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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Feb 18. 2021

다른 나라의 역사 교과서의 첫 장은 언제부터 시작될까

제각각 다른 내 친구들의 공통점 중 하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즉,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를 알아야 한다."


- 정치철학자, 매킨타이어 -




고고학이 가져온 뜻밖의 질문


해외에 살다 보면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보통 시작은 BTS나 한국 드라나, 김치, 불닭볶음면처럼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나라의 정보들을 기본으로 가벼운 대화가 시작된다. 그러다 그 친구들과의 대화가 깊어가면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친구의 나라에 대한 질문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 질문은 나의 요즘 관심사와 자연스레 연결되곤 했는데, 학교에서 고고학을 배우던 시절, 나에게 떠오른 질문은 바로 다른 나라의 역사교과서였다.


내 인생 자체가 예측한 대로 흘러간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필리핀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배우게 될 거라곤 인류학 석사과정을 지원했을 때에도 알지 못했다. 고고학은 인류학 전공의 필수 전공과목 중 하나였고, 그렇게 얼떨결에 필수로 듣게 된 고고학 수업 첫 시간, 나는 필리핀 땅에서 고조선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고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나도 많은 사람들처럼 고고학은 땅을 파는 학문인줄 알았지만, 교수님과 전공서적은 첫시간부터 고고학은 무척 '과학적'이라고 했다.


어떻게 고고학이 과학적일까에 대한 나의 불신은 내 뿌리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단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분명 국사 시간 언제나 단군할아버지로부터 우리나라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기억을 뒤져봐도 그것이 과학적인 의도로 나에게 설명이 되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단군 할아버지의 개국 스토리가 신화의 형태로 전래되어 왔지만, 그 신화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를 아울러 우리의 조상과 조상과 조상들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런 신화도 오래된 믿음이 되어 헌법에 명시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게 된다. 단군할아버지가 그 훌륭한 예였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나에게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북한, 한국 드라마, 기생충 등 모두가 알 법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아주 가끔은 친구의 질문이 꽤 깊고 날카로울 땐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고유한 특징으로 단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이라도 우리나라의 기원, 시작을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다면 바로 서기 2333년, 정확한 숫자 연도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 숫자가 사실인지 아닌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순 없어도 우리나라가, 한민족이라는 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너무나도 명확한 숫자인 기원전 2333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기원전 2333년을 기억하고 그렇다고 믿게 되었을까? 가끔은 진실인지 사실인지를 확실히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조선의 대부분이 지금은 북한 땅이라 아직 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얼버무리고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도 했지만 나의 궁금증도 커지긴 했다.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 숫자와 단군 할아버지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의 뿌리고 시작이라는 것을 믿었지만,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고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다른 나라들의 단군 할아버지, 그들의 시작점도 궁금해졌다.


그렇게 나에겐 조금 더 가까워진 외국인 친구들이 생기면 물어보게 되는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너희 나라는 언제 시작되었어? 그러니까 여기는 국사시간에 역사를 배우면 그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는 거야?"


그러면 친구들은 얼마 지나지 않은, 혹은 아주 오래된 학창 시절 기억 속을 뒤적여 추억들을 나눠주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의 국적이 하나 둘 쌓여 가면서, 나는 친구들의 추억 속에서 흥미로운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군가 '발견'한 나라들


생각보다 많은 나라들의 역사 교과서들이 항상 저 멀리 바닷가에서 누군가가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의 고대 왕국 '상 닐라 우타마'라는 왕자님이 표류해서 지금의 싱가포르 땅을 '발견'하고 바닷가에 있던 사자를 보고 싱가푸라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겐 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도 사실 '본토'라고 불리던 유럽 사람들에게 '발견'된, 그들에겐 역사가 겨우 500년 혹은 250년이 채 안 되는 신대륙, 신생국가로 시작한다. 하지만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그것은 그들에게나 '신'대륙이었을, 기록을 남긴 사람을 기준으로 문서화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들이 그 땅을 발견하기 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 나름의 역사가 있었다. 그렇게 지금 미국이 있는 땅의 역사가 신대륙 발견이라는 사건에서 시작된 시간이 아님에도 미래의 우리들은 스 땅을 '발견'한 시점부터 역사라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 스페인에서 항해를 떠난 포르투갈의 탐험가 마젤란이 바닷가에서 어느 땅을 또 '발견'하였고, 그 당시 자신의 항해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준 스페인 국왕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필리핀'이라고 이름의 나라가 있었다.


나에겐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기 2333년이란 정확한 년도를 기억하는 것처럼 세상의 많은 나라들의 역사가 누군가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무척 신기하게 다가왔다. 역사라는 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나라들의 공교육에서 가르쳐지는 그들의 역사가 자신들의 조상이 직접 적어 내려 간 시간보다 그들의 땅을 밖에서 '발견'한 사람이 적어놓은 기록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구석기, 신석기가 지나고 문명사회가 구축된 이후로, 인간에게는 무척 기나긴 시간일 수 있는 이천 년 동안 수많은 나라들이 흥하고 망했다. 그래서 사실 우리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언제 시작했는지 그 옛날부터 누군가 기록을 하고 남긴 것도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조상 대대로 믿고 그 믿음이 현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이런 상상한 것을 믿을 수 있는 힘은 인간만의 매우 독특한 능력이라 때로는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힘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런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잇는 국가라는 이름의 힘은 국가들마다 자신들의 국기를 앞에 두고 다른 나라들과 승부를 벌일 때,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특히나 더 와 닿는데, 그 환희와 마음이 뜨거워지는 정도는 아마 나라들이 각자 자신들이 알고 있는 뿌리의 시간에 비례하지 않을까 싶었다.


