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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연습 Oct 19. 2021

겨우 여름

  장마와 폭염의 변주는 권태의 하모니였다. 나는 속절없이 젖어들고 녹아내렸다. 연이은 더블로 질주하던 내 말은 무인도에 갇혀서 차례를 갖지 못했다. 갇혀버렸다. 언제나 끝날까 싶은 여름의 권태, 그렇게 슬럼프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슬럼프는 느리고 흐릿하게 찾아왔다. 슬럼프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가지를 뻗치고 서서히 옭아매 온다. 나는 자신을 가지고 내 변화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초조해할 필요 없어. 차례는 오니까.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이 세계의 룰이니까. 억울해하며 감정과 체력을 허비하는 건 초보들이나 하는 일이니까. 단지 운이 없는 시기인 거야.


 그러나 슬럼프는 늘, 이번만큼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두통이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이 심상찮았다. 구조요청 같은 모스부호가 오른편 뒤통수로 전달되었다. SOS는 어젯밤과 오늘 아침, 그리고 다시 오늘 밤으로 이어지며 내일로도 이어질 의사를 점점 더 견고히 했다. 나는 폭염을 피해 방으로 숨었다. 에어컨 바람에 나를 가뒀다. 나는 그렇게 무인도에 갇혔다.


 다행히 며칠이나 비가 계속되면서 두통은 조금씩 잦아들어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별것 아니었구나 이번엔. 이런 건 슬럼프라고 할 수도 없지. 비가 그치자마자 조깅화를 신고 달려 나갔다. 아직 비를 머금은 찹찹한 공기 속을 질주했다. 힘이 넘쳤다. 이래서 휴식이 필요한 거지. 빗물로 불어난 금호강을 따라 내달리며 그간의 공백을 메웠다. 심장이 뛰고 땀이 솟았다. 두통이 멈췄다. 신이 났다.


 다음날 찾아온 것은 요통이었다. 끔찍했다. 수년 동안 허리는 늘 말썽이었지만 이번 통증은 달랐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방금 막 무인도를 탈출했던 참이었다. 또 갇힐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요통을 참고 회사에 나갔다. 결과는 병원행이었다. 병가를 내고 MRI를 찍었다. 약간의 디스크. 스쿼트와 데드리프트 금지. 아니, 이제 서른인 남자가 그 두 운동을 못하면 어떡하라고.


 참담했다. 건강만은 자신했었다. 게으르고 우유부단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지만 몸으로 하는 일만은 자신이 있었단 말이다. 무음의 소리를 질렀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후회 없을 만큼 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닌데, 이제 운동을 좀 제대로 해보려는 마음도 먹었는데, 기세를 꺾어버리니 분했다. 나는 다시 방으로 숨었다. 주사위를 빼앗겼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밖은 더웠고, 가슴은 식었다.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분한 마음이 아무리 데워도 가슴은 여전히 식은 채였다. 온갖 드라마와 영화를 다 보며 울고 웃어도 마음은 여전히 분한 채 그대로였다.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빼앗고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감췄다. 그러다 보니 나갈 수 없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권태에 묶여있는 상태가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꺾일 일도 없었으니까. 권태가 체질 같았다. 내세웠던 원칙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나른한 권태감이 그 자리를 훌륭하게 대체했다. 그 어떤 원칙들보다 견고하게 세워졌다.    

  


 이 드라마와 그 영화들을 내달리다가 스포츠 만화에 도달했다. 자신의 한계와 세상의 제약을 있는 힘껏 비웃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 그들의 열정이 내 분한 마음도 함께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만화들을 다 보면, 그때 일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은 이제 몸이 조금 근질근질한 것도 같았다. 나태는 실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출장으로 도착한 호텔에는 때마침 수영장이 있었다. 허리에 부담이 적어서 재활에도 좋을 테니까, 무인도를 탈출할 절호의 기회였다. 수영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래, 중량운동 좀 못하면 어때. 허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귀에 들어간 물을 열심히 털었다.


 몇 시간 뒤, 출장에서 들어오는 동안 목이 아파와서 아차 싶었다. 물을 너무 열심히 털어서 이번에는 목을 삐끗한 것이다. 수영을 하면 늘 그렇게 털었었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는 나이인가. 다시 침울해졌다. 참, 지겨웠다. 차라리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다면 슬럼프도 없을 텐데. 기분도 몸도 저하된 상태, 그걸 받아들일까 싶었다.


 뻐근한 목과 둔탁한 허리에 익숙해질 무렵, 그러니까 슬럼프에 익숙해질 무렵, 태풍이 왔다. 폭염도, 장마도 모두 씻어갈 만큼 커다란 태풍이었다. 간판이 뜯겨나가고 자동차가 뒤집혔다. 물이 불어나 마을을 덮쳤다. 그리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지겨웠던 그 여름이 마침내 끝이 났다.  

 

 에어컨이 춥게 느껴져서 알았다. 마침내, 그 지겨웠던 여름이 끝이 났다. 


 무인도를 나와 옥상에 올랐다.

 비 한 방울 머금지 않은 선선한 가을바람, 그게 불어왔다. 상쾌한 미소, 그게 올라왔다. 그러자 분했던 마음, 그게 날아갔다. 그러니 이게 다 여름이 저지른 일이었다. 여름 때문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였다. 바람이 오지 않아서였다. 마침내 기나긴 슬럼프의 끝이었다. 언제나 끝날까 싶은 여름의 권태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니까, 모두 내 잘못이 아니고, 단지 여름 때문이었다. 언제나 끝이 나고서야 알게 되지만 슬럼프에는 끝이 있다. 끝이 나고서야 알았지만 슬럼프였을 뿐이었다. 그건, 그냥 슬럼프였다. 다 여름이 저지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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