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시 이력서를 뿌린다, 이직 준비는 자고로 입사와 동시에!
지난달, 새로운 미국 회사 입사 후기를 썼다. 이직 1주일 만에 퇴사 마렵다며 글을 썼는데, 이젠 입사한 지 약 한 달 차가 되었다. 역시 시간은 빠르다. 정신없던 첫 주를 보내고, 회사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적응하게 된 한 달 차의 신입 경력 직원의 후기를 기록해보려 한다.
먼저, 항상 밝히는 연봉 1억이라는 숫자가 미국에선 그냥저냥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연봉이라는 점을 상기드린다. 한국에서 직장인 연봉 5천의 느낌? 낮지도 않지만 높지도 않고, 막상 버는 사람 입장에선 요즘 물가 생각하면 남는 것 없는 월급정도를 받을 수 있는 느낌의 숫자. 내 연봉도 지난 회사와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것 없고, 보너스니 이것저것 다 받는다면 현재 높은 달러 환율로 인해 1억 3천이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월세, 보험료, 세금, 생활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는 수준의 연봉이다.
미국에서도 억대 연봉, 즉 '식스피겨(6 Figures)'라고 자기 연봉이 6개의 숫자가 되었다는 의미의 상징적인 100,000 달러를 넘어야만 그래도 좀 번다고 할 수 있겠다. 높은 연봉을 받는 업계에서는 낮은 연차의 직원들도 이런 연봉을 받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나는 정말 소소~한 직장인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연봉 1억이라고 하면 여전히 많이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차 떼고 포떼고 내 손에 떨어지는 돈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돈으로 미국에서 월세내고 밥 먹고 살다 보면, 서울에서 적당히 전철 타고 출퇴근하는 외곽에 그냥저냥 괜찮은 빌라에 쓰리룸에 남편과 살며 회사 다니는 직장인들과 비슷하다. 어그로성 제목임과 동시에 미국에서 입에 풀칠만하고 사는 수준의 회사원으로서 후기를 써보려 한다. 미국에서 하도 잘 나가는 연봉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못한 미국 직장인으로서 쓰는 후기가 누군가에겐 공감과 위로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한국에서 읽으시는 분들껜, 미국에서 1억 넘는 연봉이라는 게 세금 떼고 월세 공과금 내고 나면 소소하게 아끼며 사는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네-물가차이란 엄청나군 정도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나아가 명절에 누구 집 딸, 아들이 미국 이민 가서 돈을 이만큼 벌더라 할 때 속으로 '그 돈 정도면 손가락 빤다고'라고 생각하시길 바라며.
내가 회사원으로 사는 이유는 자아실현이나 대단한 커리어 성공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안정적인 보험, 매달 꾸준히 들어오는 월급, 그리고 앞으로 2년 정도는 더 일을 해야 은퇴 후 미국 정부에서 주는 연금 소셜 시큐리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니는 것이다. 내가 더 능력이 출중했고, 경제적으로 독립된 사람이었다면 뭐 하러 쓸데없는 미팅이 가득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도 책임을 서로 떠넘기며 겉으로 번지르르한 말로 넘기고 결국 일은 밑에 직원들이 떠 앉아 야한 회사라는 조직을 다니겠는가. 집에서 빨래하고 밥 해 먹고 청소하고 좋아하는 인형옷이나 만들어도 하루는 금방 간다. 심지어 귀여운 인형옷을 만들면 성취감도 느낀다.
나는 회사라는 집단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도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은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 싶다. 이런 삶을 원하지만, 이런 게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의 자유를 억압하고 회사라는 조직에서 정말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 가면을 쓰고 일하러 다닌다. 이런 정신머리로 뭘 할 수 있겠냐고 비난한다면, 열심히 회사에서 자아를 이루시면 된다. 안 그런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인사고과가 좋고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속마음은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것부터가 큰 스트레스인 사람도 있다.
