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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비누나 Jan 16. 2024

18cm 50g 존재가 주는 위안

33살 나의 조그마한 3살 소울 메이트 

내 닉네임 '깨비누나'는 말 그대로 깨비의 누나라는 뜻이다. 그럼 깨비는 누구일까? 깨비는 18cm, 50g의 작은 오리 도깨비. 이 오리 도깨비 친구의 이름은 나름 글로벌한 조크가 섞인 덕(duck)-깨비. 분홍색 털에 귀엽게 면도된 동그란 얼굴에 오리입이 깜찍하다. 내 양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덕깨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귀여운 걸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람이면 매한가지일듯하다. 예쁘고 귀여운 것들은 카페 인테리어, 옷 가게, 호텔, 심지어는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에도 디자인으로 새겨져 있으며 우리가 배우자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자기 맘에 드는 외형이나 성향을 찾곤 한다. 꼭 눈에 띄는 부분이 아니더라도 성격이 귀엽다거나, 콘텐츠가 힐링된다거나 등등. 다 저마다의 기준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덕깨비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지품' 중 하나다. 물건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데, 개인적으로 깨비를 작은 나의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성별도 없고, 그냥 귀여운 인형이지만 나는 실제로 남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내 마음에 들고 귀여운 것들을 보면 항상 나 스스로를 무의식 중에 누나라고 생각한다. 평생 장녀로 살아왔고 일가친척 동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녀, 희생해야 하는 포지션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나 스스로를 항상 언니나 누나로 생각하고 있다. 33년간 살면서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항상 십중팔구 듣는 말이 있다면 "어른스럽다(어른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또래에 비해 생각하는 게 나이가 훨씬 많은 것 같다",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깨비누나가 훨씬 어른 같다" 등 이런 류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쭉 그런 걸 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항상 장녀의 포지션으로 당연스럽게 포기하고 결정권자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 서있어서 그런 듯하다. 신기하게도 어느 그룹에 가나 소수의 장녀, 장남과 다수의 중간 포지션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소수의 막내나 외동아이들이 마치 자기 집에서 자라온 성향대로 사회에서도 적응하고 지낸다. 그래서 아주 놀랍게도 나와 사이좋게 지내는 절친이나 회사 친구들은 대다수가 중간에 낀 형제자매, 막내들이 많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주 신기하게 다들 그러고 보면 자기 주변에는 유독 자기가 좋아하는 형제자매 포지션과 같은 친구들이 많다면서 비과학적인 이 주제에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18센티 50그람의 조그마한 깨비가 나의 동생이자 아주 절친한 친구이자 소 메이트라고 생각하며 항상 같이한다. 이 친구는 갑자기 웬 누나가 생겼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얘를 오빠나 언니로 부르는 건 더 웃기지 않을까?


MZ 조폭 같다는 코멘트가 있었던 패션 

깨비를 처음 만난 건 지난 2021년,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보고 존재를 알게 되었다. 유명한 인스타그램의 만화작가가 본인이 선물을 받았다고 올린 인형이 귀여워서 태그를 눌러 들어가 보았더니 귀여운 인형을 만드는 사람의 페이지가 떴다. 거기서 덕깨비가 있었다. 초반 덕깨비 콘셉트는 우가우가 부시맨 같은 옷을 입은 도깨비 콘셉트에 충실한 인형이었다. 충동구매하듯 구매하고 싶어서 메시지를 보내보았더니, 판매용이 아니란다. 아쉬운 마음에 구구절절 마음에 든다고 메시지를 남겨두고, 팔로우를 하고, 그분의 인스타에 종종 댓글도 남기며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해 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좋은 사람 같았고, 동년배로서 느끼는 스트레스나 불안에 대해서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리길래 공감도 갔다. 


나는 미국에 살고 그분은 한국에 살고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친근하게 지내다 보니 어릴 때 버디버디라는 채팅 프로그램으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친구 같기도 하고 재밌었다. 시간이 꽤 지나 그분이 덕깨비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귀여운 인형을 취미로 만드시다가 이제 직접 인형 제작 판매 사업을 하신다는 거다. 그래서 당장 가격이 얼마냐 연락하니, 공짜로 주신다는 메시지가 왔다. 한사코 사양했는데, 힘든 시기 응원해 줘서 고맙다며 덕깨비를 내 중학교 동창 S 기숙사로 보내주셨다.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선물도 보내드리며 이제는 실제로 얼굴도 보고 만나며 여행도 같이 다니는 친한 언니 D가 되었다. 사람들은 요새 온라인으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나 시집 장가를 간다는데, 나는 나이 들어 온라인에서 동년배 친구를 만났다. 