예를 들면 중국과 인도,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등 아주 오래된 고대시절부터 심지어는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처럼 상대적으로 근대에 만들어진 국가들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누가 자신들의 나라를 시작했는지, 그래서 우리의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고 믿는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정말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자신들은 이 땅에 오래 살아왔음에도 정작 누가 언제 어떻게 자신들이 이 땅에 와서 살게 되었고 살아왔는지를 모르게 되면, 게다가 자신들의 것들은 철저하게 짓밟히거나 지워지고 자신들을 어느 날 '발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입식으로 가르치게 된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현지의 사람들이라도 자신들의 고유의 것보다 새로운 것들에 더 익숙해지고 동경하게 되는 것 같았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처럼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스페인,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세 나라의 통치를 무려 약 3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받았다는 것이다. 세 나라 중에서도 특히 스페인은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71년부터 1898년까지 무려 327년을 통치했다. 남아메리카와 필리핀까지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확보했던 스페인이었던 만큼 식민통치를 하는 나라와 그 정책에 따라 식민통치의 강도는 다르기도 했지만, 특히 초창기 가톨릭 선교로 무장한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철저하고 지독하게 현지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말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척 중요했다. 언어를 가진 자가 역사를 기록한다고 하기에 우리는 언어는 곧 역사, 기록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사실 모든 언어가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문화권은 언어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지만, 또 어떤 문화권은 언어를 기록보다는 전승, 말과 말 혹은 노래와 춤으로 이어 나가기도 한다. 고대의 필리핀이 후자에 속하는 경우였고, 사실 이러한 성격의 언어는 동남아시아 민족들의 경우 훨씬 보편적이었다. 우리는 한자와 한글 문화권에 살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당연히 쓰기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사실 노래와 춤과 전승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는 민족들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게 된다.




지워진 이야기들을 다시 살려내는 사람들


그래서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그리고 더 크게는 근대 이후 다른 나라에 의해 식민지배를 철저히 혹은 오랫동안 받았던, 역사교과서의 시작이 누군가의 '발견'으로 시작되는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 외에 몇 가지 더 덧붙여서 생각해야 할 키워드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탈식민주의적인 관점이다.


탈식민주의에 대한 전문적인 정의는 많겠지만 개인적으로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발견한 이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염두해야 할 세 가지 배경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첫째. 필리핀은 식민 경험의 역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그 배경은 식민 경험이 한 세대 안에서 마무리되었던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둘째.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필리핀 혹은 동남아 혹은 제3세계라고 일컬어지는 나라들 중 역사책의 시작 누군가의 '발견'으로 시작한다면 그 역사를 누가 왜 쓰게 되었는지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지워지고 잊힌 것들이 있다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나라의 진짜 모습을 모두 본 것이 아니다. 셋째. 그런데 이러한 사실과 잊힌 것들이 무엇인지는 현지인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필리핀 사람들이라고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숨겨진 역사나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쓰인 기록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보이는 것만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 그렇게 쓰인 것들과 지워진 것들이 공존하는 것이 오랜 식민지 이후, 탈식민지 이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지금 필리핀과 더불어 많은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상황이다. 그래서 인류학자라면 세계 어디에 있든 인간에 대해 연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특히 필리핀의 인류학자들에게는 다양한 국내 이슈와 더불어 필리핀이 스페인에게 정복되기 전,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혹은 기록은 있었지만 철저하게 지워졌던 필리핀 고유의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 단군 할아버지 같은 그들의 잊어버린 뿌리를 찾아 이제는 스페인 사람들이나 미국, 일본 사람들이 아닌 필리핀 사람들 스스로 다시 이어가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곳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게 된, 누가 언제 어떻게 그 땅을 발견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기록을 남긴 외부인이 쓴 기록의 시작이지, 그전부터 그곳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역사까지 포함된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역사라 함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역사로 생각하고, 그렇게 기록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만 알게 되고, 그것을 배우면서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그들의 역사는 그렇다고 '발견'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알 턱이 없는 지금의 필리핀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에겐 전통문화가 없어요."


필리핀 사람들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고유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필리핀의 가장 남쪽, 민다나오 섬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에 대한 에스노 그라피를 적은 인류학자는 현장조사 초반에 현지 사람들과 라포를 형성하려 산속을 방문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했던 반응이 이 말이었다고 했다.


"우리에게 남은 문화가 없는데 도대체 무슨 문화를 연구하러 온다는 건가요?"


처음에는 나도 필리핀에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처럼 왜 이렇게 고유의 문화가 없지? 필리핀은 왜 이렇게 맛있는 고유의 필리핀 음식이 없을까? 필리핀은 정말 문화가 별로 없는 것일까? 싶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 문화가 있고, 문화가 있는 곳에 사람이 있듯이 필리핀에는 문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고, 잘 포장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현지 사람들에게도 잘 환영받지 못했던 아주 작지만 다양한 문화들이 아직 남아있다. 그 문화들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 대륙이 움직여 형성된 6500만 년 전 판게아 시절로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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