나도 안 그런 시절이 있었지만, 그건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그 자체로 감동받아하던 사회 초년생인 나는 모든 것이 감사했고 예쓰맨이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건 더 많은 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상사, 이래저래 내 탓을 하던 동료 직원들이 대부분이었고 회사라는 곳이 생각보다 더 별로인 곳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 내 경험과 현재의 연봉의 수준을 냉정하게 인지하고 내 일자리를 평가하면, 정말로 애사심이 생기기가 어렵다. 애사심이란 자고로 내가 이렇게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다니, 정말 행운아 같다! 또는 내가 하는 일에 비해 보상이 매우 좋다고 느껴져야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전 회사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직장 동료 할머니, 아줌마들이 많아 회사 자체는 싫어도 회사 출근이 가끔 기다려질 만큼 동료들 얼굴 보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매주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차로 왔다 갔다 하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호텔에서 2박 3일을 보내야 하는 것이 큰 불편함이었다. 코로나 시절 재택근무로 할 땐 그렇게 좋을 수 없었는데, 내가 바꾸지 못할 환경 속에 놓이면 오래 다니고 싶어도 이직하게 되는 게 현대인들의 순리이자 삶이다.
새 회사는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으니, 불편한 건 물론이요 2030 젊은 세대 직원들이 대부분이라 가면을 더 쓰고 있는 느낌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미국도 확실히 가정이 있고 나이가 많은 분들은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껴 가면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인간대 인간으로 가까워질 수 있어 좋았는데, 이직한 현 회사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보니 내가 어떻게 보일지, 내 옷차림이 어떻게 보일지, 내 말투는 어떨지,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무리들과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정치질을 배워나가고 있는 단계라 나처럼 어정쩡한 30대 중반의 중간 매니저급이 아닌 일꾼에겐 상당히 짜증 나는 회사다. 젊은 친구들과 잘 지내며 그들이 좋아하는 콘서트, 클럽, 퇴근하고 술 마시러 다니는 걸 즐기면 몰라, 집에 가서 들개처럼 저녁밥을 먹고 누워서 유튜브 보는 게 딱 맞는 체력의 30대 중반은 조용히 회사에서 한 달 차 경력 신입으로 겉돌고 있다.
게다가 경력직 신입이라는 것이 그렇듯, 회사에서 바라는 기대치가 높다. 사회생활 짬바가 차있는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다 보니, 뭔가 우리 회사 썩은 시스템을 고쳐줄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대되는 마음과 동시에 니 수준을 내가 평가해 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부담되는 시각을 이겨내고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도록 이런저런 주장도 해야 하고 피곤한 한 달이었다.
회사는 미국 최대 규모 의류기기 납품 업체답게 시설, 설비면에선 아주 좋다. 회사 자체 경영도 탄탄해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펀딩이나 투자에 아낌없는 부분도 긍정적으로 보이나, 기본이 흔들리는 회사로 보인다. 가장 기본이 되는 프로그램이나 모든 팀원들이 업무 속도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이 망가져있어, 조금만 제대로 파일 정리를 하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되는 세팅과 100년 넘게 주먹구구식으로 업무를 해 온 세월이 쌓여 업무 처리 방식이 정말 엉망진창이다.
수많은 회사를 다녀봐도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꼬여있는 곳은 처음 봤다. 이 회사의 고인 물, 신입들도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간단한 일도 어렵게, 헷갈리지 않는 것은 없는 회사라고. 기존 회사에서 매 시즌 100벌에 가까운 신상들을 처리해 낸 것에 비해 이 회사는 1년에 30벌도 되지 않는 신상을 뽑아낸다. 1년에 400벌과 30벌은 비교도 되지 않는 업무량이지만, 망가진 시스템과 각종 데이터들이 뒤죽박죽 섞여있어 간단한 파일 하나를 찾는데도 이메일을 여러 명한테 보내야 할 정도로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부서 디렉터는 이 회사 내에 의류 관련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몇 안되고, 그중에 한 명이 나라고 했다. 한 달 만에 이런 소리를 들은 나는 부담은 물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왜 이렇게 업무를 비효율 적으로 처리하냐에 대한 답을 얻었으나, 전체 부서가 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내 맘대로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도 막막하다.
