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티슈 한 장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by 따뜻한 선인장

독일에 온 지 6개월 정도가 지났고, 어학원을 다닌지도 3개월이 지난겨울의 어느 날. 나는 새해부터는 드디어 조금 더 독일에 대해, 그리고 베를린에 대해 더 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그 새해, 코로나가 터졌다.


12월, 중국에서 퍼진 코로나의 봉쇄는 1, 2월 우리나라를 지나 3월이 되자 유럽 전체가 강력한 봉쇄에 들어갔다. 독일 사람들에게는 주식인 빵을 만드는 베이커리와 일반 슈퍼마켓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점들이 봄이 채 오기도 전에 3개월 동안 문을 닫았고, 미용실마저 닫아버려서 남편은 아예 머리를 밀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독일의 봄이었는데, 더 이상 차갑고 심심하다 할 수도 없을 것 같던 독일의 기나긴 겨울보다 더 재미 없는 봄이었다. 친구들도 초대할 수 없어서 정말로 남편과만 모든 하루, 주말, 한 달을 보냈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집 주변의 숲이나 슈퍼마켓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곳에서 나는 인종차별 적인 발언을 들었다. 사실 독일에서 늦여름부터 겨울까지 보내는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른 나라에서는 제법 자주 들었던 그 흔한 캣콜링이나 차이니스 같은 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살았었다. 그래서 독일은 내가 다닌 다른 나라들만큼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길거리에서 흔히 듣던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적인 발언들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생각이 들던 참에 코로나가 터진 것이었다.


하루는 매주 가는 슈퍼마켓 앞에서 나에게 코로나라고 말하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다른 한 번은 숲을 지나가는데 자전거를 탄 아이들 그룹 중 한 명이 나에게 중국과 코로나를 이야기하며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 두 번 모두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았던 이유는 워낙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여 사는 베를린이라 보통은 내가 독일인인 남편과 같이 걸어가면 현지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바로 나에게 독일어를 건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과 함께 걸어가는데도 나에게 바로 코로나와 중국이라고 불렀고, 그 모든 것이 아이들에 의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베를린 사람들이었는데, 때마침 찾아온 코로나에 때마침 나의 생김새가 티브이에서 나오는 중국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터라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일의 봄이 찾아왔어도 한동안 집 밖을 나가기가 싫어졌다. 환절기 때면 누구나 걸리는 감기가 흔했지만, 버스나 지하철에 타서 기침이라도 한 번 잘못하다가는 괜스레 눈치가 더 보였고, 기침이 나와서 남들처럼 했던 것뿐인데 아시아 사람이라 눈초리를 더 받아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은 내가 잠시 여행을 와서 금방 떠날 수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어떤 곳으로 여행을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내 집이 있는 일상 생활지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종종 밖을 나서야만 했다.


그렇게 어느 날, 나오는 기침을 그나마 줄이려고 사탕 하나를 물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좌석은 모두 차있었고, 서서 가는 사람들도 제법 있던 퇴근 시간의 지하철. 코로나 때문에 한 칸씩 떨어져 앉아 가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먼지가 생겨서 자꾸 코가 간지러워졌다. 간지러운 코를 비비다가 콧물이 내려오는 것을 막으려고 고개를 숙여 코를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개를 숙여 함께 축 늘어진 나의 긴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티슈 하나가 나타났다. 순간 놀라서 옆을 보니 어떤 젊은 독일 청년이 내가 우는 줄 알고 조용히 티슈를 하나 건네고 있었다. 우는 게 아닌데, 콧물이 나와서 그런 건데 설명하려고 했지만 모두가 마스크를 쓴 상황이었고, 나는 그냥 뭔가 웃픈 마음에 냉큼 고맙다고 말하고 티슈를 받아 들었다.


그 청년은 아마 내가 머리카락을 내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터라 내 눈 주변에 눈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다만 워낙 조용하고 조심히 코를 훌쩍이고 있었기에 아마 울고 있다고 착각했었을지 모르겠다. 보통은 그렇다고 해도 내가 특별히 요청하지 않는 이상 베를린 사람들은 먼저 티슈를 건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괜스레 문화 차이와 더불어 코로나 때문에 더 경계하고 무섭다고 느껴지던 베를린 사람들이 처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뭔가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서 그가 오해했던 눈물이 핑 돌 뻔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베를린에서 만난 가장 따뜻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그 순간, 내 기억에는 따뜻한 사람이었더라도 내가 모르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내가 몇 달 전에 만났던 그 차가웠던 기차역 고객센터의 아주머니도 그 순간 나에게는 가장 차가운 사람이었을지언정 내가 모르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상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듯 그들에게도 내가 아주 잠시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만난 그 한 사람이 나에게는 그곳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그날 지하철에서 내 옆에 앉았던 그 독일 남자분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그가 건네었던 티슈 한장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차갑게만 느껴지던 독일 사람, 베를린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나의 편견 혹은 내가 만난 그 순간의 그 사람 때문에 생긴 것일 뿐, 아직 내가 모르는 베를린, 독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처럼, 독일의 겨울처럼 차갑게 닫혀 있기만 하던 내 마음이 그 티슈 한 장으로 참 신기하게도 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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