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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Oct 25. 2022

정말 더 나은 매춘업자라는 것이 있을까

나를 필리핀 대학원에 집어 던진 영화 한 편

[주의: 지금부터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영화는 평범한 필리핀 아주머니처럼 보이는 주인공인 비링(Biring)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시작은 마닐라의 위험해 보이는 길거리를 지나 아주머니가 찾아간 성당을 보여준다. 아주머니가 열심히 잡일들을 하며 모은 그 돈을 성당에 헌금하고 그 돈을 신부님이 받아 서로에게 복과 은혜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알려주는 바로 그 뒷 장면에서 나는 영화초반부터 크게 머리 한 대를 맞았다. 아주머니가 잡일을 하던 곳이 바로 필리핀의 젊은 여성들을 일본에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속이고 성인업소에 팔아버리는 인신매매업소였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정치적 야망이나 경제적 부를 가지지 않은, 하루 근근이 벌어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는 아주머니가 인신매매업체에서 잡일을 하는 구성부터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정성껏 모아 부디 더 가난하고 부족한 이웃들을 위해 써달라고 헌금하는 첫 장면부터 나는 센델 교수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넘어서는 도덕적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인신매매단에 있을 거라면 자신이 하는 일뿐만 아니라 마음과 행동도 그만큼이나 비열하고 치졸한 사람이어야 욕하고 판단해버리기가 쉬운데, 영화 속 비링 아주머니는 일하고 있는 곳만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판단해버릴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성당에 다니시는 아주머니들 중 한 명이었다.


첫 장면부터 영화는 제목에 대놓고 걸어놓은 단어처럼 정의란 무엇인가, 저 돈은, 저 행동은, 저 일은, 저 마음은 과연 의도처럼 깨끗하다 말할 수 있을까를 매 순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인신매매단을 지원하는 정치권과 기업의 검은손들부터 그런 어둠의 고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언론인까지, 영화는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이제 특별하지도 않은 사회의 가려진 부분들을 여실히 오픈한다. 그 가운데서 비링 아주머니는 내가 영화 초반부터 고민에 휩싸인, 그녀는 그럼에도 좋은 사람인가 혹은 나쁜 사람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그럼에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처럼 언론인을 도와 검은 조직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짐작하고 있듯 그녀의 의로웠던 시도는 총기 암살된 언론인과 함께 실패로 끝나고 그녀 역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비링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그녀를 헤치고자 한 인신매매단의 여자 두목인 비비안을 죽이고, 결국 그녀가 인신매매단의 머리가 되며 영화가 끝났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쉽게 이 영화는 한 평범했던 인간이 모든 면에 있어서 추악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악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두목이 되기까지, 가장 마지막 관문이었던 인신매매 조직원들의 마음을 샀던 장면은 또 한 번 묵직한 도덕적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일본에 좋은 일자리가 있어 번듯한 직장으로 출국을 하는 줄 알고 있던 필리핀 여성들에게, 비링은 사실 그녀들이 일본에서 일하게 될 곳은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 매춘 업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문제는 당연히 놀라거나 화를 내고 뛰쳐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 필리핀 젊은 여성이 비링에게 사실을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고, 어차피 너무 가난하고 필리핀에서는 이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부터다.


비링은 자신이 비비안보다 더 나은 인신매매단의 대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녀는 적어도 팔려가는 여자들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련의 영화 속 장면들을 보며 지금까지 수없이 스쳐 지나갔던 여성, 학대, 인신매매, 성평등, 경제적 자립, 양질의 일자리 등에 대한 국제개발 이슈들을 떠올렸다. 국제개발 이론들에서 인신매매는 그게 어느 주제와 대상을 막론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짓밟는 최악의 범죄 중 하나였다.


이론상으로는 그러한데, 막상 해마다 더 거세지는 필리핀의 슈퍼 태풍들이 가난한 섬마을들을 휘젓고 떠나면 그때마다 세계적인 구호 단체들만큼이나 가장 빨리 현지에 도착하는 사람들 중 이런 인신매매업자들이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알게 되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누구든지 핸드폰 하나쯤은 있는 요즘 세상 같은 경우, 인신매매업자들은 굳이 태풍이 휘젓고 간 폐허의 섬들로 직접 찾아올 필요 없이 소셜 네트워크와 페이스북 등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순식간에 침입할 수 있었다.


