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by 강물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다. 오늘은 서점 휴일이라 침대에 그냥 누워있을까, 생각하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우연인지 비도 멈췄다. 점심 약속은 없어졌고, 나는 갑자기 한가해졌다. 그래서 도서관에 왔다. 그리고 노트북을 켰다. 몇 주전에 쓴 글을 수정했다. 어제 읽다 만 유디트 헤르만의 책에서 이런 글귀가 있었다.

'틀림없이 너는 오늘 올 수밖에 없었어. 셀마, 그리될 수밖에 없지.' (<레드파크> , 유디트 헤르만, 118쪽)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에는 그리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거창한 운명이라기보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이라는 듯 툭.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 그냥 슬퍼. 하지만 우리는 그냥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말에서 느껴지는 삶의 고단함, 또는 그러면서 이어지는 삶의 힘을 느낀다.

아주 자잘한 그리될 수밖에 없는 것들로 내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번뜩 깨어나듯, 수정하는 글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 그리된 것이군, 이라고 구시렁거리며.


추측건대, 카프카가 스스로 만족한 첫 소설은 <선고>였다. 카프카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움직이지 않고 밤새 소설을 썼다. 갑자기 불현듯 영감이 찾아와서? 그렇다면 영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소설을 쓴 날은 카프카가 후에 약혼자가 되는 펠리체를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만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고 이틀 후에 이 소설을 완성한다. 소설의 부제마저 '펠리체 B를 위한 이야기'이다. 소설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고 할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면 사랑에 관한 소설을 써야 마땅한데, 오히려 소설 속 주인공은 약혼자를 두고 강에 빠져 죽는다. 마음에 드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가 쓴 소설은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로만 가득한 소설이다. 왜?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카프카 내부에 속에 숨어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폭발하게 한 기폭제가 바로 펠리체이고, 펠리체를 통해서 자신이 처할 미래의 상황을 봤을 수도 있다. 펠리체와 함께 하고 싶지만 결혼이라는 기존 질서에 갇히기 싫은 감정! 그래서 현실에서는 내릴 수 없는 선고를 소설 속에서 내린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소설 주인공 게오르크 벤데만은 아버지에게서 가게를 물려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상인이다. 그리고 한 여자와 약혼을 앞두고 있다. 게오르크는 오래전에 고향을 떠나 사업에 실패하고 결혼도 못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는 친구에게 약혼 소석을 전하기로 한다.

약혼 소식은 그냥 전하면 되는데, 어쩐지 망설이는 듯 보인다. 왜? 친구에게 미안해서? 겉으로는 그렇게 치장할 수 있지만, 사실 친구는 게오르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아 고향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게오르크와 다르게 친구는 고향을 떠나 자유롭게 산다. 사업에 실패를 하고 고독하게 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게오르크는 이제 약혼을 하고 고향에 더 깊게 뿌리를 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친구는 약혼자가 없는 고독한 삶을 살지만 자유롭다. 모든 면에서 게오르크와 친구는 반대다.

친구는 게오르크 안에 억눌린 또 다른 존재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리고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억눌린 욕망이다.

소설 마지막에 아버지는 아들 게로르크를 향해 말한다.

'넌 이제 너 이외에도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어. 지금까지 넌 너밖에 몰랐지. 정확히 말하면 넌 순진한 아이였지.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넌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니까 알아둬. 나는 지금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

아버지의 선고를 받고 게오르크는 방을 뛰쳐나가 강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강 난간을 소년시절 부모가 자랑스러워하는 뛰어난 체조 선수처럼 뛰어넘는다. 그러면서 외친다. "부모님, 전 항상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라고. 그리고 강에 빠진다.

이게 뭔 일인가?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선고에 강에 빠져 죽는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아버지의 명령이 아무리 폭력적이라도 해도 게오르크는 거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더욱 폭력적이고 절대적이며, 반대로 게오르크는 무력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절대적이고 불합리한 폭력에 복종하는 개인의 무력함만을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게오르크는 거부할 마음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라고 일축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친구처럼 고향을 떠나 살면 되지 않을까? 약혼을 파기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뒤로하고 자유롭게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버지의 영향력을 그만큼 강력하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인정과 성공하고 싶은 욕망은 그만큼 강력하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혹여 그렇게 시도한 친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콧웃음을 친다. 곧, 다시 현실로 복귀하겠지. 이 평가에는 친구는 현실을 살지 않고 환상에 산다는 평가가 숨어있다. 게오르크가 친구를 실패자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아버지의 선고가 강력하다고 해도 강에 빠져 죽으리는 선고를 받아들인 게오르크는 이상하다. 한마디로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주체적이지 못하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찌질이고,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현실의 카프카도 아버지와 관계가 그렇다는 걸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카프카는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죽게 만드는 소설을 쓰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작가로서 선고한 것이다. 죽음으로 완벽하게 탈출하라. 현실에서 스스로 탈출을 선택할 수도, 실제로 죽을 수 없으니, 소설 주인공을 죽였다. 역설적으로 카프카 소설이 위대한 이유이다. 현실 속의 자신을 소설로 미화하기보다 현실 속 자신이 하지 못한 탈출, 또는 개인적 혁명을 소설로 보여준다. 그 혁명은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다. 탈출마저 아버지의 선고로 이뤄졌다. 카프카가 그리는 세계는 혁명으로 꽉 막힌 현실을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준다. 돌팔구가 없는 현실 말이다. 끝없이 탈출구가 없는 미궁을 헤매고,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새로운 질서에 포섭되는 상황. 돌파구가 있다면, <변신>처럼 벌레가 되어야 한다. <선고>의 주인공처럼 강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

그러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맞다. 억울하다. 그래서 카프카는 글을 썼다. 소설 속 주인공의 죽음은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순응하면서 그러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 순간 소설가 카프카도, 그리고 그 소설을 읽는 우리도 비논리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에서 벗어난다. 실제로 죽지 않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다. 물론 죽음을 탈출이라고 하면 논란이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단순히 옮겨진 것일 뿐일 수도 있다.

블랑쇼가 말한 '바깥'의 영역으로 옮겨짐이다. 적어도 바깥을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에게 선고는 바깥을 보여준다. 주체가 소멸하고 무기력해지는 경험, 기존 질서가 깨지고 일상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은 그곳, 말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할 수 있는 곳,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읽는 우리는 되묻게 된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찌질이처럼 누군가 대신 선고를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순응하면 살 것인가? 나에게 아버지는 무엇인가? 그 폭력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죽지 않았는데,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바깥을 경험한다.

우리는 낯설고 기괴한 죽음으로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직접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카프카는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선고(죽음)를 내리기 위해 소설 <선고>를 창조했다. 작가는 소설을 창조해 스스로 바깥으로 갔고, 독자는 소설을 통해 바깥으로 인도되었다.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 펠리체를 만나고 난 후 소설 <선고>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카프카는 그리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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