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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pr 12. 2023

케이프타운, 마닐라, 베를린 영화관의 불이 꺼지면

생에 감사해라고 되뇌어보기

이제는 한국에 살았던 시간과 외국에서 사는 시간이 얼추 비슷해진 것 같다. 남들은 여행을 가는 곳에 나는 살고 있다는 것을 막상 그 곳에 살고 있다 보면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늘어나는 시기이다. 이제는 낯선 곳만큼이나 익숙한 공간도 많은 아직은 외국이라 불리는 곳들에서 정말 뜬금없는 공간이긴 하지만, 내가 이 낯선 곳에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 공간이 하나가 있었는데 중 바로 영화관이다.


생각해 보면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서까지 영화관을 간 적은 없었다. 기왕이면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뮤지컬을 보거나,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 가보고 싶거나, 그곳에만 있는 미술관을 가보지, 굳이 한국에서도 갈 수 있고 볼 수 있는 영화관을 여행을 할 땐 잘 찾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낯설었던 여행지가 어느새 나의 삶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경험 중에 하나가 바로 현지의 영화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디에 있던 그곳이 사는 곳이 되면 그냥 주말이나 평일 늦은 밤엔 아무 생각 없이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는데, 그게 참 신기하게도 어느 나라든 사람 사는 곳이면 비슷한 듯했다.


나는 그렇게 케이프타운, 델리, 마닐라, 그리고 베를린의 영화관들을 다녔다. 머문 시기에 따라 어떤 곳은 단 한 번 영화관에 간 곳도 있었고, 또 어떤 곳은 매달 영화관으로 더위를 피해 대피하다시피 자주 찾은 적도 있었다. 또 어떤 곳은 영화관이 음식점처럼 각종 음식 판매원이 영화 시작 전에 판매를 하는 곳도 있었고, 아침 가장 이른 시간 영화는 갑자기 커다란 스크린에 그 나라의 국가와 함께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식을 치러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나라마다 내가 문득 한국에서 영화를 보고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몇몇 있었지만, 모든 광고가 끝나고 어둠이 짙게 내린 뒤 영화가 흘러나오면 영화관의 국적은 사라진채 좌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시컴한 뒤통수만큼은 세계 어느 곳이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언젠가 인류학자들에 대한 이런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지만, 인류학자들은 그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극장에 간다는 말이었는데, 내가 꼭 그랬다. 케이프타운과 델리, 마닐라와 베를린까지 어느 순간에는 나는 인류학의 인자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다음에는 인류학이 이유 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되기도 했는데, 인류학을 알고 있던지 모르던지 나는 영화관에 가면 나도 몰래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동자만 바라봐도 우리가 이렇게 다른 인종의 사람이구나를 찰나의 순간에 알아채는 나라들에서도 신기하게 영화관에만 가면 우리는 서로 다른 인종이 아닌 그저 이 지구별에 함께 살고 있는 같은 인류라는 것을 새삼 느끼곤 했다. 도대체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생김새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나라와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는 지구별에 실존하지 않는 상상의 무언가에 대한 스토리에 어떻게 이리도 함께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관에 가면 가장 뒷자리에 앉아 빛이 있을 때는 저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인데 영화관의 불이 꺼지면 모두가 까만 뒤통수를 가진 사람들이 되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치 말 잘 듣는 아이들의 뒤통수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크린 속에 빠져 몇 시간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시선을 뺏기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니, 그건 내가 목포에 있을 때나 서울에 있을 때, 케이프타운과 델리, 마닐라와 베를린 어느 곳에 있어도 똑같이 볼 수 있는 영화관의 풍경이었다.


국제정치학에 매료되었다가 인류학으로 방향을 바꿨던 나에게는 이 다양한 나라에서의 영화관 풍경이 국제정치학과 인류학을 모두 품은 굉장히 흥미로운 공간처럼 보였다. 나에게 인류학은 사람들의 다양성을 하나하나 파해쳐보는 학문이었다면 정치학 혹은 국제정치학은 그런 수많은 다양성이 있음에도 분명 공통된 시스템 아래 경영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학문 같았다.


정치학 교재를 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철학부터 21세기의 수많은 국가들의 정치까지, 정말 많은 나라와 시스템들이 그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을 얻고 통제하기 위한 수법들이 나오는데, 그 수많은 정치학적 노력들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나는 세상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영화관에서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뜬금없이 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특성 때문에 이를 악용한 정치적 사례들도 오랜 인류의 스토리와 함께 해왔지만말이다.


