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선인장 May 09. 2023

[브리저튼, 샬롯왕비] 엄마는 여자로서 행복했을까

우리들의 가장 눈부신 지금


{주의! 리뷰는 넷플릭스 브리저튼 외전:샬롯왕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엄마가 나에게 “사랑해”라고 직접 자주 말하진 않아도, 희생이라는 말도 안 될 것 같은 단어가 실재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반대로 남편은 매일 같이 “사랑해”, “귀엽네”, “너무 예쁘지”라는 말로 소소한 순간마다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기에 내가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서른 살에 처음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사람과 그대로 결혼을 한 나에겐 이런 남편의 사랑이 무척 신기하고 생소한 느낌이었다. 낯설긴 하지만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그것이 부모에게 받는 사랑이든 연인에게 받는 사랑이든 언제나 좋은 것이었지만, 내가 한 사람의 파트너이자 여자이기에 받는 사랑은 그동안 내가 누군가의 자식 또는 가족이기에 받는 사랑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감정을 일으키는 부분들이 있어 순간순간 나를 낯설게 만들었다.


배우자를 자주 안아주고,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는 것이 부모에게 받는 사랑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특별한 감정을 선사하는데, 엄마는 이런 여자로서 느끼는 사랑을 주고받는 감정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느꼈을까 혹은 그렇지 못했을까. 엄마로서는 자식이 인정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엄마였지만, 여자로서의 엄마, 엄마들의 마음은 얼마나 채워졌을까라는 질문을, 나는 결혼을 하고 처음 종종 떠올려보게 되었었다.


브리저튼의 열렬한 팬도 아니었지만 특별히 보고 싶은 드라마가 없던 참에, 이번에 새로 나온 브리저튼의 외전, 샬롯여왕이 마침 독일에서 가장 많이 본 시리즈에 올라와있었고, 그렇게 무심코 보게 된 드라마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어린 시절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려보게 했다.



1. 주인과 주인공

친구들은 대부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관심이 되고 연애로 울고 불고 하던 청소년, 대학 시절에도 나는 이성보다는 세상에 대한 질문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왜 나는 태어났고, 내가 사는 지구별은 어떤 세상이고, 왜 이 세상은 이렇게 불평등한 것인가. 그런 질문들이 나를 국제개발의 세계로 들어서게 만들었고, 국제사회가 만들어낸 가난한 나라들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에 “Ownership, 주인의식”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책을 읽고 또 현장에 있으면서 나는 그 키워드들을 순간순간 기억해 내고 그 의미들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었다. 그런데 단어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한국어로 번역된 “주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양한 나라들을 굳이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로 구분해서 그 차이를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단어에 다시 위계적인 ‘주인’이라는 단어를 붙이다니.


여기서 ‘주인’이란 어떤 뜻일까 고민하다 ‘주인의식’, ‘주인공’까지 주인에 대한 모든 연관어를 떠올려보게 되었고, 각각의 단어의 뜻을 넘어 그에 반대되는 단어, 그리고 그 관계성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주변에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하인’이라는 관계가 있어야 성립되는 단어였고, 그 안에는 권력이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라는 단어에 ‘공’이라는 단어를 하나 붙인 ‘주인공’이라는 단어를 쓰면 사뭇 그 분위기가 달라진다.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주연과 조연이 있어 주인공의 시점에서 주인공의 이야기가 주로 다뤄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드라마에서는 카메라가 주인공을 더 자주 보여줘서 그 사람이 주인공인 것뿐이지, 또 다른 카메라가 나타나 조연인 한 사람을 따라 이야기를 시작하면 조연이 주연이 되고, 주연이 조연이 되는 것이 드라마였다.


아직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을 뿐이고, 기록에 담기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가 누군가의 드라마의 조연이자 자신의 삶이라는 드라마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자, 나는 그때부터 티브이 드라마만큼이나 살아 있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얼마나 부유하고 가난하고 당차고 초라하든 상관없이 지금 이 지구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의 삶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다.


브리저튼 외전으로 나온 샬롯 왕비를 보는데 오랜만에 그 주인과 주인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브리저튼의 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누군가의 엄마, 아빠, 친구로 젊은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해 주던 조연들이 외전에는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찬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모의 젊은 시절과 노년, 그리고 현재의 자식들이 함께 나오는 설정 때문에, 나는 결혼을 하고 떠올렸던 엄마는 여자로서 행복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다른 주인공들의 답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대와 인종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드라마를 한국 현실로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굳이 한국말로 풀어내보자면 드라마는 샬롯 왕비와 레이디 댄버리, 바이올렛이라는 세명의 중년과 노년의 여성들을 통해 굳이 한국말로 풀어내보자면 ‘가족끼리는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의 숨겨진 속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풀어낸다.


부부이기에 가능한 애정표현과 사랑이 어쩌다 부부인데도 그럴 수 없는지, 드라마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주연과 조연은 카메라가 누구를 비추느냐에 따라 금세 바뀔 수 있기에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또 하나의 드라마를 떠올려보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는 여자로써, 아빠는 남자로써 행복했을까? 나는 내가 가진 지금의 젠더로써 사랑을 받고 또 주고 있을까? 세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영원하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찰나의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2. 샬롯의 자녀들에게

샬롯왕비는 15명이나 자식이 있는대도 누구 하나 자신의 뒤를 이을 왕세손을 낳지 못해 고민한다. 자신은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남편과 15명을 혼자서 나아 키웠는데, 그 15명 중 결혼한 자녀들도 자식을 갖지 못해 힘들어하고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자녀들은 결혼을 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아 그야말로 속이 터진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묻는 것처럼 샬롯 왕비는 자신의 곁을 평생 지켜온 수행비서에게 왜 자신의 딸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 같은지를 묻는다. 형제자매를 15명이나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과연 함부로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녀들이 결혼이나 진지한 연애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 나오는 것은 정말로 그러한 경우도 있겠지만, 깊은 마음 한편에는 나는 엄마처럼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 또는 감히 그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자리해서는 아닐까 싶었다.


