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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Dec 31. 2023

2023년의 마무리

햇살에게 키스를


독일에 돌아온 지 한 달이 거의 다 돼가는 오늘, 처음으로 눈을 뜰 때 정말 쨍하게 햇살이 비추는 아침을 맞이했다. 할 일들이 많았지만 이 햇살이 언제 사라질까, 나는 또 언제 이 햇살들을 듬뿍 맞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밥 먹는 사이에도 이 햇살이 사라질까 이것저것 아무거나 입에 넣고 그냥 어디로든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벌써 해가 눈높이 즈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언제 해가 저무나 시간을 봤더니 4시 반 즈음이었다. 새삼 독일 겨울은 해도 거의 구름에 가려져 있지만, 해가 떠있는 시간 자체도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선크림을 발라도 남아공이나 필리핀에 살았을 때는 해를 언제나 피해 다녔는데, 해가 떴다고 이렇게 부랴부랴 집을 나선 뒤 눈을 감고 가만히 해님에게 키스하듯 얼굴을 살짝 올려보는 것이 순간 처음 독일 사람 다된 건가 싶었다. 보통은 독일어가 처음으로 잘 들린다거나, 독일어로 꿈을 꾼다거나 이럴 때 독일 사람 된 느낌이 든다던데 나는 겨울 햇살을 보며 처음 느껴본다.



날씨가 모처럼 좋아서인지, 연말이라 사람들이 오손도손 모인 건지 호숫가에 사람들이 북적북적였다. 겨울이면 보덴호수도 조용해지겠지 싶었지만, 여전히 관광지는 관광지인 듯했다.



안개가 끼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야가 이렇게 하늘이 조금만 개어주면 여름보다 더 선명하게 호수 건너편 스위스의 설산들이 정말 병풍처럼 펼쳐진다. 스위스 쪽에선 어떤 풍경들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스위스 쪽에 가보지 않고도 이곳, 독일 쪽에서 보는 풍경들이 훨씬 특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겨울만이 아니라 한여름에도 설산이라는 풍경과 마주하려면 한참을 차를 타거나 걸어 올라가는 수고가 필요했는데, 이렇게 평평한 호숫길을 걷는데 부채처럼 끊임없이 펼쳐지는 설산의 풍경을 마주하며 걷는 곳은 이곳이 처음인 것 같았다. 새삼 이런 풍경이 우리 집 동네의 풍경이 되었다는 것이 반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게 느껴졌다.




2023년은 이렇게 달라졌었다. 4년 동안 살았던 베를린을 떠나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진 보덴호수 근처로 보금자리를 잡았다. 보덴호수 근처의 동네들은 대부분 시내 중심가가 호숫가라 12월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베를린에서는 보지 못한 백조들도 마켓을 걸어 다니길래 군밤을 나눠먹고 싶었다.



유럽에는 흔한 타운 중심의 어느 성당을 들어가도 이곳에는 그 흔한 스테인 글라스에도 동네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동네의 풍경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뜨거웠던 한 여름이 태양이 지나가고 나면 보통은 이렇게 흐린 하늘과 똑 닮은 흐린 호숫물을 마주하지만, 한 여름 호수는 이곳이 독일인지 팔라완인지 모를 정도로 눈부신 에메랄드 빛이 선명한 호숫물로 돌아간다.



해 질 녘 하늘은 여자들의 고운 눈화장처럼 붉고 고상한 색으로 변했고, 밤이 되어 달이라도 뜨는 날엔 드뷔시의 달빛이라는 노래가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플레이되면서 백조가 한가로이 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각이 많은 날이면 그냥 훌쩍 떠날 때 마주치는 잔잔한 호수와 흐드러지게 핀 꽃이 내 마음도 잔잔하게 해 줬고,



그렇게 잔잔한 풍경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더울 땐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자전거를 타고 떠나 물속에 풍덩 들어가 수영을 하던 여름날도 2023년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 뜨거웠던 여름날이 시작하려 할 때 우리는 베를린을 떠났는데, 남편이 처음 이사를 하고 내가 뒤늦게 독일에 왔던 터라 이렇게 텅 빈 집을 떠날 때가 돼서야 처음 보게 된 것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독일에서 처음 살았던 도시가 베를린이라 떠날 때까지도 우리가 정말 떠나는 것이 맞는지 얼떨떨했는데, 그 여름이 있었던 한 해를 지내고 나니 이제는 정말 떠나온 것을 실감한다.



베를린이 그리운가. 가끔씩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주소지상에는 베를린이었지만 우리 집 주변은 드넓은 풀밭에서 줌아웃을 몇 번 해도 전봇대 하나 나오지 않게 사진이 찍히는 외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 곳은 지하철 한 번을 타면 3-40분 만에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로 갈 수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베를린에 살았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렇다고 살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곳에서 4년을 보냈다.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베를린 동네들을 돌아다닐 때마다 새로운 그라피티들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고



베를린이기에 가능하고 베를린에만 있는 풍경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아했다.



베를린에도 넋 놓고 보는 풍경과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베를린의 음식들은 여전히 너무 그립다.



그리고 이곳도 언젠가 그리워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우리가 내년이 될 올 한 해동안 이런 풍경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내년 혹은 내후년엔 또 어떤 풍경을 보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목포의 바다만 바라보다가 케이프타운 바다를 보고 마닐라의 바다를 보고 이제는 보덴호수 앞 노을을 보고 있는 2023년.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을 간직하며 2024년에는 그 풍경 속에 사람을 좀 더 넣어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본다. 안녕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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