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많은 전공들 중에
국민 대부분이 수능을 보고, 또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들어가며, 대학에 들어가는 그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은 대학에서 공부할 학과, 전공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수많은 대학생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 수많은 전공들 중 특별히 자기가 고른 그 하나의 전공을 선택하게 된 걸까? 저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하나 둘 있을 텐데, 나에게도 잊히지 않은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필리핀에서였다.
“넌 인류학을 공부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
필리핀 친구와 같이 저녁을 먹는데 뜬금없이 그가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내가 찰떡같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면 내 전공이 바뀌었을까 궁금한데, 문제는 내가 인류학이라는 단어를 몰랐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나보다 훨씬 학구적이기도 한 친구여서 가끔씩 그 친구랑 이야기하면 내가 못 알아듣는 영어 단어들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단어들 중에 하나이겠거니 하고 그냥 넘어갈 때가 있었는데, 인류학이라는 영어 단어도 그중 하나였다.
“I think you will enjoy anthropology. “
그런데 그 친구가 한참 지나 다시 만났을 때에도 내게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지난번에도 들은 것 같았는데, 자기가 했던 말을 그새 잊어버렸나 싶으면서도, 도대체 그 “Anthro 뭐시기”가 도대체 뭐길래 나에게 두 번이나 추천하는지 궁금해서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다시 물었다.
“근데 나 사실은 Anthro - 뭐시기 가 뭔지 잘 몰라. 스펠링 좀 다시 알려줘 봐. 뭐라고?”
그는 그제야 왜 내 반응이 싱거웠는지 이해가 간 듯 다시 스펠링 하나하나를 나에게 불러줬다.
“A n t h r o p o l o g y”
세상에. 스펠링을 모두 다 잘 받아 적었는데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생전 처음 들어본 듯한 단어였다는 것. 무슨 스펠링이 이렇게 긴 거냐고, 이게 도대체 뭔데 나에게 두 번이나 추천하는 거냐고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 거리니, 나보다 더 똑똑한 그 애는 바로 더 나은 해답을 제시했다.
“영어로 모르겠으면 한국어로 찾아보면 되잖아.”
맞다. 나에게는 한국어가 있었다. 친구가 알려준 그 Anthro 뭐시기를 냉큼 한국 포털 사이트에 다시 검색해보았다. Anthropology. 앤thㅡ로폴로기. 인류학.
“인류학? 야, 나 한국어로 찾았는데도 모르겠는데ㅠㅜ. 도대체 이게 뭔데 나는 한국어로 찾아도 모르겠는데, 넌 이게 나랑 잘 맞겠다고 말하는 건데 ㅠㅜ. 인류학이 도대체 뭐야…“
그 친구는 나를 약 올리는 맛이 들었는지, 궁금해서 돌아가실 것 같은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끝까지 알려주지 않으며 말했다.
“집에 가서 한 번 찬찬히 살펴봐봐. 인류학이 뭔지, 왜 내가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한 것 같은지.”
집에 돌아온 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평소와는 달리 바로 노트북을 켜고 인류학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초록 창의 가장 첫머리에 인류학에 대한 정의가 나왔다.
“인류학(人類學, anthropology)이란 그리스어 anthropos(인간)와 logos(학문, 지식)가 합쳐진 말로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니. 철학도 인간에 대한 학문이 아닌가? 철학을 떠나 모든 사회인문학 심지어는 인간들이 연구하는 모든 학문이 곧 인간에 대한 학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인류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쭈욱 읽어 내려가면서 인류학이란 정말 인간에 대한 학문인데, 우리가 어릴 적부터 흔히 듣던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몸과 마음 (또는 생각, 정신), 그리고 그 사회를 포괄해서 연구하는, 그야말로 광범위한 학문이 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내가 잘 모르는 몸, 물질에 대한 생물인류학은 제외하고, 그렇다면 내가 더 관심 있고 졸아하는 사회학이나 심리학과 인류학은 어떻게 다르지라고 궁금해하던 찰나,
“저명한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인류학과 사회학(社會學, sociology)이 구분되는 근거로 인류학이 가진 방법론적 특징을 거론하였다. “
그래. 그래서 그 특징이 뭐냐고 물어보려고 하던 순간, 그 답이 이어졌다.
“이때 말하는 방법론이란 바로 현지조사를 말하며, 현지조사가 인류학 고유의 방법론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 현지 언어를 습득하고, 현지에 장기 체재하며, 현지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동참하면서 수행하는 연구 방법을 주창하였는데, 이상적인 체재기간은 최소한 일 년 이상이라고 보았다.”
순간, 생각했다.
‘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스크롤을 쭈욱 내려가는데, 다시 한번 나를 멈추게 한 구절이 나타났다.
