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수강 신청 전에 알았다면 더 좋았을걸
새 학기가 시작되기 3주 전,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한국의 대학원을 합격해도 어디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빠듯할 수 있는 통보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그 3주 안에 비행기표부터 비자 준비부터 앞으로 살 숙소까지 모두 알아봐야 했다. 이럴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런 행정적 어이없음의 대상이 내가 되고나니 다시 내가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것이 실감 났다.
그래도 이미 2년을 살아본 경험 때문인지 짜증을 내면서도 묵묵하게 늦게 알려주면 알려준 대로 짐을 싸고 있는 나였다. 알면서도 가는 거지 싶으면서 부랴부랴 짐을 쌌지만, 사실 짐만큼이나 갑작스러웠던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인사였다. 갑자기 당겨진 출국일자 때문에 가까운 친척들도 다들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가나 싶었는데, 그렇게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4일 전,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였어서 나에겐 처음부터 나이가 제일 많은 존재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나이보다 더 많이 나이들어가고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 속에서, 기운 안에서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내가 해외에 나가게 되는 기회가 생길수록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예전 같으면 해외에 장학금을 받아 간다고 하면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해 주셨을 텐데. 분명 좋은 소식이라 생각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을 보며 과연 내가 정말 좋은 소식을 전해드린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분들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떠나기 전, 임종을 지키고 3일장을 모두 마칠 수 있어서 그나마 불행 중 큰 다행인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출국을 했는데 할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밖에서 들었다면 아마 유학생활을 시작하기 훨씬 버거웠을 거라 생각한다.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마음을 모두 품고 나는 반년만에 다시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8월의 필리핀 공기는 한국의 공기와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부신 햇살과 복작복작한 트라이시클, 지프니 소음에 눈이 떠지자 내가 다시 필리핀에 있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입학을 등록하려고 학교에 갔지만, 홈페이지에는 잘 나와 있지 않았던, 외국인 학생이기에 거쳐야 하는 절차들이 일반 입학 등록 과정보다 두 세배는 더 복잡하다는 것을 그곳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외국인 학생들에겐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더 일찍 알려줘야 했는데, 그런 걸 아는 사람들이라면 미리 알려줬겠지…
나는 학교 등록은 하지도 못하고 마닐라에 있는 보건청과 이민청을 오고 가느라 일주일을 보냈다. 낮에는 관련 관청과 학교를 바쁘게 오갔고, 저녁부터는 학교를 다니며 머물 장기 숙소도 알아보러 다녔다.
기숙사는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고, 어느 동네에 숙소를 찾아볼까 싶다가 필리핀의 숨 막히는 교통체증을 떠올려보니 아무리 좋은 아파트라도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콘도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가는 지프니도 바로 앞에서 잡을 수 있고, 또 여차하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의 집이었다.
인터넷에 나온 매물들을 찾아보다 현지 친구에게 함께 집을 알아보기를 부탁했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외국인이라 혹시나 사기를 당하거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내는 것은 아닌가였는데, 친구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물들을 듣더니 뜬금없이 앱 하나를 꺼내 주소를 검색했다. 무슨 앱인가 하고 봤더니 필리핀 내의 지진대가 깔린 앱이었다.
필리핀은 이미 몇 해 전부터 100년 주기로 발생한다는 대지진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불의 고리 위에 있는 나라들에서 자잘한 지진은 아마 때마다 불어 닥치는 태풍보다 더 자주 발생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필리핀 화산지진 연구소에서 일하던 친구는 그래도 그나마 지진대 바로 위에 있는 건물보다는 조금이라도 빗겨 난 땅 위에 있는 건물이 나을 거라며 내가 생각하고 있던 두 건물 중 하나를 리스트에서 지워버렸다.
단독 주택이 아닌 이상 필리핀 도심의 건물들은 30-40층은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지상 복합주택이 대부분이라, 지진이 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건물들이었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집을 고르는데 지진대를 살펴볼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텐데, 다시 한번 내가 필리핀에, 그것도 이번에는 도심에 살게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