어둠 속을 채운 수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들을 보며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야기, 스토리를 좋아할까? 왜 이렇게 이야기들을 찾아다니고, 귀 기울이고, 심지어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의 이야기까지 만들어내는 걸까? 나도 분명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으니, 그 까마득한 뒤통수 중 한 자리를 채운 것이었겠지만, 그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어떨 때는 아프리카였고, 아시아였고, 지금은 유럽이면서부터 더 신기하게 된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김혜자 선생님의 '생에 감사해'라는 책을 읽으며 어떻게 사람들은 스토리에 빠지고 왜 좋아하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침 얼마 전 유퀴즈에 나온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선생님 책을 읽어보고 싶다 했는데 마침 밀리의 서재에 선생님 책이 올라온 것을 발견해서 베를린에 있으면서도 너무 늦지 않게 선생님의 책을 읽게 되었다.


국민엄마, 구호활동 등 다양한 수식어가 있고 또 선생님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었지만, 책 속의 선생님은 한명의 모험가 같았다. 한 역할을 맡으면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처럼 열중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엄마라 불려도 같은 엄마로 연기하는 것은 보는 사람도 연기를 하는 사람도 따분하다고 하셔서 놀랐다. 직접 시도해 보기 전에는 두려운 것도 많고 망설이는 것도 많지만 그럼에도 궁금한 것도 많고 이해하고 싶은 것도 많아 결국에는 해내는 분인 것이 신기했다.


보통 인간은 자신의 뇌의 일부분만을 쓴다고 하듯이 내가 이런 사람이면 이런 사람이나 보다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보통인 것 같았는데, 선생님은 뭔가 이번 작품에선 한 캐릭터의 이런 면을 드러냈다면 다음 작품에선 또 다른 면을 꺼내고 그것이 작품을 더하며 늘어나 결국엔 어떤 역할의 모든 면을 건드려보거나 꺼내보고 싶어 하는 분 같았다. 인류학자는 직접 현지에 살며 사람들을 알아간다면 선생님은 캐릭터를 연기하며 그 사람이 직접 되어보는 신기한 탐험가 같은 느낌이랄까.


배우이지만 선생님의 인터뷰를 보면 그 특유의 말씀에 선생님 자체의 말을 듣는 것도 좋아했는데, 책을 읽는데도 선생님의 인터뷰 장면들이 겹치는 것 같아 어려움 없이 훌훌 읽었다. 선생님의 삶은 물론 책 속에 나온 선생님의 연극과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재밌어서, 책을 읽으면서 말씀하신 연극, 드라마, 영화, 심지어는 광고까지 직접 따로 검색해 보느라 금방 읽을 것처럼 재밌던 책을 며칠이나 걸려 읽게 되었다.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을 빼고는 비교적 많이 접한 작품들이었는데, '셜리 발렌타인', '다우트',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선생님의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연극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선생님이 설명하는 그 연극들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나는 그동안 내가 케이프타운과 마닐라, 베를린에서 영화를 본 것처럼 마치 아직 내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존재하고 있을 또 다른 나라들의 서로 다른 극장에서 이 연극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굉장히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면 또 어떤 사람은 겉모습에 상관없이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분들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양면을 다 갖고 계신 분 같았다. 선생님은 나이를 물으면 수천 살을 살았다고 답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사람이 되어 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영화가 한 편이면 보통 영화 상영시간을 두세 시간으로 적어두는데,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 영화관 하나에서 우리나라 전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나는 그 영화가 단순히 두세 시간이 아니라 수천수만 시간의 영화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나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선생님이 극 중 캐릭터를 사는 동안 그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을 사로잡아, 선생님이 마치 모모처럼 사람들의 시간을 하나 둘 모아서 정말 수천 살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아마도 전원일기가 아니었나 싶다.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에 종교와 야구팀이 결정되어 버렸던 것처럼 어릴 적 할머니댁에 가면 언제나 틀어져 있었고, 결혼한 지금은 우리 집에 가도 케이블로 항상 상영 중인 드라마가 전원일기였다. 심지어 한국은 살면서 처음 왔던 외국인 남편도 내 가족들을 찾아뵈며 언제나 켜져 있던 전원일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냥 가족들과 함께 누워 그 오래된 우리나라 시골 풍경이 담긴 전원일기를 같이 보게 되었다.


한국말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또 여러 등장인물들이 사투리와 억양을 가지고 연기를 하기 때문에 남편은 그저 상황상 드라마 스토리를 따라가곤 했는데, 친척들 투어를 마치고 다시 우리 집에 와서 틀어진 전원일기를 보며 남편이 한마디 했었다.


"그래도 전원일기가 제일 보기에 편한 드라마인 것 같아."


