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 서점에 앉아서 카프카 소설을 다시 읽었다.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틀렸지만, 검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가렸다. 그것 만으로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적었고, 에어컨을 틀지 않고 가만히 선풍기 바람 앞에 앉아 있으면 시원했다.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펼쳤다. 나는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읽었다.
몇 번째던가? 지금 읽고 있는 카프카의 <선고>는 아마 5-6번은 읽었다. 역시나 다시 읽어도 새롭다. 카프카 작품은 지루하지 않은 리듬을 가지고 있다. 아니, 원래 지루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극복하면 그다음부터는 지루함 자체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카프카 소설의 리듬은 한 발 한 발 느리게 걷는 것 같지만, 사실 처음부터 전력질주다. 사람이 벌레로 변신하고, 알 수 없는 죄로 선고를 당하고, 도착한 곳이 미로의 입구다.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기에 출발점에 익숙한 우리는 출발점이 없는 소설을 읽는 것은 곤욕이다. 전력질주로 달여와 결승전 바로 앞에서 뱅뱅 도는 느낌이다. 그 짧은 순간을 길게 늘여놨으니 지루할 수밖에. 그렇지만 밀도는 높다. 그래서 카프카 책은 꽉 막힌 듯 갑갑하다. 하지만, 그 갑갑함이 카프카가 진실을 말하는 방법인데 어떡하겠는가!
나는 눈을 들어 어둑어둑한 서점 카프카를 둘러봤다. 가끔 놀란다. 카프카 소설을 읽으며 카프카 서점에 있다니. 이 묘한 우연 같은 일이 실제로 매일매일 일어나고, 그리고 이 우연을 내가 만들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나는 오늘도 카프카의 소설책을 펼쳤고, 질리지 않는 그 책을 카프카 서점에서 다시 읽는다. 천천히.
서점 카프카에는 카프카 읽기 모임이 있다. 그 모임을 시작한 지 벌써 6-7년이 되었다. 중간에 다른 작가의 책도 읽었지만 항상 카프카 읽기로 돌아왔다. 이 모임이 오랫동안 유지된 비결은 카프카 책은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뿐만 아니라 모임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새 소설을 읽은 듯 다시 정독을 한다. 이건 놀라운 일이다. 똑같은 모임에서 똑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인데, 매번 같은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다시 읽는 건 이미 아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일종의 상상의 영역이다. 있지만 보이지 않는, 비어있는 공간을 찾아서 새롭게 읽는 행위다. 새로운 해석, 새로운 판단, 각자 찾아낸 것들은 연결하는 새로운 관계. 같은 책을 읽어도 누군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고, 전혀 눈물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히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기어코 자신의 경험과 끼워 맞춘다. 그런 어긋남이 허용된다. 때로는 그 어긋남 때문에 새로움이 피어나고, 모험가처럼 해석의 신대륙을 발견한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카프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을 완벽하게 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오히려 목적이 없기에, 목적이 없는 빈 공간에 각자의 이유를 채울 수 있다. 그건 각자 다른 빈 공간을 보는 행위다. 굳이 목적이 있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적허영일 수 있는데, 허영이란 게 알맹이가 없는 겉치레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목적 없는 목적이 된다. 지적허영은 허영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건 없는 것을 찾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허영은 좋은 독서 방법이다. 목적이 없는 목적은 우리가 정해놓은 틀 밖으로 벗어나게 도와준다.
그렇게 각자 찾은 빈 공간의 연결로 나의 해석 영역이 넓어진다. 항상 정답을 찾는 행위에 매몰된 우리는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빈 공간에 딱 맞는 퍼즐 조각 찾기가 아니라 퍼즐 끝 부분을 넘어서 경계 밖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퍼즐 밖으로 우리는 뛰쳐나간다. 특히 문학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영역 밖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이 읽기의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특히 독서모임은 우리를 그렇게 한 반짝 경계 밖으로 동시에 옮겨 놓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동시에 번쩍 들려져서 옮겨지는 놀라운 경험을 가끔 할 때가 있다. 사소하고, 초라한 한 발자국의 옮겨짐이고, 때로는 자신이 옮겨지는 지도 모를 때도 있다. 하지만 옮겨짐을 만들어낸 글자는 분명 마음 어딘가에 새겨진다. 그것이 독서의 힘이고, 함께 읽는 힘이다.