영화는 왜 팔려가는 여성들을 그렇게까지밖에 표현하지 못했나, 작은아씨들의 세 자매들처럼 아무리 거대하고 지독한 저 높은 곳의 사람들이라도 끝까지 저항한 것으로 표현할 수 없었나 하는 여성들에 대한 표현의 한계에 실망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자꾸 내가 지나쳤던 현장의 모습, 사람들, 이야기들과 영화 속 여성들이 겹쳐져 예전에는 왜곡되었을 것이라고 부인하기만 했던 그 모습들이 현실에선, 더군다나 현장에서였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에 마음이 더 복잡해져 버렸다.


우리가 죽어라 지속 가능한 발전과 더 나은 양질의 일자리, 지역 개발과 성평등을 위한 국제개발 프로젝트를 실행할지언정 그들에게 가장 급하게 당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우리는 인신매매라도 그들이 필요한 돈을 필요한 순간에 얻게 해 줬기에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와 함께 일하던 동생은 충격에 한참을 멍하니 영화관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분명 불쾌하고 화가 났지만, 마치 내가 봐야 하는 것은 내가 원하고 바라고 보고 싶은 것들이 아니라 바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야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두 시간 내내 휘몰아치는 현실감에 뭔가 무기력해져 버린 것도 같았다. 정말로 후스티시아, 저스티스, 정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스페인어와 영어와 한국어의 정의라는 기호, 스펠링이 다르듯 그것은 어디에서 어느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것일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비롯해 책 속에 나오는 모든 사상, 철학 서적들의 내용은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누군가 한마디로 딱 썰어서 정의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에 대한 반박의 반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 조금 더 수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것 같도 같았다. 오히려 그른 것 중에 무엇이 덜 나쁘고 더 나쁜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데 그 덜 나쁜 것도 결국엔 나쁜 것이라 궁극적으로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더 나은 선택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문제는 현장에서는 전자보다 후자의 상황 속에 더 자주 처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상하게 한껏 떨어진 먼 나라 책상 위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서적들과 다큐멘터리들만 보다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만 논쟁을 주고받다 보면,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당연히 책에서 말한 나쁘기만 하고 잘못되기만 한 일들로 되어 있는 것이 답답했었다. 그렇게 나쁘고 잘못된 일들이라면 책에서 말한 것처럼 문제의 원인을 찾고 방법을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면 될 텐데 왜 현실은 책처럼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답답했는데, 현지인의 시각을 온전히 담은 듯한 영화 한 편에 머릿속 이성이 한 대 크게 맞은 것처럼 한동안 얼얼했다.


얼얼했지만 신선했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과 어려움들이 존재하는 것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현지 사람들의 시선이 가득 담긴 영화 한 편으로 상쇄가 되는 것이 처음 느껴본 신기한 기분이었다. 현지 영화 한 편의 힘이 이러한데 현지 사람들이 현지어로 쓴 수많은 논문들 안에는 외부인이 보는 현지와는 얼마나 또 다른 시선들이 담겨 있을까.


영화의 플롯뿐만 아니라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필리핀의 노련하고 능숙한 배우들의 연기까지 보고 나니 나는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배웠고, 그들의 예술은 어디에서 성장하고 표현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날카로운 비판의식 속의 한 챕터에는 어렵지 않게 필리핀 국립대학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무언가 이해가 된다고 해서 내가 그것에 대해 동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해결이 더 쉬워질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역효과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왜 저러지, 왜 그럴까라고 의문스럽기만 하던 것들에 현지의 맥락과 딜레마들을 더해 풀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더 나은 프로젝트들을 디자인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서양과 우리나라의 관점을 이해하려 수많은 책과 자료들을 탐험했듯, 현지의 시각도 한 번쯤은 그만큼 진지하고 깊게 탐험해보고 싶다. 누군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바람을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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