브리저튼의 시즌 1과 2를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길, 두 시즌 속에서 잠시 흘러가듯 나온 샬롯과 조지의 언급으로는 이렇게 애틋한 사랑의 서사가 있었을 것이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이 말은 드라마에는 샬롯이 담장을 결국 넘지 못할 만큼 조지와 함께한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이 담겼지만, 반대로 인생이라는 더 넓은 서사에서는 당장에라도 담장을 넘고 싶은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다른 외전 하나를 만들어 낼 정도로 가득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무엇이 더 나을지 혹은 나쁠지를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골라도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는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다. 차라리 조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가정에 무관심하거나 어떤 명백한 떠나야 하는 이유를 준다면 샬롯의 결정이 더 쉬워졌을지 모르나, 조지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샬롯을 너무 사랑하고 가정을 너무나 애틋하게 생각한다. 왕이었기에 수많은 보호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반대로 정신질환을 제대로 치료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대였기에 지금 시대의 일반인도 받지 않는 치료법들을 받아야 했기에 어느 시대, 어떤 계급이었다고 한들 심각한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와 그 환자의 보호자들의 삶이 더 쉬워졌다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조지는 당사자였고 샬롯은 그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당사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서 태어나고 자란 15명의 자녀들에게 평범하지 않은 부모의 결혼생활은 아마 그들의 연애관, 결혼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진, 부모가 되기 전까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도 언젠가 자신들의 부모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마지막에 그 두려워하는 자녀들에게 괜찮을 것이라고, 사랑은 그 두려움을 넘어 시도해 볼 만한 아름다운 결정이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듯했다. 나도 그 메시지를 보태고 싶었다. 부모님이 어려운 결혼생활을 이겨내고 계시거나 설령 실패했다고 말하시더라도, 나는 내가 주인공인 또 다른 사랑 드라마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3. 우리들의 가장 눈부신 순간

지금까지 이 드라마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위주로 말했지만, 단언컨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주인공은 샬롯 왕비와 조지 3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마지막 편까지 본다면, 노년의 부부에게는 자신들의 젊은 날, 눈부셨던 배우자의 모습을 떠올려보게 할 것이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또는 신혼을 시작한 커플들에게는 우리들의 풋풋하고 설레는 떨림이 저렇게 애틋하고 단단한 사랑이 될 수 있을지 감동받게 만들지도 모른다.


당장 다음 달엔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할지 둘이 함께 머물 공간 하나도 찾지 못한 남편과 나를 떠올려보면 신혼집은 커녕 남편과 신부의 신혼저택을 각각 갖고 있는 샬롯과 조지에 감히 비교를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나 역시 남편을 따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독일이라는 나라에 혼자 떨어져 나와 해외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샬롯의 마음을 더 잘 알 것 같았다. 내가 독일에 오지 않았다 해도 그 외로움이나 어려움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혼자 오게 됐을 남편에게 옮겨지는 것일 뿐이니, 결국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하고 의지하게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 결혼일 텐데, 다행히 남편은 조지가 샬롯을 대하듯 나를 아끼고 사랑해 준다.


샬롯은 조지가 무너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도록 지혜와 확신을 심어준다면, 조지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마다 그녀에게 진짜 예쁘다고, 너무 아름답다고, 정말 사랑한다고 그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남편의 얼굴이 겹쳐 그가 계속 보고 싶어졌다.


글의 초반에 말했듯이 친구들은 사랑을 찾아 울고 웃던 이십 대에 나는 그렇게 세상에 대한 질문만 하다 갑자기 뇌출혈이 왔었다. 오늘내일 갈지 모르겠다고 말하시는 할머니들만 계시던 병동에 누워 내가 지금 죽는다면 뭐가 제일 아쉽고 슬플까 떠올렸을 때,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려고 한 적 없던, 내가 지금껏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떠오른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명확해졌다.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나에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그래서 언젠가 다시 한번 내가 지금 죽는다면 무엇이 제일 아쉽고 슬플까라고 물었을 때, 그때는 내가 그래도 한 번은 잊지 못할 사랑을 주고받아서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었었다.


그때는 어떤 사랑 노래를 들어도, 어떤 사랑 영화를 봐도 과연 나의 사랑 드라마에는 어떤 남자애가 들어오게 될까 전혀 떠오르는 얼굴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 그리고 그 얼굴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 무척 감사하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게 나는 요즘 투정을 부리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서른보다 마흔이 훨씬 가까워진 나이가 되면서,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내 외형의 모습들이 서서히 낯설게 변하는 것이 거울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지금이 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예쁜 순간들일지도 모르니 남편에게 사진을 자주 찍어달라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의 가장 마지막, 침대 아래에서 젊은 날의 샬롯과 조지, 그리고 노년의 샬롯과 조지의 얼굴이 마주하며 겹치는 장면을 보며 어쩌면 지금이 남편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남편의 예쁜 얼굴을 남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금까지의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가장 나이 든 순간이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에 비하면 가장 젊은 순간이니까, 우리 남편도 지금 예쁠 때 더 많이 남겨두고 싶었다.


잠자는 남편의 얼굴을 빤히 보는데 문득 그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할아버지가 되어 있고, 나의 얼굴은 할머니가 되어 있는 모습이 겹치는 듯 무엇이 꿈이고 생시인지 헷갈렸다. 문득 우리가 지금 가장 눈부신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매일 말하는 것처럼 너도 나도 정말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때를 함께 보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브리저튼 샬롯왕비의 마지막 장면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