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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an 24. 2021

내가 사용했던 모든 것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경험한 잡다한 노트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던지라 중학교까지 꿈이 만화 세계에 가보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꿈을 깨어준 것은 해리포터였다. 해리포터도 판타지였지만 해리포터의 어떤 부분이 나를 현실세계로 이끈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찌 되었건 만화 세계에 가보고 싶다는 꿈이 사라지고 나자 자연스럽게 나는 그럼 만화 세계에는 가지 못하더라도 세계를 돌아다는 것으로 꿈을 바꿨다. 적어도 지구별에 있는 나라들을 돌아다녀 보는 것을 가능한 꿈 같았았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나라가 마다가스카르였는데 영어 공부도 할 겸 마다가스카르도 가까우니 가볼 수 있는 길이 있겠지 하며 스무 살에 떠났던 곳이 남아공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보단 낯선 한 곳에 머물며 그 지역의 일부가 되고 싶은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맨 처음 해외로 날아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필리핀에서 6년의 시간을 보냈다. 섬나라이고 동남아시아, 아세안 국가들 중 하나이다 보니 일적으로나 학업적으로나 주변 동남아시아에서 온 친구들과도 친해질 경우가 많았고, 인류학이라는 현지조사방법을 배우고 직접 현장에 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조금 더 현지 사람들의 입장에서 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독일로 넘어와 살게 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왜 내인생은 이렇게 뜬금없이 남아공이고 필리핀이고 독일인가. 독일에 넘어오고 나서 이렇게 다른 나라들을 다녔는데도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지금껏 겪은 나의 경험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생각이 났다. 어쩌다 보니 나는 이삼십 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유럽까지 통틀어 유라시아 지역에서 야금야금 살아온 사람이 되었다.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 호주같은 소위 잘사는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아도 이렇게 살기에는 별로 끌리지 않은 나라들에 대한 경험까지 갖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물론 다른 나라에 살면 살수록, 지역마다는 물론 한 국가 내에서도 너무나 광범위한 다양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광범위하기 그지없는 인류학을 공부했으니 앞으로 이 경험과 학문적 배경을 어떻게 먹고살 것에 연결시킬지가 고민이었다.


유럽이라는 새로운 지역에 와서 적응하며, 때마침 터진 코로나 덕분에 나는 그 고민에 무척이나 집중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생각의 조각들을 엮다 보니 무언가 하나만이 아닌 여러 분야가 걸쳐진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풀자면 무척 묘연해질 수도 있는 것이 인류학이었지만 그런 인류학 분야가 실제 가장 실용적으로 활용되는 분야가 있다면 UX, 사용자 경험 분야였다. 비즈니스나 UX 디자인 부분에서 사용하는 전문적인 용어나 툴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인류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론들이 많이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비즈니스나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한 지역에서 외국인이지만 현지인처럼 머물며 그곳에 조금이나마 살아본 경험은 나에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서로 다른 시장에서 실제 현지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된 상품이라도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고 경험하는지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올해부터는 새롭게 데이터 과학, 데이터 분석이라는 전공을 온라인 대학교에서 배워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경험했던 현장에서의 지식과 인류학이라는 배경, 이를 접목한 사용자 경험 리서치를 데이터 분석과 함께 풀어가는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졌다. 지금까지 이와 가장 근접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관찰의 힘'이라는 책을 쓴 얀 칩체이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인류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현지조사와 더불어 사용자 경험 리서치와 데이터를 가지고 비즈니스 리서치와 컨설팅을 했다. 나 역시 무언가 해외에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거나 모니터링, 성과를 판단할 때 필요한 타당성, 시장조사를 할 때 현지의 맥락에서 현지 사람들의 행동과 그 뒤에 숨겨진 동기를 풀어나가는 리서치와 컨설팅을 해보고 싶어 졌다. 더불어 환경과 사회, 거버넌스, 지속가능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그 산업의 미래나 감춰진 부분도 생각해보고 싶어 졌다. 이를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사용자 경험'에 대한 리서치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나 역시 한 명의 '사용자'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심지어는 유럽과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무언가를 언제나 사용했던 '사용자'. 그래서 그 '사용자'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나는 그동안 무엇을 왜, 어떻게 구매했고, 내가 머물렀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하여 '내가 사용했던 모든 것들' 프로젝트. 그래서 올해엔 일주일에 한 편씩, 내가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라는 주제로 나의 사용자로서의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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