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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Sep 28. 2022

나의 포르투갈 연결고리, 케이프타운과 고아

거꾸로 항해하기


포르투갈로 떠나려고 생각하니 떠오르던 장면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 기억 속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처음 들어왔던 순간은 선명하다.


그건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태어나서 처음 해외로 나와 살아보고 싶던 곳을 찾다가 발견했던 남아공, 그곳에서 나는 뜬금없이 유럽의 가장 서쪽 끝에 있는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었다.


왜 남아공에 가서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을까? 케이프타운을 찾아보면 언제나 바늘과 실처럼 따라오던 수식어 중 하나가 희망봉이다. 그리고 그 희망봉 안에 정답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남아공에 갔을 때부터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를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을 처음 떠나보며 해외에서 처음 살아보기까지 한 케이프타운에서 나는 아프리카 대륙과 남아공에 대해 떠올렸을 뿐 한참동안 포르투갈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케이프타운에서의 계획된 시간 동안, 어쩌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대해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순간, 나는 케이프타운을 벗어나 모슬 베이라는 작은 타운에 여행을 갔었다.


사실 희망봉은 아프리카 대륙 남쪽에서도 왼쪽, 그러니까 서쪽으로 치우쳐진 곳에 위치했는데,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 끝의 가장 중간이면서도 남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이 모슬 베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모슬 베이를 찾아가기에는 약간은 외지고 조용한 어촌 타운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작은 어촌마을처럼 보이기만 하던 모슬 베이는 사실 남아프리카 남쪽 끝에 위치한 대도시 케이프타운과 포트엘리자베스를 잇는 거점지이기도 했고, 또 그 길 자체가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울 것 같은 가든 루트에 속해서 남아공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이런 스토리들과 더불어 아프리카 대륙 가장 남쪽 끝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하던 순간에, 나는 그 작은 마을에서 디아스 박물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마주치는 바다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초록 잔디밭 위에 자그마하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건축물이 하나 눈에 띄었는데, 그게 바로 박물관이었다. 그때 나는 바스코 다 가마 이후로 처음 듣는 포르투갈 사람인 바르톨로무 디아스와 엔리케 왕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뭔가 드디어 육지를 발견한 희망에 가득 찬 선원들의 얼굴들이 떠오를지 모르겠지만, 사실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폭풍의 곶이었다고 한다. 바다라는 단어만 들어도 이미 드넓은 느낌인데, 거대한 대양 두 개가 서로 맞부딪치는 곳의 바다라면 얼마나 거칠고 험난할 여정 일지 바다 근처에서만 살아본 나는 그저 상상 이상의 폭풍이 몰아치는 대양이었을 것이라 짐작해볼 뿐이었다.


지금은 어느새 21세기가 되어 한국에서 남아공을 비행기라는 최신 수단을 타고 날아가도 23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그 옛날, 배를 직접 만들어 그 배를 타고 몇 달을 걸려 어디에 있는지도 아직 잘 모르는 땅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그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궁금해졌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도 쉽지 않은 여정의 거리를 그 옛날 배를 타고 몇 달, 몇 년을 항해를 하며 길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정을 떠났던 것일까?


케이프타운의 바다를 보며 남아공에 있을 때는 그 질문을 종종 떠올렸지만, 다시 남아공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 나는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대해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나에게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필리핀 대학원에서 만났던 외국인 친구 한 명이었다.


영어를 배우러 필리핀 대학으로 가는 청년들은 제법 자주 만났지만 한 단계 높은 석사, 또는 박사 과정을 듣기 위해 필리핀 대학원으로 찾아오는 외국인 학생들은 드물었는데, 그날은 그 드문 외국인 대학원생들을 위한 학생의 밤 같은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학교에 있는 사회과학 인문 과학 음악 등 모든 과정을 탈탈 털어도 삼십 명이 채 될까 말까 한 소수의 인원인 대학원생들이었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이 아시아에서 날아온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적지만 방대한 분야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러 온 친구들의 소개를 듣다가 어쩌다 인도에서 온 친구 한 명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많은 나라와 대학들 중에 왜 하필 필리핀을 오게 되었는지를 묻게 되었는데, 친구의 답은 간단했다.


“내가 가톨릭 신자이거든.”


나는 다시 그 친구를 보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제일 큰 가톨릭 국가잖아. 가톨릭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부하고 있어.”


친구의 말을 들은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인도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 인도에도 가톨릭 신자들이 많아?”