남편의 뜬금없는 말에, 도대체 무슨 말을 알아들어서 이 드라마가 가장 편하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말하길


"지금껏 본 한국 드라마 중에 사람들이 가장 화를 안내는 것 같아.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가장 가까운 것 같다고 할까."


한국에 오기 전까지 유명한 한류드라마들을 몇 가지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자막을 함께 봐서 대화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한국에서도 그러한지 궁금해하던 남편이었다. 너무 소리를 지르거나, 손지검을 너무 쉽게 한다거나, 막대하는 장면들을 보면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정말로 저러나 궁금해하던 것들이 많던 남편이었는데, 전원일기는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보기에도 뭔가 드라마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있을법한 사람들을 잘 그려낸 드라마가 된 듯했다.


선생님이 전원일기를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인생교과서라고 하셨는데, 전원일기의 매력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꼭 그 상처를 아물게도 해주기 때문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왠지 한국말을 모르는 남편도, 그리고 그때는 어렸지만 지금은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어가는 내게도 그 부분들이 통해서 지금까지 생각이 나는 드라마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원일기를 떠올리면 그걸 보고 계시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떠오르고, 이제는 우리 엄마 아빠가 떠오를 테고, 지금은 김혜자 선생님이 적어둔 글이 함께 생각날 것 같다.


나는 물론 선생님의 최근 작품들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눈이 부시게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었는데, 신기하게 이 작품은 처음에는 울고 웃고 너무 즐겁게 봤는데 두 번째부터는 더 많이 보고 싶은데 너무 슬퍼서 더 이상 못 보겠는 작품이 돼버렸다. 디어 마이 프렌즈도 그렇고 우리들의 블루스도 그렇고 모두 아껴보게 된 작품들이었지만, 선생님이 고른 작품들은 대부분 나도 너무 좋아하게 되는 작품들이라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시나 궁금했었는데 그 답이 책에 언급되었다.


희망. 작품 속 모든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상황과 이유와 인물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인물을 통해 그럼에도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는지, 희망의 메시지를 가진 작품을 선택하신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희망도 결국에는 사람이 품는 것이기에 그 희망조차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희망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거나, 혹은 너무 작거나 닳아서 과연 그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은 것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은 아마 그 한줄기의 희망이라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믿으며 연기를 하셔서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며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렇게 선생님의 여러 작품들이 나의 삶의 순간순간에 인생드라마가 되어 힘이 되어줬는데, 이번에는 선생님의 책이 나에게 또 희망을 남긴다. 책의 한 챕터가 바뀔 때마다 전혀 새로운 인물과 작품을 만나 고민하고 부대끼고 적응하면서도 또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내 보는 선생님의 연기인생 스토리를 들으며, 뭔가 여기저기 다른 나라를 떠돌며 적응하거나 적응하지 못해도 살아가는 나의 고민과 닿아 있는 듯해 많은 위로가 되었다. 마닐라에서 5년을 살다가, 다시 베를린에서 5년을 막 채워가는데, 이제 또다시 다른 동네로 이사를 준비하는 요즘, 나는 분명 내가 호기심도 많고 모험도 좋아하며 특히 여행을 가는 것보다 새로운 곳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과연 그게 정말일까 싶은 의문들이 떠오르던 참이었다. 선생님의 한 작품에 대한 고민과 이해와 풀어내는 과정이 뭔가 새로운 도시, 농촌, 국가, 사람들을 만나 살아내다가 또 새로운 작품으로 떠나는 모험가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 것 같아 읽으면서 신기했다. 언제나 호기심과 열정, 진심만 가득할 것 같던 선생님의 스토리 안에 죽음도 있고 허무도 있고 미안함도 있고 재미없음도 있어서 읽으면서 놀랐고, 그럼에도 희망을 말해주셔서, 생에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해주셔서 나도 감사한 책이 되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또 어느 나라의, 어느 동네의 영화관에서 어떤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두 비슷한 뒤통수들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세계 어느 영화관을 가든 그 어둠 속에 반사되는 수많은 뒤통수들을 보며 나는 선생님의 책을 떠올릴 것 같다. 빛이 있는 곳에서는 피부색도 언어도 얼굴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빛이 사라진 영화관에서는 모두가 그 작품을 궁금해하고 이야기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는 같은 사람들로 변하듯, 그 모든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과 시간을 사로잡은 배우라는 직업을 떠올려볼 때, 다른 어떤 관객들보다 가장 먼저 그 스토리에 반해 직접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아마 이 영화관의 기억을 갖게 해 준 '생에 감사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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