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무엇일까
필리핀에 있을 때 아는 분이 알코올중독으로 고생을 하고 계셨다. 함께 공부하던 인도네시아 친구가 고민하던 내 표정을 읽어서인지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거 참 곤란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먼 친척 중에서도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신 분이 계셔서 어렴풋이 그 고충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이기를,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순간 고개를 꺄우뚱했다. 술을 안 좋아하는 나라가 있었던가? 술 하면 떠오르는 나라들이 하나 둘 생각나다가 어느새 지도를 가득 채웠다. 우리나라도 술을 많이 마신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주변 국가들 뿐만 아니라 맥주 이야기 하면 갑자기 없던 애국심 생겨나는 유럽 친구들까지, 신화 속에도 등장했던 그 술들을 안 좋아하는 나라가 있었나?
우리나라도 예전에 비해 금주나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들이 퍼져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술에 대해서는 관대해 보였고 더불어 술에 대한 다양성도 넓혀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중년, 노년층의 경우,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한두 잔 끊임없이 찾던 술이 나중에 알콜성 치매를 일으키기도 하고 알코올중독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많이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술문제로 인한 갈등을 빚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기에, 나는 친구의 ‘흔하진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싶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인도네시아에서는 알코올 중독이 흔하지 않아?”
“응. 물론 인도네시아에도 술이 있고 마시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코올에 중독될 정도로 술을 마시려면 정말 꾸준히 계속 많이 마셔야 하잖아.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슬람 문화가 다수이다 보니 술이 엄청 비싸. “
그랬다. 필리핀의 가장 남쪽 끝에 있는 군도로 이뤄진 섬들은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보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더 가까울 정도라, 나는 가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같은 문화권 사람이라고 종종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 생각을 확실히 깰 때가 있었다. 바로 종교가 들어왔을 때였다.
그 옛날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면 말레이시아를 넘어 인도네시아를 건너 아마 필리핀까지 무슬림 세력들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섬나라들로 동질성을 가진 부분이 많았다. 길게 연결된 가래떡 같은 지리적 연결성을 칼로 똑 잘라낸 것 기준은 다름 아닌 종교였다.
실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종교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진실성은 잠시 옆에 내려두고, 필리핀은 인구의 약 90% 정도가 가톨릭,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약 80%가 이슬람을 믿는다고 하니 두 나라는 종교로만 보면 전혀 다른 국가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필리핀 사람들의 커다란 가족 명절과 거리의 성당들, 지프니와 국회의사당의 가톨릭 장식들만 보더라도 가톨릭이 얼마나 그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그걸 필리핀에서만 살다 보니 특별히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문득 가톨릭이 아닌 이슬람이 대다수인 인도네시아와 비교하다 보니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술 담배와 관련한 차이가 눈에 띈 것이었다.
필리핀 하면 떠오르는 술이 있는가? 필리핀에는 산미구엘이라는 유명한 맥주가 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별로 마셔본 적은 없었지만, 아주 강한 도수부터 레몬맛, 사과맛처럼 달달하고 약한 과일맥주까지 무척 다양한 종류를 가진 브랜드였다. 가격도 저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심지어는 내가 활동하던 슬럼 지역에서도 동네 아저씨들이 집 앞에 앉아 산미구엘 맥주들을 몇 병씩 놓고 마시는 것이 흔한 풍경이었다.
반대로 필리핀에서 담배는 맥주나 술만큼이나 많이 피운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물론 이것도 술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고 말할 뿐, 일반 마켓에서 구매하지 않고 암흑 시장에서 담뱃잎을 구해 직접 말아 피우면 담배가격이 훨씬 싸서 실제 흡연자는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일반 사람이 필리핀의 슈퍼마켓에 들어가 담배 한 갑과 맥주 한 병의 가격을 놓고 비교해 본다면 왜 필리핀 사람들이 담배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시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필리핀에서는 맥주가 담배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래서 필리핀에 있을 때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담배 피우는 것보다 훨씬 익숙하게 목격했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는 것이 아닌가. 카페나 음식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으면 남자나 여자나 손쉽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특히 필리핀 마닐라가 있는 루존섬에서는 자주 보지 못하는 히잡을 쓴 여성들은 물론 딱 봐도 일에 찌들어 담배 한 대를 피러 나온 직장인 여성까지 건물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여서 정말 다른 나라에 온 느낌이었다.
반대로 필리핀에서는 부유층 동네나 빈곤층 마을이나 어디에서나 쉽게 보이는 맥주가 인도네시아에서는 뭔가 화려한 바나 루프탑에서나 찾아볼 것 같은 느낌. 물론 어딜 가나 암흑시장은 존재해서 찾고자 하면 어떻게든 술을 살 수야 있겠지만, 그저 현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외국인 일상 생활자의 눈에 비치는 현지의 풍경이 담배와 술로 구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발견이었다.
필리핀에서는 차창밖이나 음식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 중에 맥주나 술이 자주 비췄다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필리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풍경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더 자주 눈에 띄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마지막에 인도네시아 친구가 알코올중독을 이야기하며 덧붙인 진담 같은 농담이 생각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알코올중독도 부자여야 될 수 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