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그려 있으면 모든 것이 크게 보인다.
그렇게 아르바이트와 독일어 공부, 내 전공 연습을 병행하며 바쁘게 살았다.
같이 일하면서 친분이 생긴 새로운 친구들과 가끔의 여유 시간에 만나 서로 얘기도 나누며 일하는 곳이 같기에 할 수 있는 ‘뒷담화’도 나누며 급격하게 친해졌다.
그러다 한 누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나랑은 달리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었는데, 연출 공부를 하러 왔단다. 삶 자체를 굉장히 열심히 사는 스타일이라 그 어렵다던 독일어 C1 어학 능력 시험을 공부 한 지 6개월 만에 합격을 하였으며 베를린에 유명한 연극학교에 입학 허가를 막 받은 상태였다.
많은 동료들이 활기 넘치는 그녀를 좋아했고 나와 내 친구는 그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여러모로 많은 것이 위축되어 있던 나는 그녀의 에너지에 동화되어 같이 있으면 덩달아 힘이 나는 느낌이 좋았나 보다. 어느 날 그녀가 다 같이 모인 술자리에서 나에게 다가와 해맑게 한마디 건넸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데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연상의 저돌적이란 이런 것인가.
나도 모르게 만나보자고 그래버렸다.
그냥 일상이 어둡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녀를 통해 새로운 빛을 찾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좋았다. 그녀는 연극 연출 공부를 하기에 겸사겸사 많은 독일 연극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자막도 없이 눈앞에서 독어 대사를 이해하려 애쓰니까 반 강제로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부분이 참 감사한 경험이었다 생각한다.
그러나 연인 관계는 생각한 것이랑 다른 상황이 많았다. 그녀는 연출 공부를 하다 보니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이 많았는데, 다른 이성은 물론이고 같이 프로젝트를 하면 작업 후 이성과 단둘이 술자리도 잦았다.
나는 그런 상황들이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눈 맞아서 떠나가는 걸 너무 많이 봐온 탓일까. 아니면 단지 그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조금씩 사소한 불만들이 쌓여 결국엔 화를 내듯 불만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해? 그건 되게 편협한 생각이야. 너는 나를 그런 여자로 네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삶의 1순위는 그녀 자신이었다. 곁에서 지켜본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기에 1순위인 그녀가 내가 아닌 모든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단 사실이 못 견뎠을지도. 그러나 이성과 단둘이 새벽까지 술 마시다 항상 내가 데리러 가야 하는 그 상황은 정말 싫었다.
거기에 항상 나는 ‘내가 잘 모르니-‘,’ 내가 잘 못하니-‘ 이런 얘기를 달고 살았던 때라 그런지 그녀도 나를 대하는 게 의지할 남성이 아닌 챙겨야 할 동생으로 대하는 태도가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시간이 좀 지나 내 독일어가 어느 정도 늘어갔을 때, 그녀의 틀린 문법을 잡아준 적이 있었는데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나를 가르쳐 들어?’
라며 엄청 분개하는 모습을 보고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깨달았다.
특정 상황이나 어떠한 주제를 놓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녀는 내 생각을 비웃는 일이 많아졌다.
또한 그녀는 헤어지잔 말을 종종 습관처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로 잡았으나, 그녀가 원하는 건 [헤어지자 말하면 너는 꼭 날 잡아야 해]였다. 헤어지자 말하는데 안 잡으면 더 크게 화를 내곤 자기를 잡으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가 되긴 무서웠고, 그녀가 없으면 다시 어두운 일상만 계속될 것 같았다.
더 한심한 건 그녀가 나의 생각을 부정할 때면 나는 또 ‘아, 이건 또 틀렸나 보다’ 하고 스스로 인정을 했다는 것.
나는 왜 그녀가 틀렸다고 얘기하지 못했을까. 지나고 나서 곱씹으니 화가 났고 그러한 감정들이 마음속에 하나하나 적립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나에게 얘기를 건네는 톤이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언성을 쉽게 높이고 언제나 ‘네가 알면 얼마나 알아’라는 태도가 심해졌다 생각이 들 때쯤, 그녀와 헤어지는 게 맞다고 결심했다.
한 허름한 고깃집 테라스에 앉아 고기를 썰며 그동안 쌓였던 얘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나를 너무 존중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건데 너무 틀렸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술이 아무리 좋아도 너무 다른 이성과 단 둘이 있는 자리는 나를 남자친구로 생각하면 적당히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녀는 묵묵히 듣더니, ‘네 말은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단 야기야? 야, 그럴 거면 헤어져. 그동안 그렇게 참아왔는데 어떻게 만나?’
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래, 그러자. 진짜 그러는 게 우리 둘에게도 좋겠다.
그녀는 전과 같은 상황이라 생각했나 보다.
‘진심이야? 진심 아니지? 너는 또 내가 헤어지잔다고 바로 그래라고 얘기해?’
그동안은 이런 대화가 찾아오면 ‘그래, 내가 말실수했다. 미안해’라고 해왔지만, 갑자기 그녀와의 추억은 사라졌고 내 마음이 거짓말 같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아니. 진심이야. 그냥 그만하자.’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못 하다가,
‘그래? 그럼 진짜 헤어지는 거네. 잘 지내’
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잡으며,
‘앉아있어. 내가 갈게. 내가 선택한 결정이니까 내가 일어날래. 밥은 내가 계산할게. 잘 지내 ‘
그렇게 계산을 하고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