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선인장 Dec 30. 2022

잘 풀리지 않은 한 해를 보낸 것 같지만

12월 30일, 문득 떠오른 유학생활추억

필리핀에서 논문 디펜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분명 박사들은 별거 아니라고 말하던 석사 논문 발표뿐이었는데 학교는 디펜스에 참여할 교수님이 5명이나 필요하다고 했다. 3분은 학과장을 포함한 전공교수님이 필요했고, 1분은 인류학과가 포함된 인문사회대의 다른 전공 교수님이 필요했고, 다른 한 분은 그 밖에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사실 인류학이 아닌 다른 학과의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꿔 공부를 시작한 케이스라 4명의 교수님은 우여곡절 끝에 섭외할 수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인문사회대의 다른 전공 교수님은 결국 다른 교수님의 부탁으로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디펜스를 참여할 다섯 분의 교수님을 모두 찾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지만, 그 다섯 분이 모두 한 날, 한 시에 참석할 수 있는 디펜스 날을 잡는 것이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일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나 혼자만 해도 논문 디펜스를 위해 이렇게 많은 교수님들이 필요하듯 다른 수많은 학생들에게도 그 많은 교수님들이 필요할 텐데, 교수님들의 수는 한정적이라 다섯 명의 교수님을 찾는 것이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는 것을 시간을 맞추려고 보니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 분 한 분 교수님들께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거나 혹은 메일을 주고받는 일이 논문을 다듬는 시간보다 더 늘어가고, 이렇게 논문을 다 써놓고도 발표를 하지 못해 졸업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즈음 드디어 하루 한나절의 황금 같은 시간을 맞추었을 때, 나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래도 졸업 학기 마지막에 디펜스는 하겠구나. 그럼 졸업은 하겠구나. 그렇게 극적으로 마련된 기회의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손을 꼽아 여섯 손가락 정도가 남은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다섯 분의 교수님 중 한 분이 갑작스레 수술을 받게 되셨다는 것이다. 큰 수술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디펜스는 참석이 어려울 것 같은데 너무 미안하다고 하셨다. 교수님도 걱정이 되었고, 나도 걱정이 되었다. 다섯 분의 시간을 같은 날 단 세 시간을 얻기 위해 거의 세네 달을 써서 얻은 디펜스 날이었다. 게다가 이번 학기가 나의 학생비자가 유지되는 마지막 학기였다. 연장을 할 수도 있었지만 1년 단위로만 학생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고, 나에게 필요한 건 단지 논문 디펜스뿐이었다.


지난 한 학기는 논문을 다듬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논문 담당 교수님이 필드워크를 나가셔서 한 학기를 기다렸던 것이고,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무조건 끝낼 수 있고 또 끝내야만 했던 졸업이었는데 이렇게 마지막 여섯 일을 남겨두고 다시 멀어지는 것 같았다.


거의 1년의 시간이 피치 못할 교수님들의 사정으로 흘러가고, 그 사이 학생 비자는 만료가 되려고 하니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되기도 하나보다는 생각을 했다. 논문을 다 쓰고 나서는 내 논문이 너무 부족해서 과연 디펜스를 할 수나 있을까 싶은 것이 걱정이었다면, 이제는 내 논문이 무슨 내용이었지 싶을 정도로 논문 외의 문제들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때 모든 것을 그나마 말이 되는 방식으로라도 일을 처리하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유학한 친구들만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과 독일과 한국에서 공부를 하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들도 그들 나름의 어려움과 비효율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케이스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나에겐 특별하게도 남들이 유학으로 보통 가는 국가들 외에 잘 알려지지도 않고 잘 가지도 않는 나라들에서 유학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포스코에서 아시아 지역의 국가에서 유학하는 학생들 중 기수별로 장학금을 선발하는 프로그램에서 알게 된 친구들은 나의 이 상황을 잘 이해해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 내 상황이 아주 조금 더 나은 건가 싶은 착각도 들었다. 먼저 졸업하신 분들 중에는 누구 하나 쉽사리 10년 내에 박사를 졸업하신 분들이 없었고, 논문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다 쓰고 나서도 디펜스를 하기까지 타의의 원인으로 시간이 지체된 것도 다반사였다. 어찌 보면 그런 상황까지가 논문을 끝낸다는 것에 포함된 일처럼도 보였다.


