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보다 한국이 더 그리워진 여행자의 여행 준비
나는 원래 여행을 떠나기 전, 여러 방면으로 공부를 하는 편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혈기도 왕성하고 호기심도 많은데 가본 곳은 하나 없던 나의 이십 대에는 특별히 더 그랬다. 나는 보통 여행을 떠나는 기간만큼이나 혹은 여행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두고, 여행을 가는 곳에 대한 책을 읽거나 기록을 찾아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시간보다는 돈이 더 부족했기에, 그 적은 돈을 모아서 투자해 가는 만큼 더 많이 보고 기억해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워오고 싶은 마음이 컸다.
특별히 한창 국제개발 현장에서 활동을 하고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할 때는 여행도 업무와 학업의 연장선처럼 여겨졌었다. 아무래도 관련 학문이 현지에 직접 가서 살아보고 현지인들을 관찰하며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여행과 인류학의 경계가 맞닿아 있는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나라에 가나 빈부격차의 이슈나, 그들만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들, 그들 고유의 문화 보존과 환경 문제가 롤화장지처럼 끊임없이 따라 나왔는데, 그 이슈들을 살펴보다 보면 어떤 한 나라라고 해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다른 나라와 문화의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이십 대에 여행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의 경우는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지라 여행을 하면서 국제개발현장에서 겪는 미시적인 깨달음뿐만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그림의 맥락들을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만큼 공부하면서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한 흥미가 조금 떨어졌다. 한국에 살다가 외국에 나가면 그 시간이 정해진 기간만큼 한정된 느낌이고, 그래서 이번 여행이 아니면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여행 전 최대한 많이 배우고 가고 싶었다면, 지금은 이상하게 아니었다.
해외에 살다 보면 신기한 것이 여행을 다녀온 다른 나라들보다 그 모든 여행기간들을 합쳐도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내가 현재 해외생활을 하고 있는 곳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잘 모를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는 법적 주소지로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정말 맞지만 여전히 나에겐 외국이기도 한 그곳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많아져 쉽사리 글로 적어 내리지 못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껏 가장 오래 살았던 해외인 필리핀과 독일에 대한 글을 쉽사리 적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해외에 오래 살다 보니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내가 꼭 선택해서 살게 된 것보단 우연과 필연의 복합적 기운으로 오게 된 느낌이 강해서, 다른 어떤 나라라고 내가 언젠가 살아보지 못할까 싶은 생각이 은연중에 생긴 것 같다.
물론 한국은 영원히 나의 뿌리이고, 내 생각이 한국어로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으니, 한국은 나의 정체성의 변함없는 일부일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를 가는 것보다 한국에 가는 것이 더 그립고 좋아져 버리게 된 만큼, 한국에 있는 시간도,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한국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것처럼 한정되어 있는 나에겐 해외여행이라고 특별히 더 과대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과대한 의미도, 장황한 공부도 줄어든 나의 여행엔 무엇이 남았나? 어찌 보면 이제야 공부 같은 여행을 넘어 휴가 같은 여행을 알아가는 것도 같다. 리스트에 올려놓은 책들을 모두 다 읽어보지 않았어도, 그 나라의 유명한 작가나 철학가, 화가의 작품들을 모두 살펴보지 않았어도, 그 나라의 역사나 언어에 대해 제대로 탐색해보지 않았어도 여행에 가서 보이는 대로 관찰하고, 또 그곳에서의 나는 어떤 관찰자로 무엇을 발견하는지 여행 그 자체로의 순간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어찌 보면 인류학이 나에게 준 선물 같기도 한데, 바로 가설을 미리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여행을 가기 전, 무슨 가설이나 싶겠지만 나에겐 나름의 연결성이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꿨을 때 가장 충격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 또는 경제학처럼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는 학문들은 인간 세계의 현상을 과학처럼 설명할 수 있도록 가설을 먼저 세우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게 어찌 보면 기존의 나의 여행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도 같은데, 나는 최대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읽어서 여행을 떠나는 나라에 대한 되도록 많은 사전 정보를 가지려고 했었다. 어떻게 보면 사전 지식이 맞고, 비행기와 횡단 열차들이 생기기 전의 인류학자들이 현장을 직접 가보지 않아도 현지인들보다 더 세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에스노 그라피에 녹아낼 수 있는 것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정보도 맞았다. 그런데 그 정보를 지금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그 나라에 대한 내가 몰랐던 지식을 알려준 동시에 특정 이미지, 편견을 갖게 만드는 가설이기도 했다.
여행을 가서 보면 보이는 대로 이해해야 하는데, 보이기 전에 읽고 이해한 것들이 있다 보니 내가 현장에서 보는 것들이 내라 미리 만들어간 가설대로 보이기도 하고 또 읽히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의 또 다른 현명한 부분은 바로 내가 본 그 현상 외에도 또 수많은 다양한 사례들을 더해주는데, 그러면 그제야 나는 내가 읽은 그 내용들이 사전 지식이기도 했지만 또 편견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나는 또 궁금해졌다. 그 글쓴이는 왜 그런 생각을, 지식을 그 여행기에 혹은 글 속에 녹아냈던 것일까? 그러면 나의 질문은 이제 내가 여행하는 그 나라 외에 그 글을 썼던 작가들이 누구였는지가 궁금해진다. 마치 유교권 문화에 그나마 익숙한 아시아계 사람과 무슬림 문화권, 혹은 유럽인이 쓴 우리나라 여행기가 모두 다른 관점에서 다양한 한국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듯이, 또는 그런 외국인들과는 달리 지금 한국에서 세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한국 사람들이 써 내려갈 한국의 이야기가 사람 성격마다 다를 것이다.
따라서 여행을 떠나기 전, 자료들을 유독 많이 살펴보던 나의 습관은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글을 읽되 많이 읽는 것보단 오히려 누가 그 글을 언제 어떻게 썼는지 살펴보고, 자국민과 외국인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고, 자국민과 외국인 중에서도 어떤 지역, 어떤 교육 수준, 어떤 경제적 배경 등을 갖은 사람이었는지 등의 글쓴이의 배경을 더 살펴보게 된 것 같다.
교육 수준이나 경제 사회적 배경을 살피는 이유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의 글이 더 좋다는 이유가 아니라, 과거의 경우 글과 정보는 소수의 특정 계층과 젠더에 한해서 전해 내려 오는 경우가 많아 그들이 담아내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다양하게 알고 싶어 일부러 더 찾아보게 된다. 피렌체의 경우 유명한 메디치가와 예술가들이 쓴 글들만이 아니라 귀족이지만 여성이 쓴 글, 앞 동네가 아닌 뒷골목의 낡은 봉제공장의 수녀가 쓴 글 등은 내가 몰랐던 그 도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뭔가 여행이 여행을 가기 전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인데, 그래도 괜찮다:) 원래 여행은 미리 많이 보고 읽어서 알아가도 좋지만, 직접 가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음식을 먹어보고, 교통수단들을 타보고, 머물 숙소와 가볼 명소 또는 지나가는 거리를 직접 걸어보고 머물러보며 배워가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엔 서점에 출판된 서적들뿐만 아니라 브런치에 남겨진 여러 여행 브런치 책과 매거진을 통해서도 보석 같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해서 분위기를 느끼고 브런치 북들을 통해 현지에 사는 사람들과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온도차를 느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인 것 같다. 지금 내가 브런치에 검색해본 검색어는 바로 ‘포르투갈’이다. 여러분의 검색어는 무엇,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