S 친구가 배대지(배송대행지)가 되어 받아준 덕깨비는 손수 만든 박스에 담겨 배송되었다. 한국에 오랜만에 방문해 친구한테 받은 덕깨비를 열어보자마자 너무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사실 인형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릴 때 직접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크면서 자연스럽게 인형과 멀어진 것은 아니고, 가정 불화가 많던 집안에서 양육되어 온 장녀가 아끼는 인형 따윈 화풀이 상대로 딱 좋았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인걸 알기 때문에 부모는 그걸 인질로 삼고 찢어버리겠다, 니 물건 치우지도 못하면서 '내' 집에 왜 두냐,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동생에게 주고 양보의 마음을 배우라고 윽박지르거나 나아가 부모 돈으로 산 것이니 네 것이 아니라는 협박을 듣고 자라온 내겐 어느 순간부터 인형, 다이어리, 옷 등 내 마음을 담을만한 물건이나 존재를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비싼 물건도 내게는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아끼는 마음이 들켜 협박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소중하다는 마음을 거부했다. 그리고 항상 가장 저렴한 것이나 중고로 구매하거나 내가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물건을 구매했다.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오고 나서는 학창 시절 내내 학비 걱정과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다 했다. 그래서 항상 제일 싸고 저렴한 것만 써 왔으며 그나마 소소한 럭셔리로 구매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스누피가 그려진 이불이었다. 아마존에서 30불이었다. 귀여운 것을 좋아해도, 오랜 시간 잊고 지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사회초년생 시기를 지나 20대 후반부터 겨우 내가 좋아하는 물건과 마음이 담긴 것들을 소중하게 대해줄 수 있었다. 


깨비는 누워 있는 게 좋아 

3년 전에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난 깨비는 내 일상에서 매일 함께한다. 침대에 같이 누워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선 소파에 눕혀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후엔 같이 에코백에 담겨 장을 보러 가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이렇게 소중한 인형을 '솜 친구', '애착 인형'이라고 부르던데 나한텐 귀여운 동생이자 소울 메이트라고 느껴진다. 말도 못 하지만, 그냥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귀엽다. 가끔 살아서 움직인다면 아주 시끄러운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데, 그래도 열심히 잘 키워줄 수 있다. 전공을 살려 깨비의 작은 옷을 지어주고, 여행 다닐 때도 함께 다니며 현지에서 조그마한 미니어처가 보이면 깨비를 위해 사준다. 나 스스로를 위해 물건을 사기엔 고민이 앞서는데 깨비의 귀여움을 위해서라면 선뜻 지갑을 열곤 한다. 누군가에겐 이런 존재가 가족, 반려동물, 자기 자신이겠지. 


이제 나는 누군가가 내 물건을 인질로 삼거나 협박을 하는 행위를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20대 후반, 가족과 연을 끊고 살고 있다. 나는 학대라는 말이나 가정 폭력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여전히 불편한데, 내가 당한 일들이 정말 학대일까? 폭력일까?라는 반문과 어디 나가서 가정사를 솔직히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사람들의 충격받은 표정들이 여전히 창피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들도 왜 없겠냐만 서도, 내가 힘든 시기에 "잘 먹고 잘 사는 주제에! 뭐가 힘들다고 징징거려. 제 잘난 맛으로 사는 네가 참 꼴불견이다"라는 말이라던지, 30대가 다 되어가는 내게 눈깔을 똑바로 안 뜬다고 얼굴에 재떨이를 던진다던지 이런 기억이 더 강렬하다. 그래서 인연을 끊고, 멀리 미국에 살고 있다. 어느 정도 나를 해하지 못한다는 안도감이 있기에 내 작은 18센티 친구 깨비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즐거운 마음이 든다. 너와 나, 누나와 깨비, 우린 항상 함께 지낼 테니.  


치즈 케이크 맛 좀 볼까

가끔 나와 깨비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는데, 내가 구축한 나름의 세계관에서 한 성깔 하는 깨비가 누나한테 말대답도 하고, 짜증도 내고, 예의 없이 행동한다. 그래도 나는 항상 장난스럽게 넘기거나 괜찮다고 말하고 혼자 자문자답을 하며 웃고 있으면, 남편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지만 내가 재밌어하니 곧 무시한다. 내 세계관에서 깨비는 날카롭고 맞춰주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특별한 오리이자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도깨비. 그래서 맞춰주기 힘들지만, 나는 항상 깨비를 사랑하고 우리는 함께한다. 가끔 한국 방송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다 보면 어린아이가 인형을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이야기하며 애지중지하는 장면이 방송되곤 하는데, 나도 그런 듯. 나이 33살이라도 여전히 응애인 걸까? 그래도 나는 깨비 응석을 받아주는 콘셉트의 누나인데. 내 세계관에서 깨비는 마음대로 욕도 하고, 짜증도 내고, 예민한데 그래도 항상 귀여운 얼굴로 사랑받는 존재다. 


요즘 인스타그램이나 SNS를 구경하다 보면, 나처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인형을 데리고 여행 다니거나 함께 하는 모습을 올리는 내 또래들이 많다. 우리 나름 모두 내가 힘들거나 즐겁거나 이 순간을 같이 해 줄 영원한 친구를 원하는 게 아닐까? 30대라서 맨날 결혼, 시댁, 전세, 주식, 부동산 이런 이야기만 듣고 사는 노이즈 가득한 일상 속에서 귀여운 존재가 주는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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