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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07. 2022

베를린 주변 산포시에 삽니다

어디에서 살면 좋을까라는 질문

독일 넷플릭스에도 나의 해방 일지와 우리들의 블루스가 떴다. 한국에선 이미 종영됐을 드라마의 1편을 보는 중에, 산포시가 경기도 언저리 즈음이라는 말에 내가 살던 곳이 떠올랐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 역시 1호선 종점역, 병점역 근처에서 살 때는 막차 시간에 쫓기듯 시계를 살폈고, 그 당시에는 논밭이었던 작은 도랑을 지나 학교를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그래도 병점은 경기도였으니까.


한국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물었다.


“누가 서울대로 제일 많이 편입하는지 알아?”


입학도 아닌 편입이라…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금세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신기한 질문이었다.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연고대?”


둘 다 웃었다. 서울 사람들에 비하면 산포 청년들의 삶이 불편하고 서글픈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드라마에서 보듯이, 또 내가 겪어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산포도 아닌 목포에서 온 나는 산포도 경기도, 무려 서울 바로 옆 동네였다.


그런데 산포에 비하면 한참 시골인 목포도 사실 목포 근처의 해남이나 무안이나 영암 사람들, 그리고 흑산도와 홍도를 비롯한 1004개의 신안 섬사람들에겐 도시였다. 그래도 사람들이 살고 싶은 사회문화 서비스가 있는 도시. 심지어는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제주 사람들도 목포를 뭍에 사는 육지 사람들이라고 하고, 이병헌 님이 제주 사람들에게  물건을   섬사람들은 비싸서  산다고 비꼰 상인이 있던 곳도 목포였다.


드라마 속 산포와 같은 병점에서 예전 대학 수업 시간에 듣던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월러스틴이라는 사람이 만든 이론이었는데 세계를 관찰하며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패턴에 ‘세계체제론’이라는 이름을 하나 붙였다.


복잡한 내용을 제외하고 드라마를 보며 떠오른 부분만 이야기하면 세상은 중심부와 주변부가 있는데 그 사이에 반주변부라는 곳이 있다. 중심부에 보통 모든 부와 서비스가 집중되고, 그걸 뒷받침해 주는 원료와 인력과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주변부들이 있는데, 주변부 중에서도 반주변부와 주변부를 가르는 기준은 중심부에 무언가를 ‘공급’하면 ‘반’ 주변부였고, 그 두 지역에서 ‘착취’를 당하는 지역이라면 ‘그냥’ 주변부였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중심부는 그대론데 그 주변부가 어느 지역과 비교하는지에 따라 또 다른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가 되기도 하고, 그런 모든 상대적인 관계에서도 가장 먼 주변부, 외지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목포 사람들에겐 산포도 그래도 서울 주변에 있는 반주변부씩이나 되었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목포도 섬사람들에게는 그런 서울과 한 땅에 이어져 있는 반주변부처럼 보여졌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나라 안에서도, 심지어는 수도권 안에서도 이렇게 인서울, 아웃서울 중 어디서 사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해외에 오래 살면서, 그중에서도 남반구의 나라들에서 조금 살아보며 현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들이 있었다.


“그래도 한국이잖아”


필리핀, 인도, 네팔, 콜롬비아, 가나, 남아공,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등등에서 온 친구들에겐 서울이든, 산포든, 목포든, 홍도에 살든 어쨌든 우리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내 친구들이 사는 나라들의 중심부도 어떤 곳은 우리나라의 중심부 못지않게 화려한 부와 편리한 서비스가 공존한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디서 태어나고 자라는지에 대한 환경에 따라 한국의 서울 대학생과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생이 유럽 여행을 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비자 관련 자료는 천지 차이다. 은수저의 필리핀 대학생 한 명이 흙수저의 한국 대학생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가 가진 ‘국적’ 하나 때문에 그는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은행 적금 증명서와 이터너리 등등의 서류들을 산더미처럼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대한민국 중심부에 살든 주변부에 살든 그들에게 우리는 그래도 ‘한국’ 사람이었다.


독일은 지역개발에 있어 다른 나라들보다 확실히 조금 더 균형적으로 개발된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베를린이나 뮌헨처럼 큰 도시들을 중심으로 줌인 해보면, 역시나 이곳에서도 중심부와 주변부가 있다. 베를린의 경우 우리나라의 2호선처럼 중심을 둘러싼 도시전철역들을 기점으로 부동산 값은 치솟고 사람들은 그 안에, 혹은 그 주변에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참 신기하게도 베를린에서도 도시 전철 한 라인의 가장 끝 종점 역 근처에 살고 있다.


