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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Mar 10. 2023

정말 집사들은 고양이에게 간택받는 것일까

그동안 알지 못하고 받았던 다정함들에 대해

한 달에 한 권씩은 책을 꼭 읽으려고 하는 요즘, 나는 여러 책을 동시에 읽다가 한 두 권씩 떨어져 나가 마지막엔 결국 한 권이라도 끝내는 전략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손에 쥐고 있는 책은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오선민님의 '슬픈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이라는 책이다. 따뜻한 마음을 오랫동안 쉽사리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일부러라도 따뜻한 것들을 주변 가까이 두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떤 책인지도 모른 채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은 그동안 생물학으로 인간세상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던 우생학이나 적자생존처럼 끝없는 경쟁 끝에 결국엔 강자가 이긴다라는 주장과 달리, 진화의 승자는 결국 다정한자, 그래서 협력이 가능했던 생명체들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진화생물학은 내가 인류학을 공부할 때 그동안 익히 들어온 사회학 혹은 정치학의 전통적 이론들이 설명하지 못한 내용들에 대해 종종 고개를 끄덕이게 끔 설명을 하곤 했다.


국제개발협력 활동 중 가장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인, 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들도 그랬다. 기존의 이론들은 교육 수준이나 사회경제젠더적 이유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인류학과 지역개발학에서는 부와 능력과 환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식과 전략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물인류학 시간에 들은, 자연에서는 모든 자식들의 생존율을 보장할 수 없을 때는 오히려 많이 생산하는 것 역시 하나의 생존 전략인데 가난한 사람들 역시 이런 이유에서 아이를 많이 낳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나에겐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었다.


그때처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에는 내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강하고 이기는 것만이 살아남는 것과는 다른 반대의 사례 즉, 다정함이 어떻게 많은 생명체들을 살아남고 또 지금까지 이어오게끔 했는지 다양한 사례들도 나와 있었다. 무심히 읽다 툭툭 생각하게 만드는 생각보다 흔한 사례들 중, 특히 며칠이고 종종 떠올려보게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바로 가축 혹은 애완동물들에 대한 부분이었다.


작가는 생명체들이 진화해 온 시간대를 쭈욱 펼친 뒤, 야생동물들이 가축화된 계기를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우리 인간이 특정 동물을 선택해 집으로 데려온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수많은 동물들 중 인간이 선택하여 키우는 과정에서 가축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들 중 다정한 아이들이 우리(인간)에게 다가온 것은 아닐까라고 말한다.


지금껏 인류가 꾸려온 지구의 모습이 모두 우리 인간의 초점에서 설명되어 마치 우리가 모든 현상과 결과를 만들어낸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구절을 읽는데 문득 이 지구의 주인공은 인간만이 아닌 지구 생명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지금껏 확실히 무엇 때문에 이뤄졌다고 생각했던 사건과 일들이, 사실은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면,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이 힘을 증명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이렇게 운을 기원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오래전 필리핀의 한 현장에서 현지 활동가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필리핀에 거대한 슈퍼태풍이 휘몰아치고, 세계적인 구호활동이 펼쳐진 뒤 그 1년을 기념하는 시간에 나는 재난 현장을 방문했었다. 폐허가 돼버렸던 필리핀에서 가장 가난한 섬 중 하나였던 곳에 구호활동을 온 전 세계의 활동가와 단체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이 1년을 넘게 머물고 생활하며 가장 무너진 곳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국제적이고 북적이게 바뀐 도심. 그렇게 거대한 인력과 자본이 들어오면 분명 복구가 이뤄지는 동시에 현지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1-2년짜리 반짝 개발도 따라왔다.


재난이 일어나면 그곳으로 파견 가는 국제개발활동가들에겐 단순히 해외에서 살아서 오는 불편함을 떠나 기본적인 의식주가 없어 겪는 어려움을 현지인들과 같이 겪게 된다. 폐허가 돼버린 곳에서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복구하는 노력을 1년 동안 이어온 활동가들이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기념하는 날, 이제는 어둠 속에도 거리를 밝게 비치는 제법 많은 음식점들과 가로등의 불빛을 보며 현지 친구는 나에게 말했었다.