“인류학적 현지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방법은 참여관찰이다. 참여관찰은 말 그대로 현지사회의 삶과 일상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관찰을 하는 연구방법을 말한다. … 인류학적 현지조사는 실험 상황이 아니고 실제 삶의 한가운데서 진행되며 표본조사가 아니라 일상에서 경험을 통해 수집한 자료가 핵심이 된다. “
순간, 또 대답했다.
‘어? 나 지금 참여관찰이라는 거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현지사회의 삶과 일상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관찰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문득 인류학의 대표적인 두 가지 연구방법론을 들었을 때,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본 인류학이라는 낯선 학문 위에 낯익은 나의 일상들이 겹쳐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이미 나의 현장에서 인류학적 연구 비스무리한 것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직접 살면서 실행하고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던 것을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 친구의 눈에는 내가 이미 인류학 비스무리한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그 친구와 그렇게 두 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이유는 바로 미래에 대한 진로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에서 어느 한 환경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어느 국제개발 단체의 코이카 국제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필리핀에 살게 된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참이었다.
프로젝트의 계약 기간은 끝나가고 있었고, 연장을 하려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국제개발 현장에서 현지 스텝들과 현지 사람들과 매일같이 함께 살고 일하면서 느끼게 된 것들이 나를 현장이 아닌 학교로 마음을 돌리게 만들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보통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 혹은 스스로에게라도 꼭 물어보는 스타일이었다. 그건 필리핀에 가서도 비슷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그 답을 얻을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언어문화 생활이 다른 사람들과 왜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가끔은 사소한 오해가 심각한 불통으로 이어질 때도 있었고, 처음에는 우리가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는 있지만 어쩌면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이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2년이란 시간이 짧으면 짧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무척 긴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 2년이면 일주일에 한 번씩만 같이 밥을 먹어도 100번이 넘을 수 있는 시간이라 우리의 오해는 한 계절이 넘어가기 전에 다행히 풀리게 되었고, 대신 나는 내가 오해했던 지점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오해의 순간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다른 것을 원해서 발생했다기보다는 우리는 같은 목표를 원하고 있었지만 서로 살아온 방식과 문화가 다르고 또 공부하고 실천한 전공이 다르다 보니 같은 목표에 닿기 위한 방법과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같이 일을 하고 있던 대부분의 현지 친구들이 공부했던 지역개발이라는 학문을 국제개발과 연관해서 현지에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와 비슷한 나이의 지역개발을 공부하는 친구를 만나 진로에 대해 고민을 나누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뜬금없이 그 앤thㅡ로 폴로지, 인류학이란 듣도 보도 못한 학문을 내 마음속에 퐁당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 들어본 그 학문이 지금껏 내가 현장에서 고이 품고 있던 지역개발학이란 학문과 이렇게 막상막하로 맞붙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녀석을 만난 것은 몇 번 되진 않았지만, 세상에는 꼭 그 말을 해주기 위해 나타난 것만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은 꼭 나에게 인류학이라는 말을 그 타이밍에 한 번, 아니 두 번은 해주려고 내 삶에 잠시 잠깐 나타난 아이인 것 같았고, 정말로 우리는 그 이후 다시 깊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 녀석이 왜 나에게 내가 물어봤던 지역개발학에 대한 답은 제대로 해주지 않은 대신, 나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인류학을 대신 추천해줬는지는 얼추 알 것 같았지만, 그런데도 물음표는 여전히 컸다.
내가 현장에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고, 그래서 인류학에서 말한다는 그 현지조사, 그리고 참여방법 비스무리한 것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바로 인류학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렇게 내가 어떤 전공으로 대학원에 가고 싶은지는 갑작스레 나타난 인류학이라는 학문과 함께 지역개발학, 2파전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나에게는 필리핀 현장 말고 그 전 환경단체에서부터 궁금해하던 학과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지속발전학과였다.
사람들은 대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냐고 후회를 하거나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사실 대학공부를 무척 좋아했다.
거의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국가에서 정해준 과목으로 정해진 범위와 점수까지 시키는 대로만 했던 것이 공부였는데, 드디어 대학에 오니까 내가 선택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된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수능과 대학이라는 목표만으로 학생들을 서열화시킨 고등학교까지의 공부가 공장식 교육이었다면, 대학에서야 말로 내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던 학문을 공부하지 언제 또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4학년이 되던 해에까지도 철학과와 신학과, 경제학과 사회학 등등 고루고루 챙겨 듣고 구경하느라 졸업을 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렇게 재밌다면 대학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전공을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였다.