나는 베를린에 와서도 산포시에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베를린 도시 경계에 살고 있는 나는 걸어가면 베를린 시내보다 베를린 옆 동네인 브란덴부르크의 들판이 더 가깝다. 그래서 나는 행정구역 상으로는 베를린에 살고 있었지만, 정작 베를린 시내에 가면 다른 여행객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관광을 온 것 마냥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이민을 오고 초반에는 나 역시 시내에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우리가 베를린, 유럽 하면 떠오르는 그런 유럽풍의 시티 라이프는 시내에만 있는 듯했으니까. 맛있는 레스토랑과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노천카페, 친구들과 세상 편하게 늘어져 앉아 쉬는 공원들, 그리고 그런 공간을 채우는 많은 사람들은 도시의 중심부 지역에만 많다 (물론 베를린은 그나마 커다란 중심부가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 사이즈의 고만 고만한 지역 중심부들이 여럿 있지만, 어쨌든 우리 집 근처는 아니다). 유럽에 살고, 베를린에 산다면 누구나 이런 풍경이 보이는 집에서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치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한옥이나 화려한 아파트에서 사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도시 중심에 살면 친구도 많이 더 사귈 수 있을 것 같고, 기회를 더 얻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삶에 더 재미있는 일도 생길 것 같고, 주중에도 주말에도 흥미로운 일이 더 많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나는 요즘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도시가 너무 크면 중심부 가격이 너무 높아져서 그 중심부의 가격을 여유 있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곳에서 우연히 태어나고 자라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살게 된다. 그렇게 대부분이 주변부에 살기 때문에 서로를 만나는 것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게 되고, 게다가 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있노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다 보니 나와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더 어울리게 되고 친해지면서 도시의 중심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는 삶에 익숙하게 되는 것 같았다.


독일 사람들의 특성이 약간 묻어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심에 산다고 독일 사람들과 더 특별히 친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에 있든 인사를 먼저 하고 말이라도 한 번 더 섞어본 사람들과 더 친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중심부에 살고 싶었던 이유도 생각해보면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친구를 사귀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서였는데, 요즘엔 중심부에 사는 것보다 귀농한 친구가 사는 외딴 시골 동네에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생판 모르는 지리산 자락의 작은 시골마을이 왜 갑자기 나에게 가고 싶고 살고 싶은 공간이 되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나는 깨달았다. 어쩌다 베를린의 중심부만큼이나 지리산의 작은 시골마을이 내가 살아보고 싶은 공간이 되었을까.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내 친구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생전 몰랐던 산골 마을이 갑자기 은퇴를 하면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한번 살아보고 싶은 곳으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도심이라고 꼭 내가 좋아하고 또 나를 좋아해 줄 사람들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부라고 그런 사람들이 없을 거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이제 조금은 어디로 이사를 가든 한 번 떠나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베를린이 아니어도 되고, 서울이 아니어도 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더 살고 싶어졌다.


베를린 외곽에는 각자의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 외곽의 전형적인 풍경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런 독일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단어의 정의가 조금은 달리 보인다. 그들은 정원과 집을 가꾸며 세상의 중심을 베를린, 서울이 아닌 자신의 앞마당, 주방, 서재에 두고 사는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원하며 또 그만큼의 투자를 쏟아붓기 때문에 지역과 나라마다 누구나 아는 공식적인 지리적 중심부는 존재한다. 하지만 서울과 산포, 산포와 목포, 목포와 흑산도, 그리고 그 모든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과 필리핀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러면 확고하게 느꼈던 중심부라는 개념도 관계라는 지도를 펴고 다시 보면 상대적이라는 생각에 복잡해진다.


게다가 그런 상대적인 개념들을 제쳐두고서라도 절대적으로 보이는 서울이나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중심조차도 결국에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그 중심부가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모든 사람들이 그곳이 중심부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다시 주변부가 되거나 아니면 중심부에 살아도 주변인이 돼버린 것 같은 아이러니한 공허감에 빠지게 된다.


주변부에 살았을 때는 중심부에 살면 뭔가 더 나아지고 행복해질 거란 상상을 하다가 막상 중심부에 살아도 줄곧 따라다니는 이 허전함과 무기력함은 그렇다면 과연 진짜 중심부,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공간은 어디인지를 남들이 말하는 대로가 아닌 스스로 처음 떠올려보게 된다.


주변부와 중심부를 오고 가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떠올려본 질문,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어디에서 살아야 더 좋을까. 어쩌면 중심부라는 곳은 외부에서 정해준 곳만이 아닌 내가 내 공간과 인간관계를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그 중심이 외부의 세계에서 나의 공간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중심부가 없다면 학교도, 동네도, 직장도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말하는 제일 잘 나가는 학교를 나오지 않고 동네에 살지 않고 직장에 다니지 않는 이상 언제나 나는 주변부에 살고 다니는 사람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동네에 살고 싶지라는 질문을 하더라도 남들이 말하는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 외에 내가 살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누가 뭐래도 그곳은 나에게만큼은 서울이고 중심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글쓰기라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어쩌면 중심부라는 공간을 다른 유명한 도시나 동네가 아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세계로 뒤집어버리는 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베를린 근처 산포시에 살고 있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이 글을 쓰는 중심,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말하는 중심부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중심부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면 조금 더 다양한 행복이 태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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