나를 충분히 이해해주고 그 억울하고 답답하고 당장에 때려치워도 제일 먼저 이해해줄 것 같은 그런 분들이 그런데 신기하게 가장 강력하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분들도 그분들이었다.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또 자신도 백 프로 같진 않아도 그만큼 혹은 그보다 답답한 상황에 놓인 적도 있어서 지금 나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러니 한 번 시작한 만큼 꼭 끝을 내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떻게 내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분들이, 심지어는 나보다 더한 상황도 겪은 분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끝을 내라고 하는지 황당했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내 마음과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다시 학교에 가서 디펜스 상황을 알렸고, 결국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학기 내에 디펜스 날짜를 다시 잡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나는 집에 와서 엄청 울었다. 다시 학과 사무실에 찾아가 논의를 했는데 태연하게 다음 학기에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일한 외국인 학생인 나의 사정을, 나에게 비자가 필요하고 머물 곳을 찾아야 하고 생활비가 필요한 그 사정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명치에서부터 우러나온 화를 억누르고 비자가 없어서 다음 해까지 머물 순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자 드디어 사람들도 고민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방학학기에 디펜스를 해보자.


디펜스를 방학학기에도 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실낱같은 희망이 다시 생긴 샘이었다. 다시 다섯 분의 교수님들께 연락을 드렸다. 수술을 하신다는 교수님께는 다른 분을 찾겠다고 했는데 그때 즈음엔 괜찮아질 거라고 꼭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다. 극적으로 네 분의 교수님 시간이 맞았는데 이번에는 다른 교수님 한 분이 방학기간엔 미국의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야 해서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이렇게 또 다른 분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며칠 뒤 교수님이 미국에 가는 날을 늦추고 디펜스에 참석하겠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 메일을 받고 당장 학교로 돌아가 사무실에서 날짜를 확정받고 모든 교수님들께 안내 문자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뭔가 아직 나를 챙겨주고 있다는, 나를 기억하고 있어서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게 도와주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런데 문득 그 강렬한 느낌 뒤로 이전에는 한 번도 들지 않던 질문이 따라 올라왔다.


그런데 만약에 일이 이렇게라도 풀리지 않았다면, 그러면 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엄청난 안도감과 감사함 뒤에 문득 이런 질문이 따라오는데 순간 한껏 밝았던 표정이 잠잠해지며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던 디펜스 날짜를 잡지 못했다면, 그럼 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던 걸까.


한참을 걸으며 생각해보는데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디펜스 날짜를 잡을 수 있었던, 잡지 못하던 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 역시 논문 발표를 하게 되던 그렇지 못하던 어쨌든 신을 사랑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이 닿고 나니 신은 일을 이뤄져서 감사한 존재라기보다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운 존재로 바뀌어 있는 듯했다. 기쁜 날 신에게 감사한 이유는 기쁜 일을 주어서가 아니라 기쁜 날에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기뻐서 알려주고 나누고 싶은 마음에 신을 부른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힘든 날에 힘들게 해서, 기쁜 날에 기쁘게 해서 신을 특별히 찾지는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냥 힘들 땐 힘들다고, 기쁠 땐 기쁘다고 마음을 나누는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에서 졸업을 하고 난 뒤, 뜬금없이 살게 된 독일에서의 3년은 쉽지 않은 기간이었다.


첫해는 필리핀에서 석사까지 하고 와서 그만큼 배운 걸 써먹지 못하고 독일어 ABC부터 다시 모든 것을 배우고 적응해야 하는 괴리감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겨우 이제 조금 적응해보자 싶을 때부터 코로나가 닥쳐와 그마저도 꺾어버린 듯했다. 그렇게 처음 겪는 유럽의 겨울 하늘처럼 그리 나쁘지도 그렇다고 그리 좋지도 않은 회색 같은 마음이 3년 정도 지나는 이번 연말, 문득 예전에 떠올랐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행인 건, 나는 여전히 그 느낌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힘들었지만, 쉬운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또 나 역시 여전히 신을 좋아한다. 아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시간에 한해서, 내가 가장 무능력하고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던 지금의 순간임에도 나를 여전히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여전히 독일어는 늘지 않고, 여전히 일은 갖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자신감은 낮은데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있고 또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자존감이 높은 것 같다. 그래서 일이 있던 없던, 수익이 있던 없던, 외국어를 잘하던 잘하지 못하던, 나의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 잘 못하는 상황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어도 내가 여전히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한 한 해다. 이 감사함을 가지고 내년에는 조금 더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기록해 본다. 올 한 해동안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시고, 또 기나긴 글들을 함께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특별한 동기부여가 없는 공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