그렇게 묻자 친구가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사조로 다시 답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 가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톨릭이라고”


그때, 나는 인도의 고아(Goa)라는 도시가 처음으로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사실 고아에서 온 인도인 친구를 그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분과 나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는 환경단체 네트워크를 통해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고아 출신이었다. 고아는 잘 사는 도시이며 겨울에 날씨가 정말 좋고 아름다운 해변에 그보다 더 맛있고 특별한 음식이 있으니 꼭 날씨 좋은 겨울에 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잘 사는 도시라니, 겨울이 제일 좋은 계절이라니, 인도의 해변이라니. 그가 말했던 모든 것들이 내가 인도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조금씩 달라서, 나는 한 번 들었던 그 고아라는 인도의 도시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바로 인도 속 가톨릭 도시라는 것.


한동안 인도하면 떠올리는 유명한 인물 중에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님도 있었지만, 그분은 그분 자체로 고유명사처럼 떠올랐을 뿐 인도하면 가톨릭보다는 힌두교나 이슬람, 불교가 떠오르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인도에 그렇게 신실한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니. 친구의 답에 나는 인도의 천주교가 궁금해졌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인도의 총인구 중 1.55% 정도만이 천주교 신자라고 나와있는데, 그 단 1.55 퍼센트, 그러니까 2 퍼센트도 되지 않은 인도인의 수가 무려 2천만 명, 거의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에 다 닿는 숫자였다. 고아는 그 2퍼센트이지만 2천만 명이나 되는 인도의 가톨릭 신자들이 특히 많이 모여 사는 도시 중 하나로 알려졌는데, 2011년 기준 고아 도시의 약 25퍼센트의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09년,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고아의 총 가톨릭 신자 인구가 도시 전체 인구의 약 80%를 차지했었다는 점이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고아라는 도시의 가톨릭 인구수도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시작점에 바로 포르투갈이 있었다.


내가 남아공 희망봉에서 봤던 포르투갈 인들의 흔적들은 결국 그들이 유럽에서 인도까지의 항해로를 개발하기 위해 포함된 과정의 일부였다. 그렇게 폭풍의 곶에서 희망봉이 되기까지 그 이름을 바꿔준 계기가 바로 인도에 있었다. 바르톨로무 디아즈에 이어 항해 길의 대서사시에 오른 바스코 다 가마가 결국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에 도착함으로써 포르투갈은 거대한 항해로 하나를 완성했다.


그 지독한 항해를 이어갈 수 있게 한 원동력에는 막강한 힘과 경제력을 얻기 위한 현실적 야망도 있었겠지만, 그와 더불어 중세 시기 이후 유럽에 널리 퍼져 전설처럼 여겨지던 프레스터 존과 그의 강력한 기독교 왕국을 찾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현재까지 연결이 되어, 그렇게 강력한 힘과 권력을 휘두르는 힌두교와 무슬림이라는 종교들 안에서도 인도 안에 2천만 명이라는 가톨릭 신자를 만들어 내는 씨앗이 되었다 (물론 올바른 방법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 때 포르투갈이 전한 인도의 카톨릭은 현재 인도 총인구 수의 약 1.5퍼센트의 사람들이 믿는다고는 하지만, 숫자로 따지면 무려 2천만 명이 넘는 인도의 가톨릭 신자들은 인도를 필리핀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은 가톨릭 신자를 보유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필리핀과 인도의 고아를 비롯한 바스코 다마가가 도착했던 인도 서남부 지역에 이렇게 오래도록 견고한 가톨릭 전통이 이어지기까지, 현재 세계적으로 포르투갈의 모험가로 알려진 사람들은 사실 초기 현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악마처럼 잔인하고 거친 정복자의 느낌이 더 강했다. 이렇게 혹독하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까지 얼마나 강력한 침략과 살육이 일어났는지는 남겨진 기록보다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는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그 나라 자체보다 그 나라 사람들이 처음 세계 각국으로 얼마나 멀리, 좋은 말로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나쁜 말로는 잔인하고 거칠게 퍼져나갔던 시대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축구를 좋아하면 호날두, 와인을 좋아하면 포르투 와인 등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따라 포르투갈과의 연결고리를 하나 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는 어쩌면 그 옛날 포르투갈인들이 그려나갔던 유럽에서 아프리카, 아시아의 항로를 정반대로 따라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그리고 그들의 시작점이었던 포르투갈에 드디어 가보게 되었다는 점이 나를 설레게 만드는 지점인 것만 같다. 남아공을 지나 인도를 지나 드디어 포르투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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