그리고 의미없는 미팅이 너무 많다. 미팅마다 큰 안건이나 답변도 얻을 수 없지만 의무적으로 모이며 없는 이야기도 꺼낸다. 그러다 갑자기 해외 출장 승인이 나기도 한다. 입사 한 달차인 나에게 미팅 중 갑자기 멕시코 출장에 같이 가는 게 좋겠다며, 미팅에서 승인을 내고 다음주에 멕시코로 출국하게 되었다. 이 출장을 통해 큰 성과는 없고 단순히 '인사차' 같이 가는게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의미없는 출장비로 낭비하는 돈을 실제 업무에 도움되는 프로그램 사용비로 쓰면 될텐데, 그건 또 안된단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갑자기 멕시코 출장을 가게되었다.
나아가 나와 가장 업무를 가깝게 진행하는 직원이 수박 겉핥기식 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깨끗하게 세팅을 해두었으나 상당히 현미경 시야의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다. 옆자리 동료의 경력을 무시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실제 의류 관련 업무를 제대로 한 것은 경력 초반에 영국 회사에서 3년간 일하고, 미국에 돌아와서는 머리핀이나 아동용 액세서리를 다루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보니 지금 테크니컬 디자이너로서 기술적인 역량이 많이 떨어진다. 업무적인 이야기를 자세히 기술하기엔 너무 길지만, 이 업을 계속하던 사람들이 보면 왜 이렇게 해둔 거지 의문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다른 팀원은 물론 벤더, 공장에서 일을 두세 번 하게 만드는 형태로 세팅을 해두었다.
게다가 테크니컬 디자이너의 기본은 의상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패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패턴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지식은 되어야 빠르게 업무처리를 할 수 있는데, 패턴을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마치 수학 선생님이 함수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이야기와 비슷하겠다. 근데 이 회사에서 3년간 근무를 했으니, 나름의 텃세와 내가 바꾸려고 하는 부분을 본인에 대한 지적이자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사사건건 폰트사이즈니 맞춤법 지적을 하며 전반적인 틀을 고치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 사소한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달까. 즉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다 보니, 같이 일하기 정말 피곤한 타입이다.
다행히 내 직속 상사는 좋다. 매니저는 딱 봐도 외향적인 성격과 누구와 둥글둥글 잘 지낸다. 그리고 아들 둘을 둔 젊은 엄마인데, 그래서인지 경력 신입인 내가 헷갈리는 부분을 몇 번 물어보거나 업무 처리 방식 변경 요청에도 흔쾌히 의견 수용을 해주고 인내심이 돋보인다. 가끔 별로인 상사들은 물어보기만 해도 짜증내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새 상사분은 일이 바빠서 기억을 잘 못하는 것 외에는 아주 좋은 사람인 듯하다. 미국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에 관대하다거나 미국 대학 수업에서 질문이 많다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살아 본 걸까 가끔 궁금하다. 미국에도 질문 많이 하면 귀찮아하고 짜증 낸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심 있는 상사는 아주 보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한 달간 이래저래 겪어본 결과, 장점도 있지만 업무와 관련해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다. 긴 이야기로 풀어내렸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1. 연봉 2. 엉망진창인 시스템 3. 텃세 있거나 전문 지식이 부족한 동료들 4. 이로 인해 변화가 어렵고 보수적인 문화 5. 의미 없는 미팅이 너무 많음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자고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참는다고 회사가 바뀔 순 없고, 그렇다고 내가 참고 다닌다고 대단한 성장이나 성취나 보상이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이직을 해야겠다.
이직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보니, 빠르게 나와 맞나 안 맞나를 판단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이직이란 게 마음처럼 빠르게 되지 않으니, 입사와 동시에 이력서를 뿌리고 다니는 꼴이다. 현 회사를 1년 정도 채움과 동시에 이직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이직도 하다 보면 이골이 나는데, 제발 다음 회사는 상사, 팀원, 사내 시스템, 문화 모든 게 맞는 유니콘 같은 곳을 찾게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 생활에 염세적인 내가 만족할 수 있는 회사가 어딘가에는 있길 바라며 뜬구름 같은 희망을 찾아 오늘도 이력서를 날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