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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Aug 03. 2023

말수가 줄어든 커플이 나누는 대화들

베를린과 보덴제 일상의 차이




몇 달 동안 남편은 보온병에 대해 리서치를 했다. 한 가지를 사더라도 제대로 만들어지고 최대한 오래 쓸 수 있는 것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보온병을 사겠다고 한 지 몇 계절이 지나도 소식이 없길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가 보다 싶었다.


그랬던 그의 보온병이 지난 주말에 도착을 했다. 군대에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보온병 색깔은 국방색에 무슨 소형 미사일 탄두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팔뚝만 한 크기의 보온병이었다. 혼자 살았을 때, 내 취향대로만 고르라고 했다면 아마 한 번도 내 손안에 들어올 일이 없을 것 같은 보온병을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려고 하는데, 한껏 들뜬 남편이 옆에서 하는 말.


“이 보온병이 총알이랑 허리케인에도 살아남았었대.”


나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겼어.’




이 보온병이 남편을 이리도 들뜨게 만든 이유는 바로 드디어 이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하나 가득 담아 산책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에게 산책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독일에서 독일어를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언제 자신이 독일 사람이 된 것 같은가라는 질문을 한 내용이 있었다. 맥주나 독일 빵, 규칙 같이 예상이 되는 답변들도 있었던 것과 반대로 공원이나 불평 같이 바로 떠오르지 않던 응답들 사이에는 산책도 자리하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을 만나면 그게 친구들이든 가족들이든, 밥을 먹기 전이나 밥을 먹고 난 후에나 누군가 우리 산책이나 할까라는 말을 꺼내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준비를 한다. 그리고는 손에 맥주 한 병을 들고, 어딘가를 특별한 대화와 함께 또는 정적 속에서 정처 없이 걷는다.


남편도 그런 산책을 좋아하는데, 그가 특히 좋아하는 산책이 바로 차가운 공기를 걸으며 따뜻한 차를 마시는 그 특유의 조건 속 산책이었다. 휘파람을 불며 뜨거운 차 1리터를 우려낸 남편은 평소에 저녁을 먹고 걷는 동네 한 바퀴가 아니라 옆동네의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니면 다른 호숫가도 좋으니 호수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기차를 타고 10분 정도 지나면 기차를 내리자마자 호수가 펼쳐지는 풍경이 나타난다. 세찬 바람에 순간 호수가 아니라 바닷가가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어릴 적 태풍주의보가 치기 전, 바닷가에 가면 이렇게 머리카락들이 사정없이 휘날렸는데.


한 여름의 잔잔한 보덴 호수의 모습만 보다 처음으로 20도 아래로 떨어진 날씨에, 그래서 누구 하나 호수에서 수영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매서운 바람의 보덴 호수를 처음 마주한 것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호수의 물결과 그만큼 두서없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순간 여기가 바다가 아닌 것이 이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그 바람이 신기하게도 바다처럼 끈적이지는 않는 것을 느끼고 나니 다시 내 정신은 여기가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것을 이해하는 듯 했다.


남편은 거대한 보온병에 뜨거운 차를 한가득 담아 온 것만으로도 이미 한 껏 들떠 있었는데, 바람과 온도마저 이렇게 완벽하게 정반대로 신선하다 못해 차갑게 맞아주니 마치 추운 겨울날 온천물에 들어가는 원숭이처럼 황홀한 표정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벤치 방향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보니 노을이 지는 하늘에 구름들이 여러 겹으로 자신들만의 모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남편은 벌써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차를 컵에 담고는 나에게 먼저 건네준 뒤 이 모든 선선한 공기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맞바꾸며 노을만큼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다처럼 달의 기운을 받아 조수의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돌 하나를 던지거나 요트 하나를 움직여 파도를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언제나 잔잔하기만 하던 이 호수를 바람은 어디서 보이지도 않는 힘으로 어떻게 이리저리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 그렇게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궁금해하다 저 맞은편 끝의 구름들에 시선이 닿았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만 해도 커다란 호랑이와 맞서는 한 무리의 토끼 떼와 같은 모양이었는데, 남편이 빈 잔을 다시 따뜻하게 한 잔 채워주고 난 사이 갑자기 무언가를 하나 가득 하늘 위로 토해내는 새 한 마리가 보이는

 것 같아 우리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보온병이 비워갈수록 구름은 보온병 안의 차의 높이만큼이나 끊임없이 변해가서, 그 구름을 해석하는 우리의 상상의 날개도 쉼 없이 움직여 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보통은 청소년 시기에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도 꺄르륵 웃음이 터진다고 하는데, 남편과 나는 생각해 보니 이제 그 청소년 시기를 두 번도 넘겼을 나이인데도 여전히 구름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렇게 노을이 모두 사라지고 구름들도 어둠 속으로 데리고 가버린 뒤, 나는 문득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로 혹은 자연의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짝꿍이 있음에 감사했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다 보면 이제는 서로와 서로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익숙해져 말수가 줄어들 때가 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할 말이 없는 건가 오해를 하다가, 이제는 그런 오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또 말수가 없어지는 그런 때,


나는 문득 우리가 그동안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지 떠올려 보았다. 우리가 베를린에 살았을 때, 우리는 커피와 음식, 아니면 베를리너들에 대해 자주 말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이 카페는 저기보다는 별로 인 것 같아.”

“여기는 진짜 본토음식 같다.”

“베를린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가 있지.”


우리가 베를린에 있으며 가장 자주 했던 것은 인터내셔널 한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카페들을 시도해 봤고, 그 사이사이를 오가며 마주치는 다양한 베를리너들을 보며 낯선 풍경이 나타나도, 베를린에선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놀란 표정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애써 천연덕스럽게 넘기는 척하는 것 등이었다.


그 추억들과 자유분방함을 떠올릴 때면 그리운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지만, 보덴제 근처에서 여름을 보낸 2달 동안 남편과 나는 이제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굳이 둘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딘가를 함께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무언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바라보게 된 것들은 산과 언덕, 별과 달, 구름과 바람, 호수와 수량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서 자연이 만드는 것들로 옮겨온 느낌이라고 할까. 베를린에서만큼 맛있기도 하면서 다양하기까지 한 음식들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우리는 베를린에서는 도시의 불빛과 사람들에 가려져 잘 느낄 수 없었던 자연의 다양한 모습들과 다시 연결된 느낌이었다.


아마 베를린이었다면 굳이 보온병에 차를 담아 산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시고 싶은 차나 커피를 찾아 산책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과 보덴제가 거의 폴란드와 프랑스처럼 머나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앞으로 보덴제에서의 삶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베를린에서와는 달리 차와 커피뿐만 아니라 도시락이나 간식들도 직접 만들어 싸고 다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베를린에서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처럼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이제는 음식보다 그 함께 만드는 음식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풍경을 발견하고 또 짜증 내면서도 웃으며 좋은 추억들로 남길지가 더 기대도 된다.



그렇게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호숫가를 걸어가는데 두꺼운 구름 뒤로 거대한 보름달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차 시간 몇 분을 놓칠까봐 시계만 살피고 있었는데, 거대한 보름달과 마주치자 홀린 듯 우리 둘은 달빛에 끌려 다시 호수 가까이로 가서 달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베를린에서는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이었는데, 보덴제에서는 기차가 언제 오든지간에 그냥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들을 한 두 개씩 꼭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날 밤에는 따뜻한 보온병이 그랬고, 거대한 보름달이 그랬고, 귀여운 나의 남편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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