어떤 해는 서로 다른 주제의 타과 수업을 듣기도 했지만 어떤 해에는 같은 주제의 과목을 다른 학과의 수업들로 채운 적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 또는 자본론이 들어간 과목을 국제관계학뿐만 아니라 정치학, 신학, 경제학, 철학, 사회복지학, 문예창작학 등의 전공수업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공부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대학원을 가고는 싶은데 한 가지 전공만 선택해서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싶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을 가야 하나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간 끝에, 나는 결국 취업을 먼저 하기로 했다. 첫째는 대학원 전공을 하나만 고르는 것이 어려워서였고, 둘째는 뭔가 다학제적인 학문을 고르고 싶은데 그게 뭔지 잘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현실과의 괴리감에 답답함이 커가는 이유는 내가 아직 현실의 경험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경험을 먼저 채우고 경험 속에서 대학원 전공을 정하 자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처음 들어가게 된 사회경험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업무가 바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기후변화 및 지속가능 발전 교육 현황에 대한 연구였다. 그때 처음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개념을 듣고, 나는 이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찾아보니 그 개념이 처음 국제사회에 나타난 해가 바로 브룬트란트 보고서가 세계 환경개발 위원회에서 발표된 1987년, 내가 태어난 해였다.
환경단체에서는 이미 빛바랜 개념이며 그린 워시 돼버렸다고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나는 괜스레 그 개념이 나와 같은 나이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가 이제 겨우 스물다섯, 첫 직장 생활을 하는 초년생인데 어찌 보면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이 아이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개념 아닌가.
게다가 사회, 경제, 환경이라는 인간 세계의 커다란 범주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다학제적인 학문이라는 것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치 지속 가능한 개발을 공부한다라는 것은 나와 같은 나이의 무언가가 같이 자라고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볼 수 있을 것 같아 더 의미가 큰 것 같았다.
이렇게 개인적인 생각까지 더해지자 나는 정말 지속가능개발학과가 있다면 대학원을 당장이라도 지원하고 싶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는 과가 없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털어도 몇 안 되는 대학의 코스들이 있었는데, 그중 내 마음을 끌어당긴 곳이 바로 스웨덴 웁살라대학교의 지속가능한 개발학과였다.
나는 경험을 차근히 쌓아서 언젠가 그 대학원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환경단체 이후 국제개발단체로 넘어가서 지역개발을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까지가 한국에서만 있었을 때의 나의 미래 청사진이었는데, 그건 필리핀에서의 현장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는지 모를 때의 이야기였다.
나는 운이 좋게 현지의 유능한 스텝들을 만났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팀으로, 떼거지로 만났다. 그건 아마 그들이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을 개발하는 청년들이라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은 자존심과 자존감은 물론 국제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품성 중 하나로 꼽는 주인의식까지 높은 보기드문 청년들이었다.
여기서 주인의식이란 특별히 어려운 국제개발용어라기 보다는 기쁜 일은 물론 슬픈 일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까지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알아가고 풀어가려하는 의식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국제개발에선 가끔 좋은 의미의 애국심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떠올려보게도 했다.
아무튼 남들이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또 그들 스스로 자국에 대해 내리는 평가가 어떠할지언정, 우선 그 땅에서 나고 자라 자신은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 땅에 대해 책임을 다해 문제들과 마주하는 현지 청년들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매번 도와주러 간다고 하던 내가, 사실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도움을 받기도 하는 현장에 있던 차에 그렇게 책임감 있는 현지 청년, 단체, 주민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서서히 국제개발에서의 나의 포지셔닝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그 지점에서 만난 것이 바로 지역개발학과, 그리고 이제는 인류학까지 마주치게 된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지속가능 발전학이 현장과 아주 떨어진 학문도 아닌 터라 프로젝트가 끝나갈수록 고민은 더 깊어갔다.
내가 원하는 것은 현장에 있으면서 답답했던 부분들을 공부를 하며 깨닫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 현장에 돌아와 더 나은 방법으로 써먹고 싶었다. 현장에 더 머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더 이상 성장한다는 느낌도 없이 고인물이나 계산기처럼 주어지고 입력된 만큼으로 똑같이 일을 하고 같은 것으로 불평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려고 그 먼 곳까지 고생하며 떠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계약 연장은 멈추고 대학원에 가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내가 가까운 미래에 가고 싶은 학과가 하나도 없어서가 아니라 궁금한 학과가 세 개나 되었다는 것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미 알았었다면 아마 그때 당장 가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스토리가 쌓이고 경험이 더해간 만큼 그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세 전공 모두 나에겐 특별한 나만의 이유들이 함께 했는데, 나는 과연 그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까.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쓰는 나만의 마지막 필살기 방법이 있다. 바로 직접 가보는 것이다.
-인류학 정의에 대한 출처-
지식백과 “인류학”: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7451&cid=44412&categoryId=44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