모리스 블랑쇼가 쓴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에서부터 문학과 작가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한다. 카프카를 이야기하는데 왜 문학과 작가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하는 것일까? 분명한 이유가 있다. 카프카의 작품이 문학과 작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 또는 의문에 대한 힌트가 있다고 모리스 블량쇼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문학은 문학이 물음이 되는 순간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자. 이 물음은 작가의 의심이나 조심성과는 다르다. 작가가 글을 쓰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때, 글은 작가를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쓰는 것에 빠져들어 글을 쓴다는 가능성에 대해 무관심해지며, 심지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권리이고 그의 행복이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은 남는다. 일단 한 페이지가 쓰이면 그 속에는 글을 쓰는 동안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작가에게 질문하였던 물음이 현전한다. 이제, 작품 내부에, 독자가 -심각하거나 피상적이거나 상관없는 독자가-다가오기를 기다리며, 글을 쓰고 읽는 사람 뒤편에 문학이 된 언어가 언어를 향해 던지는 그러한 물음이 고요히 깃든다.’
그러니까, 카프카 작품을 읽는 것은 문학과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물론, 카프카를 통해서 얻은 답이 정답은 아니다. 다른 작가를 통해서도 다른 답을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지 못한 작가가 너무 많기에, 카프카는 하나의 중요한 길이 되는 것이다. 카프카 문학이 도달한 곳에서 우리는 문학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한 사람의 소설가를 발견하는 동시에 명사로써의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진 개인적인 기준이 전체 기준이 되고, 전체 기준이 다시 내면으로 들어와 개인의 기준이 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가 카프카일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통제자이고 완벽한 창조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런 작품은 소설은 될 수 있지만 진정한 문학은 될 수 없다. 블랑쇼가 말했듯이, '문학은 문학이 물음이 되는 순간 시작된다'.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이 오히려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에 답을 한다.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을 바라보고, 그 글이 작가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작가는 그 질문에 답한다. 자기가 쓴 글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 공허하고 하찮은 무한루프 속에서 문학이 창조되고 작가가 탄생한다.
그렇게 작품은 만들어지고, 그 작품은 독자에 의해 또 재창조된다. 뭔가 이상하다. 작가가 만든 작품. 독자가 만든 작품. 이렇게 두 종류가 있는 듯이 보인다. 더 낳아가 독자는 여러 명이니 작품은 수백, 수천 가지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특정 누군가, 또는 소수가 절대로 소유할 수 없다. 소유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문학은 이미 우리 뒤로 숨어버린다. 작가마저 소유할 수 없다. 작품은 어떤 영역 너머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 작품을 완벽하게 조망하지 못하고 얼핏, 또는 일부분만 자세히 본다. 그건 문학이 언어로 되어있고, 작가가 아무리 언어는 잘 조직하고 뛰어난 언어감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자 또한 해석을 하면 할수록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틈 속으로 우리는 빨려 들어간다. 그 작은 틈은 우리가 사는 동안 배운 모든 지식과 지혜보다 더 넓고 광대하다. 그 틈에는 인간이 언어를 창조하고 난 후의 모든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 모든 것을 조망한다고 해도, 조망한 순간 언어의 틈에서는 새로움이 피어난다.
우리는 그 틈을 탐색한다. 틈은 소설마다 다르고 변화무쌍하다. 어떤 소설은 틈이 넓고, 어떤 소설은 좁고 깊다. 또 어떤 소설은 들판처럼 낮고 단단하다. 가끔은 똑같은 소설을 언제 읽느냐에 따라 깊고 좁았던 틈이 넓고 낮게 변하기도 한다. 즉,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카프카 소설은 과연 어떤 틈을 가지고 있을까? 이 물음은 소설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소설을 마주한 우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나와 만난 카프카 작품 속의 틈은 당신이 만난 카프카 작품 속 틈이 다르다. 당연하다. 나와 당신이 다른데, 어떻게 마주한 작품과의 틈이 같을 수 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자에 따라 작품은 달라지고, 우리는 그 달라짐은 틈이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것을 찾을 뿐이고, 찾는 과정에서 타인을 만난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나를 발견하는 동시에 타인을 찾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을 함께 읽으면서 나와 타인 사이의 그 깊은 골짜기를 발견한다. 작가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 속에는 나와 타인이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