"그동안 이 모든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에 아무리 많이 감사하다고 말해도 부족하겠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사람들 마음 안에 다시 일어나겠다고 다짐한 마음 때문이었을 거야. 우리가 아무리 바깥에서 들어와서 도와주겠다고, 집을 다시 짓고 지붕을 얹고 급식을 돌려도 그 사람들 마음 안에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아마 복구는 이뤄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나는 긴급구호라는 것이 어떤 국가는 외국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복구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기에, 그럼에도 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라면 정말로 그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했기에, 복구가 이뤄졌다면 그것은 외부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하고만 있었다.


그래서 국제개발을 바탕으로 한 활동가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무척 있었던 것 같은데, 국제개발만이 아닌 지역개발을 바탕으로 한 현지의 활동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재난을 당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필리핀에 들어가기 전, 한국을 나서던 날 아침에 읽었던 신문 1면을 잊을 수 없다. 일가족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함께 세상을 떠난 일이었다. 필리핀의 빈민촌으로 들어가는 나로서는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이 이 신문에 나온 가족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황에서 살고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는데, 이제는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을 신문으로 가 아닌 우리 동네에 함께 살아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나는 어떻게 세상을 마주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겁이 나기도 했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하루 약 2달러 (2천 원 정도)를 벌지 못하는 절대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에서 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문 속의 그 가족들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할까 지레 겁을 먼저 먹고 마을에 들어갔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며 때로는 마을 안에서 또 때로는 마을 밖에서 마을 사람들과 인연이 이어지며 나는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나만의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었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그리고 부라는 잣대로 그들을 논한다면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신문의 지면이 부족할만큼 부고 소식이 가득찰 수 있을만한 이 가난한 동네의 마을 사람들은 왜 한국에서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무엇이 이렇게 가난한 삶이라도 웃고 울며 삶을 이어가게 만들까.


처음에는 나도 몰래 나는 마을 사람들을 도우러 왔다고 말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 우리가 도움을 주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거기에 더불어 아무리 우리가 도움을 주려고 해도 결국 각자가 자신만의 동기부여가 없었다면 우리의 활동과 그들의 삶 모두 절대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에 가득찬 동기는 너무 뻔하게 들리겠지만 가족이었고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나는 그 아주머니들에게 물들었는지 프로젝트와 공부가 끝나고나니 우선 다른 것보다 나도 마을 사람들처럼 내 가족이 갖고 싶어져버렸다.


잠자는 사자는 깨울 수 있지만 자는 척하는 사자는 깨울 수 없다고 한다. 누군가 일어나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깨워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그 사람이 일어날지 말지는 당사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었다. 현장의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줘서, 애완동물이 된 가축들은 인간들이 키워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혼자서라도 결국엔 다시 일어섰을 사람들 옆에 그저 함께 서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혹은 내가 키워서 우리 고양이나 강아지가 사랑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고양이와 강아지는 원래부터 다정한 아이라 나를 선택해 주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전에는 뭔가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들이 있어 무언가를 하곤 했는데, 요즘 나는 특별히 그 이유, 의미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듯하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있어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와 의미를 먼저 떠올리고 그것들이 커다란 동기가 되어주곤 했는데, 요즘은 내가 아닌 다른 것, 상대방, 사물들에 대한 의미, 이유가 먼저 궁금해져 자꾸 무언가를 읽어보는 느낌.


유명한 인류학자 중 한 명인 레비스트로스는 타자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란, 내가 살아볼 수 있었던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다 보니 심지어 그 타자라는 것이 사람을 넘어 자연에게까지 뻗어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것도 같다.


어쩌면 그 수많은 집사들이 말하는, 우리가 고양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집사를 간택한다는 말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건네었던 다정함은 물론 그동안 내가 받아왔음에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다정함들에 떠올려보는 날이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 물론 나는 이 아이에게 간택받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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