바로 이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이 카톨릭 국가가 되면서 가장 저항이 심하고 또 가장 차별을 많이 받았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민다나오다. 그런 민다나오 섬의 가장 큰 도시인 다바오시티의 시장이었던 두테르테가 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민다나오섬의 사정이 조금 더 나아졌을까 싶지만 여전히 부자들은 더 넉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힘들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디아스의 경우는 후자에 가까웠던 듯 하다. 역도를 하게 된 이유도 어릴적부터 직접 먼 곳까지 가서 무거운 물동이를 옮겨와야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고 가볍게 물을 옮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어릴적 꿈은 은행에서 돈을 많이 만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릴적부터 물을 길러온 힘이 남달라지게 되었는지 역도에 소질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후 결혼도 하게 되고 아이도 낳게 되면서 역도의 꿈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필리핀 내에서도 정말 엄청난 부의 격차가 있고, 또 그만큼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또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필리핀의 첫 금메달을 딴 그녀 역시 어느 유명한 가문에서 어릴적부터 해보지 않은 스포츠가 없어서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역도를 만나 아주 든든한 개인후원을 받으며 탄탄대로로 올림픽 은메달과 금메달까지 딴 것은 아닐까 싶었었다.
그런데 올림픽 은메달을 따고서도 그녀 스스로 펀딩 출처를 찾아내지 못하면 이번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고, 게다가 필리핀의 수많은 섬들 중에서도 잠보앙가 지역 출신이었고 또 한 아이의 어머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녀의 올림픽 도전기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무척이나 'hirap na hirap ako' 정말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무거운 삶과 역도의 무게를 번쩍 들어올린 그녀가 더 멋있게 느껴진 이유가 아니었을까.
필리핀은 국위선양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특별하다. 가장 대중적인 이벤트 중 하나가 바로 미스유니버스인데, 필리핀에게 세계 최고의 타이틀을 달게 해주는 몇 안되는 세계적인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미스 유니버스가 되는 해에는 티비 광고, 드라마, 전광판에는 그녀들의 얼굴로 도배가 되며, 또 미스유니버스 이벤트가 끝나고 처음 필리핀에 방문할 때에는 우리나라의 테헤란로 같은 시내의 가장 중심지에서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한다. 필리핀에게 백년만의 첫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하이딜린 디아즈가 도쿄에서 마닐라로 돌아오는 날, 필리핀 사람들이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그녀를 반겨줄지 무척 기대가 된다. 그동안의 미스 유니버스와는 달리 그녀는 그녀의 금메달뿐만 아니라 그녀의 스토리로 필리핀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남을 것 같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필리핀의 전설적인 복서, 매니 파퀴아오처럼 말이다. 다만 이번 다가오는 필리핀 대선에 유력한 후보로 파퀴아오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는 복서로서의 커리어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써의 화려한 행보도 이어가고 있다. 며칠전 파퀴아오의 영향을 심히 우려한 두테르테 대통령이 파퀴아오를 당대표에서 끌어내리기 전까지, 상하원으로 나눠진 필리핀의 의회에서 그는 상원 국회의원이며 작년에 무려 집권당대표로 활동했다.
필리핀 정치는 오랫동안 이어온 대토지 소유주의 가문이나 섬지역마다 나눠진 몇몇 정치가문들이 독점하는 상태라 일반 사람들이 유명한 정치인이 되는 몇 안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포츠나 연예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을 끌어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느님처럼 필리핀에서 파퀴아오는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가 정치판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금이 갈 때 즘에 다시 복싱경기가 하나 치뤄지면 다시 그의 이미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회복되곤 했다.
하이딜린 디아즈는 올해 30살로 앞으로 그녀가 그동안 받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필리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것 같다. 다만 그 부와 명예가 그동안의 많은 선례들이 보여주듯 왜곡된 방향으로의 탐욕과 개인의 명예를 높이는 곳으로만 쓰이지 않기를 바라본다. 그녀가 머물었던 잠보앙가와 민다나오, 또 열악한 체육관에서의 모습을 기억해서 지금처럼 더 많이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알려주는 소중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